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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KYD Jun 26. 2016

바다를 품에 안은 야구장, AT&T 파크

AT&T Park, San Francisco, CA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한국 야구팬들에게 박찬호 선수와 류현진 선수를 괴롭혀온, LA 다저스의 지구 라이벌 팀으로 잘 알려져 있다. 1800년대에 뉴욕을 연고지로 창단한 다저스와 자이언츠 두 팀은 실제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오래된 라이벌이다. 자이언츠는 맨하탄섬 북쪽 끝에, 다저스는 브루클린에 자리 잡았던 당시에는 자이언츠의 성적이 좀 더 좋았고 인기도 더 많았다. 1958년 두 팀은 함께 리그 최초로 미대륙 서부로 연고지를 이전했고 그 이후로는 다저스의 성적과 흥행이 조금 더 성공적이었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자이언츠가 5년 동안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 세 개를 들어 올리며 다시 한 번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으며, 다저스는 이에 질세라 역대급 돈 보따리를 풀어가며 대응하고 있는 형국이다. 메이저리그의 라이벌이라고 하면 흔히들 뉴욕 양키스와 보스턴 레드삭스를 떠올리지만, 2004년 레드삭스가 밤비노의 저주를 풀기 전만 해도 86년 동안 양키스가 일방적인 우위를 점했었다. 이에 반해 서부의 맹주 자리를 놓고 엎치락뒤지락하며 벌이는 자이언츠와 다저스야말로 메이저리그의 진정한 라이벌이라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이런 팽팽한 라이벌 관계는 간혹 비극적인 결과를 낳기도 한다. 벌써 3년 전 이야기이긴 하지만, 2013년 시즌이 끝날 무렵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내가 도착하기 바로 전날 밤 자이언츠의 홈구장인 AT&T 파크 부근에서 끔찍한 사고가 벌어졌다. 자이언츠와 다저스의 경기가 있던 그 날, 경기가 끝나고 야구장 근처 클럽에서 나오던 한 다저스 원정 팬이 자이언츠 팬과 시비가 붙었다가 흉기에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난 것이다. 나중에 숨을 거둔 다저스 팬이 다저 스타디움에서 안전요원으로 일하는 직원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더욱 충격으로 다가왔다. 2011년 시즌 개막전이 있던 날 다저 스타디움의 주차장에서 한 자이언츠 팬이 폭행을 당해 뇌손상을 입는 사건이 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터져버린 끔찍한 일이었다. 한국인들 가운데는 아무래도 다저스 팬이 많아 AT&T 파크에 다저스 원정 경기를 관전하러 가는 팬들이 꽤 있겠지만, 너무 과격한 응원은 삼가는 것이 좋겠다. 물론 이는 샌프란시스코에만 해당되는 이야기는 결코 아니다. 사실 꼭 야구장이 아니더라도 타지 여행 중에 취객과 시비를 붙는 것은 항상 위험하니, 샌프란시스코와 AT&T 파크에 대한 오해는 없기를 바란다.



윌리 메이스 플라자와 맥코비 코브


AT&T 파크는 메이저리그 구장 중 유일하게 바다에 접해 있는 야구장이다. 시내 어디에서든 경전철을 타면 경기장에 더 빨리 도착할 수 있지만 해안도로를 따라 걷고 싶어서 일부러 조금 돌아갔다. 샌프란시스코와 오클랜드를 잇는 베이 브릿지(Bay Bridge)를 지나 조금 더 걸어가니 야자수 사이로 붉은색 벽돌로 지어진 복고풍의 야구장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AT&T 파크 옆으로는 쭉 부둣가가 이어지고 있기 때문인지 야구장 모퉁이에는 부두 건물 모양의 시계탑이 세워져 있었다. 이미 시계탑 주변에 사람들이 운집한 것을 보고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 날 경기가 시작되기에 앞서 그라운드에서는 전날 사고의 희생자를 애도하는 시간을 가지긴 했지만, 경기장 밖에서 특별히 뒤숭숭한 느낌은 찾을 수 없었다.


