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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채사장 Oct 30. 2021

가정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건,

K차녀 이야기


언니보다 겨우 한 살 더 어린 나는 장녀의 그늘막 아래 좀 더 자유로울 수 있었다. 가끔 K장녀의 특징이라며 인터넷에 올라온 글들을 보면 그들의 가정내 막대한 책임감과 살림 밑천으로 이용당하는 사실들이 이해는 갔지만 와닿지는 않았다. 그중 엄마의 통제는 가장 공감이 가지 않는 부분이다. 주변의 장녀들에게 어렸을 때부터 공부만 하길 강요받았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우리 엄마는 그 정도는 아니지'라며, 괜히 으쓱했었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웠었고, 좋아한 만큼 나름 잘했다. 초등학생 때 같이 태권도를 배웠던 여자 친구들은 중학교 올라가면서 점점 사라졌다. 집에서 운동할 시간에 공부하길 원했기 때문이다. 반면에 나는 당연하게 중학생 때도 태권도 학원에 다닐 수 있었다. 엄마는 내가 운동에 소질이 있어 공부보다는 태권도를 꾸준히 배우게 해줬다. 하지만 언니는 달랐다. 언니도 동네 여자애들처럼 중학교 올라가면서 태권도 학원을 그만두었다. 당연히 엄마의 의지였다. 언니에게 공부를 해야 한다며 운동을 못하게 했고, 언니는 뭐 그대로 따를 수밖에. '첫째가 시작을 잘 끊어야 밑에 애들이 잘 따라온다', '여자애가 무슨 운동이야'라는 사회 분위기에 엄마도 언니에게 그 역할을 부여했다. 공부를 잘하는 것이 성공의 필수라고 생각했던 엄마는 언니가 공부를 잘해야지 밑에 동생들도 첫째를 보고 따라 할 거라 여겼다. 




나는 재능이 있어서 좋아하는 걸 할 수 있었지만, 언니는 재능이 있었어도 좋아하는 걸 할 수 있었을까. 언니는 중학생 때 미술을 좋아했다. 학원 한 번 다니지 않고 방과 후 수업만으로 학교에서 미술대회 나가는 대표로 뽑힐 만큼 능력도 있었다. 하지만 고등학교를 정하는 시기부터 엄마는 언니가 공부하기를 원했고, 언니는 미술을 계속하고 싶었기에 그때 둘이 많이 싸웠다. 결국 엄마는 언니를 인문계 고등학교로 보냈다. 그 당시 내가 이미 운동을 하고 있었고, 둘 다 예체능을 시켜주기에는 돈이 많이 든다는 이유가 컸다. 언니는 장녀로서 공부를 잘해야 했고, 경제적인 부분까지 과도한 책임을 강제로 져야 했다. 중학생이 되면서 운동을 저지당했던 언니를 보고 내가 능력이 좋아서 운동을 할 수 있었다고 생각했다. 어쩌면 차녀로 태어나서 언니가 졌던 책임을 질 의무가 없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장녀에게 부여되는 큰 책임감 중 하나가 가정 내 중재자 역할이다. 차녀로 태어나서 가장 좋은 점을 뽑자면 중재자 역할을 할 사람이 따로 있다는 것이다. 밤에 모부가 싸우면 언니는 꼭 일어나서 그들을 말렸었다. 덕분에 나는 언니가 알아서 말릴 거라는 안도감에 눈을 계속 감고 있을 수 있었다. 한 번은 언니와 내가 방에서 자려고 누웠는데, 거실에서 엄마와 동생이 사소한 일로 싸우기 시작했다. 나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자려고 했으나 언니는 "말려야 해. 네가 좀 나가서 말려봐, 어?"라며 피곤함과 불안감이 섞여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저러다 말 거라며 무시하고 계속 잤다. 사소한 다툼은 결국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결국 "아씨, 왜 내가 아니면 아무도 안 말려. 개짜증나게"와 함께 이불을 확 걷고 쿵쾅거리며 거실로 나갔다. 나는 역시나 '언니가 알아서 하겠지' 마음에 천천히 걸어 나갔었다. 이 글을 장녀들이 본다면 싫어요가 가득할 듯하다. 




왜 언니는 항상 나서서 그들을 말렸는지, 중재자 역할을 자처했는지 그때는 몰랐다. 가족 일에 과도하게 신경 쓰고 스트레스 한계를 넘으면 나한테 푸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내가 가정 내에 여러 가지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유는 차녀이기 때문이다. 이미 언니가 막대한 책임을 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태어난 순서에 의하여 강제로 부여된 책임감임에도 지킬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어떤 조직에서 존재감이 없다고 느끼면 조직에 대한 애착 또한 없게 된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서는 내가 가족에 애정이 없는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가정에서 한 발자국 떨어질 수 있었던 건 언니의 책임감 덕분이기도 하지만, 그만큼 내가 존재감이 없었기 때문이다. 장녀의 존재감 아래에서 8년을 살다가 늦둥이 남동생이 태어나면서 그나마 있던 존재감도 싹 다 뺏겼다. 가정에서 당사자가 아닌 멀리 떨어져서 지켜보는 느낌이 항상 들었다. 가정에 애착이 가지 않는 건 당연한 일 아닐까. 




하지만 첫째인 언니는 가정 내에서 강한 존재감을 느꼈기에 가정에 대한 애착도 컸을 것 같다. 모부에 의해 강제로 부여된 책임감이었지만, 지키려고 노력할 수 있었던 이유가 아니었을까. 아마도 이래서 'K차녀'라는 말이 'K장녀' 단어의 존재감 발끝에도 닿지 못했나 보다. 가정 내의 존재감이 사회에도 영향을 미친 게 아닐까 추측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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