Busch Stadium, St. Louis, MO
미주리 주 동쪽 끝에 위치한 세인트루이스는 세 가지가 유명한 도시로 알려져 있다. 첫째로, 세인트루이스는 맥주의 도시다. 지금은 다국적 맥주 그룹 AB 인베브에 인수되었으나,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맥주 브랜드 ‘버드와이저(Budweiser)’를 보유한 미국 최대 맥주 기업 앤하우저 부시 사가 1852년 창립 이래 터전으로 삼아온 도시가 세인트루이스이다. 앤하우저 부시 사의 맥주 공장 투어는 세인트루이스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코스 중 하나이기도 하다. 둘째로,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세인트루이스는 범죄의 도시이다. FBI가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세인트루이스는 2013년 한 해 인구 10만 명당 38건의 살인 사건이 발생하여 미국 주요 도시 중 네번째로 살인 사건이 빈번한 도시에 올랐다. 그 외 많은 기관에서 선정하는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도시 순위에서 세인트루이스는 디트로이트와 함께 매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고 있다. 마지막으로, 세인트루이스 시민들이 가장 자랑스럽게 여길 타이틀은 바로 ‘야구의 도시’ 세인트루이스이다.
2015년 1월, 퇴임을 며칠 앞둔 전 메이저리그 커미셔너 버드 셀릭은 전미야구기자협회 행사에서 세인트루이스를 가리켜 “의심의 여지가 없는 미국 최고의 야구 도시이다. (You are the best baseball town in America, and there is no doubt about it.)”라는 찬사를 했다. 가급적 중립을 지켜야 할 커미셔너가 한 발언으로는 이례적일 만큼 애착이 가득 담긴 표현이었다. 당시 행사가 세인트루이스에서 열렸기 때문에 의례적인 립서비스를 표한 것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셀릭은 실제로 재임기간 내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세인트루이스야말로 최고의 야구 도시라는 말을 줄곧 해왔었다. 더욱이 한 때 지구 라이벌 팀 밀워키 브루어스의 구단주이기도 했던 그의 찬사는 결코 빈 말이 아니었을 것이다. 시즌이 한창일 무렵 세인트루이스를 찾아 카디널스 구단의 전통과 아름다운 부시 스타디움, 그리고 팬들의 야구 사랑을 직접 확인한 나는 셀릭의 말이 진심 어린 경의의 표현이란 것을 확신할 수 있었다.
최고의 베이스볼 타운, 세인트루이스
세인트루이스가 최고의 야구 도시라는 사실을 깨닫는 데에는 그리 많은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기념품점에 비치된 카디널스 티셔츠와 모자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대부분의 미국 공항 기념품은 해당 도시의 스포츠 팀 상품을 판매하는데, 어느 팀 상품이 어느 위치에 얼마나 많이 진열되어 있는지를 보면 이 도시에서 어떤 스포츠가 가장 인기가 많은지 대략 짐작할 수 있다. 다른 도시의 공항 기념품점과 비교했을 때, 세인트루이스에서는 카디널스의 붉은색 티셔츠와 모자가 전면에 압도적으로 많이 배치되어 있었다. 공항에서부터 야구 도시의 기운을 감지한 나는 부시 스타디움으로 향하기 위해 경전철에 몸을 실었다. 목적지에 가까워질수록 카디널스 팬들이 하나둘씩 타더니 야구장이 위치한 역에 이르렀을 때는 전철 안이 카디널스 팬으로 가득 들어찼다. 경기가 치러진 날은 평일 화요일인 데다가 날씨도 쌀쌀했기 때문에 휑한 분위기면 어쩌나 걱정했지만 기우에 불과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성적이 좋거나 나쁘거나, 변함없는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카디널스 사랑을 내가 너무 과소평가했다. 카디널스는 2015년까지 11년 넘도록 홈경기 관중 3백만명 이상을 동원해온 구단으로, 카디널스 외에 이러한 업적을 달성한 구단은 양키스와 에인절스 둘뿐이다. 두 팀이 연고로 하고 있는 뉴욕과 LA에 비해 훨씬 적은 세인트루이스 인구를 고려하면 카디널스 팬들의 팀 사랑이 얼마나 대단한지 알 수 있다.
