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 어딘가에 타투를 새기고 싶다는 생각은 대학교 졸업 즈음부터 품었지만 미뤄 온 이유는 한결 같았다. 그 당시의 내 미감을 당최 믿을 수가 없어서다. 내 눈엔 너무 예뻐 보여서 새겼는데 일 년만 지나도 당장 군색해 보일 수 있으니까. 그렇게 미감이 쑥쑥 자라나기만을 기대하다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왜 미감이란 게 마지노선 없이 높아질 거라고만 믿는 거지? 지금이 내 ‘보는 눈’의 피크일지도 모르잖아? 이런 오만한 생각 같으니.
받고 싶은 도안은 몇 년 전부터 얼추 생각해두었다. 펜을 쥐고 글 쓰는 손. 쉽게 보이는 위치면 빨리 질린다고들 하지만 그래도 팔뚝 안쪽에 남기고 싶었다. 무언갈 쓰는 시간 안에서 나는 명상에 가까운 평안과 만족을 얻으면서도, 한편으로 쓰는 행위를 언제까지고 미루고만 싶기 때문이다. 운 좋게도 쓰는 일을 수단으로 직장에 다니고 있기에 더욱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돈벌이를 위한 글쓰기를 차치하더라도 그렇다. 나는 이 행위를 몹시 사랑하고 또 두려워한다고 느낀다.
그래서 언제든 보이는 위치에 새겨두고 글쓰기를 생각하고 싶었다. 기쁘게 즐기고 있다면 기쁜 대로, 불안과 부담으로 저만치 밀어두고 있다면 또 불안한 대로. 문신처럼 내 몸과 마음에서 떼어낼 수 없는 존재로, 때때로 도망치려는 글쓰기를 어떻게든 곁에 두고픈 욕심이다.
삼 년 전쯤 누군가 내 블로그에 이런 댓글을 남겨주신 적이 있다. “새삼스레 이렇게 꾸준히 글을 쓰신다는 사실에 놀랍네요. 시간을 들여 블로그에 꾸준히 글을 쓴다는 것은 자신의 정신에 관심을 놓지 않고 기울인다는 것이고, 관심은 곧 사랑의 시작이라고 생각하기에 이 블로그를 보면 숑님의 생에 대한 긍정을 느낄 수 있는 것 같아요.”
14년째 매일 쓰는 일기도, 책을 읽고 남기는 나름의 감상도, 그저 스쳐가게 두기엔 아까운 일상의 지나침을 블로그에 기록하는 일도 결국 ‘생에 대한 긍정’이란 단어를 향하고 있었다. 나는 노래도 사람도 이야기도 생에 대한 긍정이 강한 것을 사랑하기에 이 댓글을 결코 잊을 수 없었다. 말하자면 오늘 팔에 새기고 온 타투는 앞으로의 삶도 원껏 사랑하고 싶은 마음이다.
끼니를 일일이 떠벌리지 않더라도 밥 먹는 삶이 당연한 것처럼, 어딘가에 대단한 글을 내놓지 않더라도 쉴새없이 무언갈 쓰고 있는 삶이면 좋겠다. 팔뚝을 내려다볼 적마다 '쓰는 삶'을 조금 더 자주 상기하게 된다면 '더 나은 글'을 쓰는 날도 늘어날까. 대단하지 않고 더 낫지 않은 글이어도 일단 써 내려가는 행위 자체를 몸에 새겨두고 싶다. 언제든 흘깃 시선을 내려 타투를 볼 때마다, 딱 그만큼의 빈도로.
2021. 5.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