윌리 메이스 플라자 앞에 모인 자이언츠 팬들

홈플레이트 쪽 게이트 앞에는 ‘윌리 메이스 플라자(Willie Mays Plaza)’라는 자그만한 광장이 있다. 경기를 보러 온 관중들이 만남의 광장으로 사용하는 공간이라 갓 만난 듯한 일행 여럿이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광장에 심어진 야자수에는 올 시즌 자이언츠 홈경기를 보러 온 3백만명의 팬들에게 감사의 메세지를 전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었다. 자이언츠는 2000년 AT&T 파크를 개장한 이래로 두 해를 제외하고는 모두 3백만명 이상의 홈 관중을 달성했을 정도로 충성도 높은 팬을 보유한 구단이다. 특히 2010년 월드시리즈 우승 이래로 5년 연속으로 99%가 넘는 관중석 점유율을 기록하고 있다. 이 날 경기는 비록 자이언츠의 포스트시즌 탈락이 확정된 이후에 치러진 경기였지만 라이벌 다저스와의 경기를 보러 평일 저녁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경기장을 찾았다. 광장 한 쪽에서는 길거리 악사가 색소폰으로 “Take me out to the ballgame”을 연주하며 흥을 돋우었다.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다른 팀들의 구장이 그러하듯 AT&T 파크 주위에는 자이언츠의 전설적 선수들의 모습이 동상으로 세워져 있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까지 그 역사를 거슬러 올라가면 자이언츠는 메이저리그에서 명예의 전당에 헌액된 선수를 가장 많이 배출한 구단이다. 그 중에서도 샌프란시스코에 둥지를 튼 이후 1960년대를 주름 잡았던 윌리 메이스, 후안 마리샬, 윌리 맥코비 그리고 올랜도 세페다까지 엄선된 네 명의 선수들의 모습을 AT&T 파크에서 만날 수 있었다.


본인의 이름을 딴 광장 가운데에 본인의 동상이 세워져 있는 윌리 메이스는 자이언츠의 얼굴과도 같은 선수이다. 널리 알려진 대기록이 없어 다른 전설들에 비해 덜 유명한 감이 없지 않지만 절대 과소평가할 수 없는 선수이다. 요즘 선수의 가치를 평가할 때 자주 사용되는 대체선수 대비 기여승수(WAR; Wins Above Replacement) 지표에서 메이스는 베이브 루스와 배리 본즈에 이어 역대 야수 3위에 오를 정도로 대단한 선수였다. 역대 통산 홈런 4위와 12회 골드글러브 수상의 기록도 눈부시지만, 데뷔 후 세번째 시즌에 올스타로 처음 뽑힌 이후 은퇴할 때까지 20년 동안 계속해서 올스타로 선정되었다는 사실은 그가 얼마나 팬들로부터 사랑받는 선수였는지를 말해준다.


윌리 맥코비의 동상과 그 뒤로 보이는 맥코비 코브와 AT&T 파크. 우측 뒤편으로 베이 브릿지의 모습까지 보인다.

네 개의 동상 중 경기장에서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윌리 맥코비 동상은 경기장에서 3번가를 따라 ‘레프티 오둘 브릿지(Lefty O’Doul Bridge)’를 건너가야 볼 수 있었다. 윌리 맥코비는 메이스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를 대표하는 강타자이다. 특히 그는 과거 OB 베어스의 ‘학다리’ 1루수 신경식 선수처럼 큰 키로 넓은 수비범위를 자랑해서 ‘Stretch’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는 1루수로 유명했다. 맥코비의 동상과 AT&T 파크 사이에 있는 자그마한 만이 중계방송으로만 보던 그 유명한 ‘맥코비 코브(McCovey Cove)’이다. 경기장 우익수 방면 너머로 보이는 맥코비 코브의 시원한 바다 경치 때문에 AT&T 파크는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구장 중 하나로 꼽힌다. 방송화면에서처럼 이 날도 어김없이 만에 요트를 띄워놓고 바베큐를 구우며 맥주를 마시는 무리가 보였다.