야구장 앞에 늘어선 사람들의 행렬을 보면서 거의 모든 팬들이 붉은 카디널스 유니폼이나 티셔츠를 입고 있는 모습에 놀랐다. 서른 개 메이저리그 구장 중 홈팀 상의 착용률이 가장 높았던 곳은 단연코 부시 스타디움이었다. 경기가 끝나고 빨간 옷을 입은 이들이 길가로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모습은 흡사 불개미 떼와도 같았다. 또한 그 많은 사람들 중 다수가 그 위에 카디널스 점퍼까지 입고 있는 모습에 한 번 더 놀랐다. 날씨가 따뜻한 여름날 상대적으로 값싼 반팔 티셔츠를 사 입는 일이야 쉽지만, 쌀쌀한 날에 대비해서 100달러가 족히 넘는 구단 점퍼까지 사 입기는 어렵다. 카디널스가 최근 가을야구를 밥 먹듯이 하는 탓에 점퍼 입을 일이 많아 그런 것일 수도 있겠지만, 웬만큼 각별한 애정 없는 팬이라면 선뜻 지갑을 꺼내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그 정도 애정쯤은 기본으로 탑재한 야구 팬들이 널린 도시가 바로 세인트루이스였다.
카디널스가 이렇게 충성도 높은 팬층을 두텁게 보유할 수 있었던 것은 무엇보다 꾸준히 좋은 성적을 내왔기 때문일 것이다. 130년 넘는 역사를 자랑하는 세인트루이스는 양키스 다음으로 많은 열한 개의 우승 트로피를 들어올렸다. 야구장에 입장하기에 앞서 경기장 앞에서 이러한 카디널스의 영광스러운 역사를 이끈 주역들의 모습을 동상으로 만나볼 수 있었다. 카디널스의 영웅 스탠 뮤지얼의 호쾌한 타격 자세부터 역대 최고의 수비력을 가진 유격수 아지 스미스의 다이빙 캐치까지, 다른 구장에서 봐온 동상들과는 달리 하나같이 역동적인 모습의 동상이 인상적이었다. 그 중 으뜸은 다이내믹한 투구의 찰나를 담아낸 세인트루이스 최고의 에이스 밥 깁슨의 동상이었다.
스위트 박스 부럽지 않은 레드버드 클럽
경기장에 입장하여 붉은 인파를 헤치고 내 티켓에 적힌 좌석 번호를 찾아 위층으로 향했다. 에스컬레이터에 오르려는데 구장 안내원 할머니가 티켓 확인을 하자고 했다. 대부분의 야구장에서는 비싼 1층 좌석에 한해 자리에 앉기 직전 티켓 확인을 하는 것이 보통이기 때문에 유난스럽게도 표 검사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에스컬레이터를 내려 ‘레드버드 클럽(Redbird Club)’이라는 간판이 붙어 있는 실내 홀로 들어서자, 이내 표 검사를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구나라는 생각으로 바뀌었다. 레드버드 클럽 안의 모습은 마치 내가 값비싼 스위트 박스 티켓을 구입한 것만 같은 착각을 들게 했다. 실내 벽은 고풍스러운 옛날 야구카드 모양의 그림들로 장식되어 있었고, 패스트푸드만 파는 컨세션 코너 외에도 고급스러운 출장 부페 느낌의 케이터링 코너가 따로 준비되어 있었다. 카디널스 경기 외에도 실시간으로 펼쳐지는 전국의 다양한 경기를 생중계로 시청할 수 있는 안락한 소파 공간도 마련되어 있었다. 날씨가 너무 춥거나 더운 날에는 관중들이 자리에서 벗어나 홀 안에서 유리창 너머로 경기를 관람할 수도 있었다. 실제 경기를 관전하는 좌석은 3층석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쿠션이 빵빵하게 들어간 고급 시트 재질이었다. 레드버드 클럽은 홈플레이트 뒤쪽과 가까운 내야의 3층석 티켓을 구입한 관중들만 입장할 수 있는 공간으로 보급형 스위트 박스 수준의 분위기를 자랑하고 있었다. 티켓 가격이 50달러 정도 되었으니 결코 싼 것은 아니었지만, 수백 달러를 상회하는 스위트 박스가 부럽지 않은 다양한 혜택을 누릴 수 있는 공간이었다.
레드버드 클럽 좌석의 또 한 가지 장점은 세인트루이스의 명물 중 하나인 ‘게이트웨이 아치(Gateway Arch)’가 가장 잘 보이는 좌석이라는 점이다. 홈플레이트 뒤쪽 자리를 예매했던 이유도 이 아치를 잘 보기 위해서였다. 세인트루이스는 19세기 미국의 서부 개척시대에 서부로 통하는 관문 역할을 했던 도시로서, 이를 기념하기 위해 세워진 초대형 아치는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중계방송을 통해 익히 야구장 너머로 보이는 모습을 봤었지만, 높이가 무려 200미터 가까이 되는 아치의 모습을 실제로 보니 그 웅장함이 대단했다. 부시 스타디움을 찾은 관중들이라면 누구나 이 아치가 잘 나오게 야구장의 전경을 담고 싶어할 것 같았다. 한편 카디널스 홈경기가 있는 주말이면 아치가 자리한 기념 공원 잔디밭에서 빨간 유니폼을 입고 캐치볼을 하거나 프리즈비를 하면서 경기를 기다리는 팬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기회가 된다면 카디널스 티셔츠를 하나 사 입고 그들 무리에 슬쩍 껴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다.
가장 아름다운 카디널스 유니폼
자리도 안락한 곳임을 확인했겠다 경기 중간에 짬을 내서 부시 스타디움 안을 둘러봤다. 1층의 팀 스토어 앞을 지나는데 ‘이 달의 뱃지(Pin of the Month)’를 홍보하는 간판이 보였다. 카디널스 로고와 마스코트를 활용하여 월별 테마에 따라 뱃지 디자인을 하나하나 다르게 한 모습에서 정성과 세심함이 느껴졌다. 내가 만약 카디널스 어린이 팬이었다면 이번 달이 아니고서는 구할 수 없는 이 뱃지를 그냥 지나치지 않았을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내가 어렸을 적만 해도 응원하는 한국 프로야구 팀 뱃지를 가방이나 필통에 달고 다니는 경우가 많았는데, 요즘 한국의 팀 스토어에서는 뱃지를 찾아보기 힘든 것 같다. 성인이 된 나의 눈에 잘 띄지 않은 것인지도 모르겠지만, 이런 작은 상품 하나하나에서 어린이 팬들이 구단과 연결 고리를 맺게 되는 것일텐데 뱃지 상품이 한국에서 자취를 감췄다면 많이 아쉬울 것이다.
팀 스토어 내부로 들어가 보니 셀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종류의 상품들이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특히 티셔츠와 모자는 수십 가지 다른 버전의 디자인으로 판매되고 있었는데, 이 정도로 상품 구색이 다양하면 재고관리 비용만도 만만치 않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카디널스 팀 스토어에서 봤던 상품들의 디자인 완성도 또한 매우 높아서 충동구매 욕구를 가장 억제하기 힘들었던 팀 스토어로 기억한다.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홈팀 상의 착용률이 높은 데에는 높은 관중들의 충성심도 있겠지만 빼어난 디자인 수준도 단단히 한 몫 하고 있을 것이다. 실제로 ESPN에서 메이저리그 최고의 유니폼으로 3년 연속 카디널스의 유니폼을 선정할 만큼 그만의 스타일과 훌륭한 디자인은 널리 알려져 있다. 예전에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가장 멋진 유니폼을 가진 팀으로 세인트루이스를 지목했던 인터뷰 영상을 봤던 기억도 난다.