맥코비 코브하면 절대 빼놓을 수 없는 것이 바다에 공이 풍덩 빠지게끔 날려버리는 장외홈런을 일컫는 ‘스플래쉬 히트(Splash Hit)’이다. AT&T 파크 개장 이래 2014년까지 총 105개의 스플래쉬 히트가 나왔는데, 그 중 자이언츠 선수가 때린 68개의 홈런은 우측 펜스 끝에 몇 개인지 따로 기록되어 있었다. 이 68개의 홈런 중 무려 35개가 배리 본즈 혼자 때려낸 것이다. 본즈가 뛸 때만 해도 경기가 있는 날이면 맥코비 코브가 그의 스플래쉬 히트 볼을 잡으려고 기다리는 사람들로, 정확히는 그들이 탄 카약들로 북적였었다. 하지만 이제는 스플래쉬 히트가 뜸하게 나오고 홈런볼의 가치도 본즈가 친 공보다 작다 보니 카약들도 많이 보이지 않았다. 참고로 한국 선수도 스플래쉬 히트를 날린 적이 한 번  있었으니 그 주인공은 플로리다 말린스 시절의 최희섭 선수이다.



볼거리 가득한 AT&T 파크의 외야


AT&T 파크 좌측 외야 관중석 뒤로 보이는 초대형 콜라병과 글러브 모형

AT&T 파크에 입장하여 경기장을 한 바퀴 둘러보니 외야 쪽에 볼거리들이 집중되어 있었다. 좌익수 방면 관중석 뒤로는 초대형 코카콜라 병 모형과 역시 초대형 글러브 모형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특히 코카콜라 모형은 내부에 미끄럼틀이 놓여 있어 이를 한 번 타보려는 어린이 팬들이 줄을 지어 서 있었다. 외야 우측으로 더 가보니 샌프란시스코의 상징인 케이블카 한 량이 놓여져 있고 몇몇 사람들은 맥주 한 잔씩 손에 들고 케이블카에 올라타서 경기를 즐기고 있었다. 중앙의 전광판 아래로는 무언가 시설 개보수를 하는지 천막이 쳐져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AT&T 파크는 2014년 시즌 후반기에 구장 내에 유기농 음식을 팔고 이 음식에 들어가는 채소와 과일을 직접 재배하는 정원을 개장했다. 당시 덮여져 있던 천막은 이를 준비하는 모습이었던 것이다. 정원은 경기가 없는 날에는 지역 내 어린이들의 건강한 식습관을 위한 교육현장으로도 이용된다고 하니 야구장이 지역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하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한편 당시 이 정원이 개장할 때 자이언츠 선수인 헌터 펜스가 홍보대사를 맡았는데, 펜스는 생긴 것과 다르게 탄수화물 섭취를 최소화하고 야채와 육류 중심의 식사를 하는 구석기 다이어트인 '팔레오 식이요법'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우익수 쪽 외야석 복도에서 경기장 밖을 내다보니 요트들이 정박해있는 맥코비 코브와 그로부터 쭉 이어진 샌프란시스코 만 위를 가로지르는 베이 브릿지의 모습이 펼쳐졌다. 야구장 1루 내야석 꼭대기층부터 시작되어 베이 브릿지 건너편까지 이어지는 이 경치는 낮이든 밤이든 AT&T 파크의 분위기를 사뭇 낭만적으로 만들어주는 것 같았다. 후에 구장 투어를 하면서 가이드로부터 들은 이야기에 따르면 AT&T 파크는 설계 초기만 하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방향으로 지어질 예정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어떤 이유에서이지 지금처럼 만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설계가 수정되었고, 이에 따라 홈플레이트에서부터 만과 접한 우측 담장까지의 거리가 너무 짧아지자 담장의 높이를 올리는 것으로 보완했다고 한다. 이렇게 높아진 우측 담장은 저녁이면 바다에서 경기장 쪽으로 불어오는 바람과 함께 AT&T 파크를 홈런 치기 대단히 어려운 구장으로 만들어 놓았다. 비록 홈런이 많이 터지지는 않지만 대신 그로 인해 바다가 보이는 시원한 경치와 스플래쉬 히트라는 진귀한 볼거리가 생겼으니 오히려 잘 된 셈이다.