카디널스의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멋스러운 디자인의 화룡점정은 야구 배트 위해 홍관조 두 마리가 앉아 있는 모양의 ‘Birds on the Bat’ 로고이다. 개인적으로 카디널스의 로고가 종목을 막론하고 전세계 프로스포츠 역사를 통틀어 심미적 가치가 가장 뛰어난 심벌이 아닐까 생각한다. 카디널스 로고의 유래는 1921년 겨울로 거슬러 올라간다. 훗날 메이저리그 최초의 흑인 선수 재키 로빈슨을 브루클린 다저스로 영입한 단장으로 유명해진 브랜치 리키는 당시 카디널스의 감독 겸 단장을 맡고 있었는데, 어느 날 세인트루이스 근교 교회 행사에 참석하게 되었다. 당시 그 교회를 다니던 앨리 메이 슈미트라는 여인이 행사에 사용될 테이블 장식을 담당하게 되었고, 우연치 않게 라일락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빨간 새 두 마리를 보고 그 모습을 본따 테이블 장식을 꾸몄다. 리키는 이 장식에 영감을 받아 당시 디자이너로 일하던 슈미트 여인의 아버지에게 팀의 로고 디자인를 의뢰했고, 이듬해부터 카디널스 선수들은 방망이 위에 홍관조 두 마리가 앉아 있는 그림이 그려진 유니폼을 입게 되었다고 한다. 100년 가까운 세월이 지나면서 배트 색깔이나 새의 모양은 조금씩 바뀌었지만, 기본 디자인은 변함없이 유지되어 온 이 아름다운 로고는 이제 카디널스 야구단의 상징을 넘어 세인트루이스 도시의 상징과도 같은 존재가 되었다.
한편 팀 스토어 바깥 한 켠에서는 떨이 판매 행사가 한창이었다. 세인트루이스가 전 해인 2013년 월드시리즈에 진출하면서 제작했던 기념 티셔츠, 스웨터, 점퍼들이 50퍼센트 할인된 가격에 처분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해 시즌이 끝나고 트레이드되어 팀을 떠난 데이빗 프리즈의 유니폼도 이 참에 반값에 판매 중이었다. 얼핏 보기에 이미 인기 있는 사이즈의 옷들은 모두 팔리고 초대형 사이즈의 옷들만 남은 것 같아 보였지만, 유니폼이라면 결코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는 카디널스 팬들이 매의 눈을 켜고 분주한 손놀림으로 물건을 고르고 있었다.
야구장 밖의 또다른 스포츠 문화 공간, 볼파크 빌리지
외야석 뒤편의 플라자까지 가 보니 야구 팬들이 좋아할 만한 수집품들을 팔고 있는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카디널스가 유서 깊은 구단이다 보니 다른 구장보다 수집품점을 찾는 팬들도 많고 흥미로운 물건들도 많이 보였다. 선수들의 친필 싸인이 담긴 사진, 배트, 공 등의 기본 아이템부터 타격 훈련 시 선수들이 사용했던 헬멧과 올 시즌 주요 경기에서 사용된 베이스까지 수집품으로서의 의미를 담을 수 있는 모든 물건들을 팔고 있었다. 그 중 가장 눈에 띈 것은 2011년 포스트시즌 시리즈에서 승리한 뒤 선수단이 축하 파티에서 사용한 샴페인 빈 병과 코르크 마개였다. 팔다 팔다 별의별 것들을 다 팔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별의별 것들을 다 모으는 팬심에 놀랐다. 샴페인 빈 병은 75달러에, 코르크 마개는 무려 15달러에 판매 중이었는데, 카디널스 팬들의 야구 사랑을 생각하면 금방 팔릴 것 같았다. 개인적 소장 가치도 크겠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 가치가 더욱 높아질 테니 이만한 재테크 수단도 없지 않을까 싶다.
외야 플라자에서는 야구장 출입 게이트 밖으로 길 건너편에 늘어선 건물들이 보였다. 내가 앉았던 좌석에서 멀리서 봤을 때는 경기장의 일부로 보였던 이 건물들은 ‘볼파크 빌리지(Ballpark Village)’라고 불리는 복합 스포츠 문화 공간이었다. 2006년 새로운 부시 스타디움이 문을 열면서 인근 다운타운의 경제, 문화 활성화를 위해 볼파크 빌리지 프로젝트가 계획되었고, 그 첫번째 결과물이 2014년 처음 그 모습을 드러냈다. 현재 볼파크 빌리지는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박물관과 경기장 밖 건물 옥상에서 경기장 안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루프탑, 그리고 초대형 스크린을 구비한 스포츠 바, 고급 레스토랑, 라이브 공연장 등 다양한 문화 시설을 갖추고 있다. 경기 시작에 앞서 미리 흥을 돋우고 경기가 끝난 후에는 여흥을 즐기며 뒤풀이 하기에 안성맞춤인 공간인 셈이다. 야구장이나 미식축구장과 같은 미국의 야외 경기장은 대부분 주변에 이러한 시설이 잘 발달되어 있다. 팬들이 경기장에 와서 즐기는 것이 경기에 한정되지 않고 사전 분위기 조성(pre-game activation)과 사후 즐길거리 제공(post-game entertainment) 단계까지 다양하게 즐길 수 있게끔 구단이 적극적으로 관리하는 모습이었다. 이를 통해 구단은 ‘경기장 방문’이라는 경험의 양적 극대화와 질적 차별화를 달성하고, 팬들이 머무르는 시간 동안 다양한 소비 활동을 유도하는 장치를 곳곳에 배치하여 직간접적인 매출을 발생시키는 것이다. 물론 그 나름대로의 재미가 쏠쏠하지만, 경기가 끝나면 바닥에 돗자리 깔고 앉아서 소주 한 잔 기울이는 것이 전부인 한국 야구 산업이 배울만한 점이 많아 보였다.
여담으로 한 가지 덧붙이자면, 부시 스타디움에 가기 전 세인트루이스 출신 지인이 세인트루이스에서 1930년부터 영업을 해온 ‘테드 드류스(Ted Drewes)’라는 아이스크림 가게를 꼭 들러보라고 했다. 때마침 2014년 문을 연 볼파크 빌리지에서는 이 전통의 아이스크림을 판매하고 있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날이 너무 쌀쌀해서 미처 가게를 찾아볼 겨를이 없었지만, 여름에 부시 스타디움을 가게 된다면 꼭 한 번 테드 드류스 아이스크림을 먹어볼 것을 권하고 싶다.