메이저리그 구장을 구경하다 보면 외야 관중석 뒷공간을 참 잘 활용하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특히 AT&T 파크처럼 복고풍 양식으로 지어진 경우는 외야 공간을 넓은 광장 형태로 조성하여 팬들에게 다양한 볼거리와 즐길거리를 제공한다. 어떻게 보면 아주 작은 테마파크를 꾸며 놓은 것 같기도 하다. 미국에서 야구장을 칭할 때 ‘Stadium’이라는 단어보다 ‘Ballpark’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많은데, 실제로 현장을 가보면 Stadium이라고만 하기에는 아까운 그 이상의 Ballpark 같은 무언가를 느낄 수 있다. 한국에 있는 인천의 SK행복드림구장(문학야구장)이나 광주의 KIA 챔피언스 필드도 외야 공간을 창의적으로 활용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앞으로 더 많은 야구장에서 더 다양한 외야 공간의 모습을 볼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중국인 관중도 즐기는 자이언츠 야구


AT&T 파크의 외야 공간에는 먹을거리도 다양했다. 샌프란시스코가 해산물로 유명한 도시라서 그런지 다른 야구장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간식이 많았고 그 중에서도 크랩 샌드위치를 먹으려고 늘어선 줄이 가장 길었다. 종업원이 분주하게 샌드위치를 만들고 있었는데 바삭하게 구운 빵에 게살과 토마토를 넉넉하게 얹은 모습이 보기만 해도 먹음직스러웠다. AT&T 파크의 또다른 베스트셀러는 갈릭 후라이이다. 샌프란시스코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길로이라는 마을은 매년 마늘 축제를 열 정도로 마늘로 유명한 곳인데 이 곳에서 생산한 마늘과 함께 살짝 볶아낸 감자튀김이 생각보다 맛이 괜찮았다. 매번 먹는 야구장의 기름진 음식에 지쳐 있다면 한 번쯤 먹어볼 만한 간식이다.

.크랩 샌드위치를 만드는 점원의 분주한 모습. 그러고 보니 점원 분도 Chinese American?


갈릭 후라이가 인기 있으니 마늘 좋아하는 한국인도 많겠다는 아주 일차원적인 생각이 들었지만 정작 야구장에는 중국계 관중이 많이 보였다. 요즘에는 미국 어디를 가도 중국인들 혹은 중국 출신 미국인들이 하도 많아서 여행하다보면 중국인으로 오해받는 경우가 허다하지만, 야구장에서만큼은 중국인들을 찾아볼 수 없다. 중국에서는 야구가 비인기 종목이기 때문에 야구장을 찾는 중국인들이 거의 없다. 미국에서 중국인이 보이지 않는 유일한 장소가 야구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유일하게 중국계 야구팬을 발견할 수 있는 곳이 있었으니 바로 AT&T 파크였다. 샌프란시스코는 역사적으로 중국인들의 미국 이민 역사가 시작된 곳으로 중국계 미국인들이 가장 많이 모여 사는 도시 중 하나이다. 2010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샌프란시스코 시에 거주하는 사람 중 무려 21.4%가 중국계라고 하니 그 수가 얼마나 많은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AT&T 파크도 야구장이기도 하지만 샌프란시스코 시민의 여가공간이기 때문에 중국인들의 영향권 밖에 있지 않았다. 버스터 포지 티셔츠를 입고 응원하는 중국계 야구팬의 모습을 보는 것은 다른 야구장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AT&T 파크에만 특별히 많은 또다른 것은 바람이다. 앞서 간단히 언급했지만 바다를 바라보는 방향으로 경기장이 지어졌기 때문에 저녁이 되면 쌀쌀한 바닷 바람이 경기장 안으로 불어온다. ‘윈디 시티’라는 별명을 가진 시카고의 바람도 유명하지만 AT&T 파크의 바람도 만만치 않았다. 따뜻한 캘리포니아 날씨를 기대하고 시원하게 입고 갔다가는 감기 걸리기 딱 좋은 날씨였다. 이를 잘 아는 현지 팬들은 하나같이 바람막이나 후드티를 입고 있었다.