경기장 일주를 마치고 자리로 돌아와보니 생각보다 이닝이 많이 흘러가 있지 않았다. 경기를 쭉 보다 보니 경기 속도가 느린 원인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바로 세인트루이스의 포수 야디어 몰리나였다. 몰리나는 투수가 조금이라도 난조의 기미를 보인다 싶으면 마운드로 올라갔다. 툭하면 마운드에 올라가니 경기가 빨리 진행될래야 될 수가 없었다. 카디널스 경기를 중계방송으로 보면서 얼핏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지만 실제로 보니 경기가 지체되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카디널스의 에이스 애덤 웨인라이트와 컵스의 강속구 투수 제이크 아리에타의 대결로 시작된 경기는 몰리나가 속도를 지배하더니 급기야 연장에 접어들었고 12회말에 가서야 카디널스 신인 선수의 끝내기 몸에 맞는 공으로 카디널스의 승리로 끝났다. 쌀쌀한 날씨 속에서 네 시간 반 동안 경기를 봐온 관중 입장에서는 끝내기 볼넷도 아니라 끝내기 몸 맞는 공이라니, 무척이나 싱거울 따름이었다.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박물관
세인트루이스에서는 두 경기를 볼 예정이었기 때문에 첫째 날 경기의 아쉬움을 둘째 날 경기로 달래려고 했다. 그러나 첫날부터 우중충했던 하늘은 급기야 다음날 아침부터 비를 뿌리기 시작했다. 자칫하면 경기가 우천 연기가 될 수도 있겠다는 각오를 하고, 전날 봐두었던 볼파크 빌리지 내의 카디널스 명예의 전당 박물관을 관람하면서 경기가 시작되기를 기다리기로 했다. 박물관 입구에는 구단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인물의 동판들이 벽에 나란히 걸려 있었다. 부시 스타디움 앞에 동상으로 세워져 있던 선수들의 이름들이 많이 보였고 요즘 메이저리그 팬들에게도 익숙한 토니 라루사 전 감독의 얼굴도 눈에 띄었다. 카디널스는 2014년부터 헌액자 선정에 팬 투표 방식을 도입했다고 한다. 야구 전문가로 구성된 위원회가 카디널스에서 최소 3년 이상 뛰었고 은퇴한 지 3년 이상된 선수들 중에서 후보자를 추려내면 온라인 팬 투표를 통해 가장 많은 표를 얻은 두 명의 선수가 헌액되는 방식이다. 이렇게 선정된 2014년 헌액자 중에는 중견수 수비가 일품이었던 짐 에드먼즈도 포함되어 있다.
세인트루이스의 지독한 야구 사랑에 대한 영상물로 시작된 전시 공간은 카디널스 구단의 화려한 역사를 시간 순서로 꼼꼼하게 살펴볼 수 있게 꾸며져 있었다. 과거에 발간된 신문 기사 스크랩과 선수들이 사용했던 야구 장비들을 구경하면서 구단이 걸어온 길과 당시에 활약했던 레전드 선수에 대해 자연스럽게 공부가 되었다. 더불어 카디널스 로고의 변천사라든지 오래된 야구 관련 인쇄 광고물 등 흥미로운 전시 내용도 많아 지루하지 않게 둘러볼 수 있었다. 또한 박물관은 비단 카디널스 관련 내용만 다루는 데에 그치지 않고, 세인트루이스를 연고로 했던 또 다른 야구단인 브라운스의 역사를 포함하여 세인트루이스 전반에 걸친 야구 유산까지 담아내려는 노력을 기울이고 있었다.