복도를 따라 펼쳐진 자이언츠의 역사


경기장 위층 좌석의 복도를 따라 뉴욕 연고 시절부터 입었던 자이언츠의 유니폼이 전시되어 있었다. 뉴욕 자이언츠 시절부터 이어 온 구단의 전통과 역사를 보존하려는 노력이 엿보였다. 그런데 계속 유니폼을 보다 보니 배색이나 글씨체가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곰곰이 생각해보니 일본 프로야구의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유니폼과 상당히 닮아 있었다. 실제로 일본의 자이언츠는 미국의 자이언츠와 나름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20세기 초반 미국 야구계는 야구의 전세계적 보급을 위해 메이저리그의 주요 선수들을 앞세워 세계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친선경기를 가졌다. 일본도 그 대상국 중 하나였고, 1930년대 일본과의 교류전이 가속화되던 시기에 뉴욕 자이언츠의 외야수 레프티 오둘도 메이저리그 대표로 참가했다. 그는 당시 일본 대표팀이었던 ‘대일본 동경 야구 구락부’를 보고 당시 그의 소속팀인 뉴욕 자이언츠의 이름을 따서 ‘자이언츠’라는 별칭을 붙여주었다고 한다. 이것이 유래가 되어 그 팀은 ‘도쿄 교진군(巨人軍)’이라는 이름을 거쳐 오늘의 요미우리 자이언츠 구단이 된 것이다. 오둘은 그 이후로도 미국과 일본의 야구 교류에 힘쓰고 일본의 프로야구 확산에 큰 공을 세웠고, 2002년 도쿄 돔에 위치한 일본 야구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J.T. 스노우와 대런 베이커의 사진을 설명해주고 있는 구장 투어 가이드

복도 벽 위쪽에는 자이언츠 구단의 시즌 별 역사를 요약해놓은 사진들이 붙어 있었다. 그 중 눈길을 잡아끄는 것은 한 자이언츠 선수가 어린 아이의 멱살을 잡고 있는 사진이었다. 박찬호 선수가 활약하던 시절부터 메이저리그를 봐온 팬이라면 기억할 수 있는 이 사진의 주인공은 J.T. 스노우였다. 때는 2002년 월드시리즈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애너하임 에인절스(現 LA 에인절스)와 월드시리즈에서 맞붙은 자이언츠는 시리즈 5차전에서 케니 로프턴이 적시타를 날렸다. 3루주자였던 스노우는 재빨리 홈으로 들어오다가 갑자기 홈 주변에 나타난 꼬마를 발견했다. 당시 자이언츠 감독이었던 더스티 베이커의 세 살 난 늦둥이 아들이자 자이언츠의 배트보이였던 대런 베이커였다. 자기 딴에는 로프턴의 방망이를 치우려고 홈으로 달려든 것이었다. 뒤따르던 2루주자도 홈으로 쇄도하고 있던 터라 충돌을 막고자 홈에 다다른 스노우는 급한 마음에 대런 베이커의 멱살을 부여잡고 들어올려 홈에서 멀찌감치 옮겨놓았다. 재미있으면서도 아찔함과 훈훈함을 동시에 가져다 준 이 장면은 당시에 많은 화제가 되었고, 이후에 메이저리그에서 배트보이를 하기 위해서는 최소 14살은 되어야 한다는 규정이 생기기도 했다.


구장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또 하나 발견한 것은 구장 내의 안내 표지판들이 하나같이 일관적인 색깔과 글씨체를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야구장의 흙을 상징하는 갈색과 샌프란시스코의 바다를 뜻하는 파란색을 기본으로 하여 특유의 글씨체가 겨자색 바탕 위에 쓰여져 있었다. 야구장의 그물망과 펜스를 모티브로 한 듯한 디자인도 일관되게  적용되어 있었다. 까막눈인 내가 봐도 어지간한 국내 테마파크와 쇼핑몰의 표지판의 디자인을 뛰어 넘는 수준이었다.     

AT&T 파크의 일관적인 표지판 디자인



AT&T 파크에 얽힌 한국 선수들의 추억  


이 날 밤에 LA로 이동하는 버스를 타야했기 때문에 경기를 끝까지 보지 못하고 경기장에서 일찍 빠져 나왔다. 그래도 아쉬운 마음에 경기장 주변을 다시 한 바퀴 돌아보며 AT&T 파크의 밤 풍경을 기억 속에 담았다. 밤이 되자 맥코비 코브 쪽 게이트에는 어느새 스플래쉬 히트를 나타내는 네온사인이 켜져 있었다. 바다 위에는 여전히 한 무리의 사람들이 요트를 띄워놓고 한가로움을 즐기고 있었고, 경기 시작 전 윌리 메이스 플라자에서 색소폰 연주를 하던 그 길거리 악사는 분위기 있는 재즈 넘버를 연주 중이었다. 바다를 끼고 있어서 그런지 AT&T 파크 주변에서는 흡사 여름날 해변가나 유원지의 밤과 비슷한 정취가 느껴졌다.

윌리 메이스 동상을 배경으로 사진 찍는 자이언츠 팬


경기장 뒤로 맥코비 코브와 접해 있는 길에는 AT&T 파크에서 일어났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기념비적 사건들이 그림으로 동판에 새겨져 바닥에 전시되어 있었다. 이 곳에서 배리 본즈와 얽힌 낯익은 두 명의 한국 선수의 이름이 보였다. 2001년 본즈가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을 수립할 때 71호, 72호 홈런을 허용한 박찬호 선수와, 2006년 본즈가 베이브 루스를 넘어 역대 통산 홈런 2위로 올라서는 715호 홈런을 허용한 김병현 선수의 이름이었다. 박찬호 선수는 다저스 시절 성공적인 커리어를 보낸 만큼 많은 경기를 소화했기 때문에 이따금씩 다소 불명예스러운 피홈런의 현장에 있었던 적이 있다. 개인적으로 꼽는, 그리고 누구라도 고개를 끄덕일 만한 세 개의 명장면이 있는데 첫 번째는 1999년 세인트루이스 타자 페르난도 타티스에게 한 이닝에 만루홈런 두 개를 허용한, 그 유명한 ‘한만두’ 사건이다. 두 번째는 2001년 올스타전에서 그 해 커리어 마지막 올스타전에 나선 볼티모어의 철인 칼 립켄 주니어에게 초구 홈런을 허용한 장면이고, 나머지 하나가 본즈의 신기록 수립 홈런이다. 이와 관련해 나중에 구장 투어를 할 때 가이드가 AT&T 파크의 원정 팀 클럽하우스를 지나면서 한 가지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당시 72호 홈런을 허용한 뒤 클럽하우스로 들어온 박찬호 선수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클럽하우스 벽을 배트로 후려치는 바람에 벽 모서리가 파손되었다고 한다. 이를 수리하기 위해 벽 모서리에 금속판을 덧씌웠고 이것이 아직도 남아 있는데 자이언츠 직원들을 이를 ‘찬호박 플레이트(Chan-ho Park Plate)’라고 부른다고 한단다. 물론 가이드가 재미로 해준 이야기라 실제로 있었던 일인는지는 모를 일이다.

본즈의 단일 시즌 홈런 신기록 기념 동판. 잘 보면 오른쪽 글귀 세번째 줄 끝에 박찬호 선수 이름이 보인다.
원정 팀 클럽하우스에 붙어 있는 찬호박 플레이트


샌프란시스코 홈구장이기 때문에 기념 동판에는 자이언츠에게 영광스러운 사건만 기록되어 있지만, 박찬호 선수에게도 AT&T 파크와 얽힌 명예로운 기록이 있다. 2000년 4월 11일 자이언츠는 AT&T 파크의, 정확히는 당시 구장 명칭인 퍼시픽벨 파크(Pacific Bell Park)의 개장 경기를 가졌는데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 당시 새 구장의 개장 경기를 그르치고 퀄리티스타트를 기록하며 구장의 첫 승리투수가 된 선수가 바로 다저스의 에이스 박찬호 선수였다.