박물관에서 팬들이 가장 오랫동안 발걸음을 멈추고 전시물을 유심히 지켜본 곳은 스탠 뮤지얼 관련 전시 공간이었다. 세인트루이스 야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인 스탠 뮤지얼은 22년 동안 오직 카디널스 소속으로만 뛰면서 3,630개의 안타를 쓸어 담은 당대 최고의 선수였다. 1940년대와 1950년대에 걸쳐 아메리칸리그에서는 마지막 4할타자 테드 윌리엄스가 주름을 잡았다면 내셔널리그 최고의 선수는 뮤지얼이었다. 1963년 그가 은퇴할 당시에 이미 10여개의 메이저리그 기록과 20여개의 내셔널리그 기록을 보유하고 있었다니 그 업적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 대단한 뮤지얼이 직접 사용한 배트, 그가 받은 다양한 트로피들과 선수 시절 촬영했던 사진들이 화려하게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한 할아버지 관람객이 손자로 보이는 젊은이에게 뮤지얼과 관련된 전시물을 하나하나 설명해주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미국에서 야구장이나 야구 박물관을 갈 때면 이러한 훈훈한 장면이 자주 보인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자기가 직접 눈으로 봤던 선수들에 대해 직접 이야기를 들려주고 아들과 손자는 재미있는 옛날 이야기를 들으면서 팀의 역사를 알아가는 모습은 언제봐도 흐뭇하기만 하다. 메이저리그가 세대를 아울러 폭넓은 사랑받고 있는 이유는 리그와 구단 차원에서 모든 세대가 함께 즐길 수 있는 이러한 콘텐츠를 적극적으로 개발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 하나의 하이라이트는 세인트루이스가 들어올린 열한 개의 월드시리즈 트로피들을 진열해놓은 공간이었다. 카디널스가 우승를 차지한 연도별로 우승 트로피와 우승 반지 그리고 당시에 뛰었던 선수의 유니폼이 그 해 성적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전시되어 있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끈 것은 2011년 트로피와 함께 전시되어 있던 반쪽 짜리 찢어진 유니폼이었다. 당시 텍사스 레인저스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은 카디널스는 시리즈 전적 2승 3패로 뒤진 6차전에서 우승을 내줄 뻔한 절체절명의 위기를 딛고 연장전에 터진 데이빗 프리즈의 극적인 끝내기 홈런으로 승리를 거둔 후 그 기세를 몰아 7차전까지 승리하며 우승을 거뒀다. 6차전에서 홈런을 터뜨린 프리즈는 홈에 들어와 동료들의 과격한 축하를 받는 과정에서 유니폼 상의가 찢어지고 말았는데 그 중 반쪽이 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것이었다. 나머지 반쪽은 쿠퍼스타운에 위치한 미국 야구 명예의 전당에 보관 중이다. 참고로 박물관에는 구단의 역사적 순간들이 담긴 중계 방송 화면에 자기가 캐스터가 되어 목소리를 입힐 수 있는 부스가 있는데, 월드시리즈 역사상 최고의 명승부로 꼽히는 2011년 6차전의 끝내기 홈런도 있으니 재미삼아 한 번 녹음해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메이저리그 야구장에 가면 미국인 특유의 넉살을 부리며 처음 본 사람들끼리 금세 친해져서 경기가 끝날 때까지 수다를 떠는 경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야구 박물관이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박물관 초반부에 카디널스 모자와 점퍼까지 갖춰 입은 한 아저씨 팬이 안내원 아주머니에게 전시물에 대해 질문을 하는가 싶더니, 나중에는 아예 두 분이 함께 다니면서 ‘밥 깁슨이 월드시리즈에서 정말 대단했다’, ‘그 때 그 홈스틸은 상상도 못했다’라며 서로가 가진 야구 기억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야기가 몇십 분이 지나도 끝이 날 줄 모르길래 슬쩍 엿들어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자기 아들, 친구, 사촌 이야기까지 꺼내서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 오지랖 넓은 팬들이 많은 미국 야구장에 가면 이런 구경을 하는 것도 또 하나의 소소한 재밋거리이다.
아쉽게도 오후가 되자 빗줄기는 더욱 굵어졌고 결국 경기는 취소되고 말았다. 이미 티켓을 구입한 팬들은 8월에 치러질 더블헤더 경기에 입장할 수 있다고 안내 받았지만, 내가 다시 올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인터넷 티켓 거래 사이트에 올려 싼값에 팔아버렸다. 비록 날씨가 안 좋고 경기까지 취소되는 탓에 안락한 환경에서 야구를 즐길 수는 없었지만, 세인트루이스가 왜 미국 최고의 베이스볼 타운으로 불리는지 충분히 그 진가를 알 수 있었던 이틀이었다. 아무리 궂은 날씨라도 카디널스 구단의 전통과 세인트루이스 팬들의 열기가 만들어 내는 고유의 매력까지 감출 수는 없었다. 세인트루이스는 다시 메이저리그 야구장 투어를 한다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도시가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