기념 동판 앞에는 티켓을 구입하지 않고도 무료로 우측 외야 펜스 뒤에서 경기를 볼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어 있었다. 철조망을 통해 경기를 봐야 해서 시야도 좁고 3이닝 단위로 퇴장해야 하는 규칙이 있긴 하지만, 적지 않은 사람들이 이 공간에서 경기를 보고 있었다. 자이언츠 경기가 평균 좌석점유율 99%를 넘을 정도로 워낙 인기가 많다보니 이렇게나마 경기를 보려는 팬들이 많은 모양이었다. 실제로 팀의 인기에 비해 상대적으로 좌석 수가 부족한 AT&T 파크는 입석 티켓도 잘 팔리는 몇 안되는 구장이다. AT&T 파크에 모처럼 들렀는데 좌석 티켓이 모두 매진되었더라도 좌절하지 말고 입석 티켓을 알아볼 것을 권한다. 단, 입석 티켓이라고 아주 염가는 아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짝수 해 왕조 야구 열기의 서막, 팬페스트


2013년 시즌 9월 마지막 주에 AT&T 파크에서 자이언츠 경기를 보고 나서 약 넉 달이 지난 후 샌프란시스코에 다시 한 번 들를 일이 있었다. 마침 AT&T 파크에서 2014년 시즌을 앞두고 ‘팬페스트(Fanfest)’가 열린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행사가 진행되는지 궁금했다. 원래 야구장 방문을 계획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하듯이 어김없이 야구장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팬페스트는 스프링캠프를 앞두고 각 구단마다 팬들을 초청하여 선수들과 어울릴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하고 다양한 이벤트를 제공하는 행사이다. 우리나라의 시즌 종료 후 팬 페스티벌을 개최하는 구단이 몇몇 있는데 비슷한 행사라고 볼 수 있겠다.


팬페스트가 시작되는 오전 10시에 맞춰 AT&T 파크에 도착했을 때 경기장 앞에 모인 수많은 인파를 보고 깜짝 놀랐다. 저마다 자이언츠 유니폼과 점퍼를 맞춰 입은 팬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고 입장을 기다리는 줄은 경기장에서 부둣가 길을 따라 1킬로미터는 족히 떨어진 곳까지 이어져 있었다. 줄 길이만 봐서는 월드시리즈 경기가 있는 날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았다. 아무리 입장료가 무료라고는 하지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더욱이 그 전 해 지구 공동 3위라는 실망스러운 성적을 남겼음에도 정규 시즌 개막이 두 달 남은 시점부터 자이언츠를 응원하기 위해 이렇게 많은 팬들이 모인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마치 그 해 자이언츠가 또다시 짝수 해의 기적을 연출하며 월드시리즈 우승을 거둘 것을 팬들이 예상하기라도 한 듯 했다.

펜페스트 당일 입장을 기다리는 자이언츠 팬들의 행렬


오랫동안 줄을 선 끝에 경기장에 입장하니 그라운드는 이미 팬들로 인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지역 방송국에서 나와 경기장 한 편에 부스를 차려놓고 주축 선수들과 인터뷰를 하고 있었고, 인터뷰를 마친 선수들은 한 쪽에서 팬들의 싸인 요청에 일일히 응해주었다. 이 날은 특별히 평소에 비싼 티켓을 구입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공간에 전시해두는 2010년과 2012년 월드시리즈 우승 트로피를 밖에 내놓아 모든 팬들이 구경할 수 있게 해두었다. 미국에서 야구는 보고 싶지만 사정 상 1월 말이나 2월 초 밖에 시간이 되지 않는 팬이 있다면 팬페스트에 한 번쯤 참가해보는 것을 추천하고 싶다. 야구 없이 겨우내 움츠렸던 몸과 마음에 기지개를 켜는 듯한 기분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비록 불미스러운 사고 소식을 접하면서 AT&T 파크에서의 경험을 시작하게 되었지만 모든 일정을 마치고 난 후에는 과연 명불허전이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도시로 손꼽히는 샌프란시스코에 자리한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아름다운 야구장 중 하나인 AT&T 파크는 그 명성이 결코 아깝지 않았다. 도시 속에 위치하면서도 바다를 품에 안고 있는 AT&T 파크는 도심 속의 휴양지와 같은 색다른 분위기를 느낄 수 있는 곳이었다. 미국 서부를 대표하는 라이벌 팀의 다저 스타디움과는 또 다른 캘리포니아 야구장만의 매력을 감상할 수 있는 곳이 바로 AT&T 파크이다. 더욱이 한국 야구팬들에게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는 메이저리그의 기억 속에서 빠질 수 없는 팀인 만큼, 멋진 경치 속에서 기억을 더듬어가며 추억을 되새길 수 있는 아름다운 공간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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