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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내향인 채사장 Nov 27. 2021

공감은 받아본 사람만 할 수 있을까

모닝페이지



「당신이 옳다」(정혜신, 2018) 책을 읽으면 당장 누구에게나 공감할 수 있을 것만 같다. “그랬구나, 당신이 그래서 힘들었구나”라는 말만 잘 하면 나름 공감 좀 하는 사람으로 보일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실전은 다르다. 자칫 책 읽듯이 저 대사를 읊을 수도 있음을 주의해야 한다. ‘책 읽듯이’라는 말은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는 말이고, 감정을 담지 못하는 것은 진실로 공감을 하는게 아니라는 뜻이다. 그러면 상대는 귀신같이 진심이 아님을 알아채고, 공감을 하지 못한 것과 매한가지인 상황이 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진실로 공감하지 못할까? 상대를 싫어해서 그럴까? 상대가 왜 슬퍼하는지, 힘들어하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 일까? 일단 상대를 싫어해서는 아닐 듯하다. 현재 내가 파트너에게 공감할 때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파트너가 힘들어서 눈물을 보일 때, 특히 그 이유가 나일 때, 진심으로 상대 입장에서 이해하고, 그 감정을 공감하지 못할 때가 많다. 상대가 힘들어하는 이유가 나라는 의미는 서로 서운한 것이 있는데 풀지 못했다는 뜻이다. 그런 상황에서 상대가 ‘너 때문에 너무 속상하고 힘들어. 죽고 싶어’라는 말을 한다면, ‘그렇구나, 당신이 지금 나 때문에 힘들구나. 속상하겠다’라고 할 수 있을까. 내가 부족한건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안되더라. 그런 순간에 들었던 생각은 ‘그래, 그냥 내가 병신이라서 당신이 힘든거였구나. 미-안하다.’라는 비아냥 뿐이었다. 나 스스로가 생각해도 왜 이딴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건지 한심하다. 상대의 부정적인 감정 원인이 나인 것을 알아도, 비록 나도 서운할지라도 그 순간의 상대 감정에 공감해주고 싶다. 하지만 현실에서는 한 번도 이루어진 적은 없다. 


나는 왜 비아냥 거렸을까? 상대가 ‘너 때문에’라는 말을 하는 순간, 화만 났다. 왜 화만 났지? 나도 감정이 풀리지 않은 상태였고, 상대에게 공감받고 싶기 때문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공감을 받고 싶은 마음이 컸다. 하지만 서로에게 자기가 원하는 만큼 공감을 해주지는 못한다. 왜 그럴까? 성장해온 환경이 모부에게서 충분한 공감을 받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추측해본다. 공감능력 형성에 중요한 시기인 어렸을 때, 우리는 각자 모부에게 감정을 표출하는 행위에 대한 안정감을 느껴본 적이 없다 즉, 모부가 우리의 감정을 받아주기는커녕 윽박질러서 아예 표현하지 못하게 하던가, 아무것도 아닌 취급을 해버렸다. 우리는 모부에게 공감을 받아본 적이 거의 없으니, ‘공감을 한다’라는 말이 마치 유니콘을 보는 것과 비슷한 감정이다. 가까운 사람에게서 공감을 받아본 적이 없는데, 어떻게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공감이라는 걸 할 수 잇을까. 


공감을 글로 익힐 수 있을까. 다른 지식들처럼 글을 보고 익힐 수 있다면 좋을텐데. 우리나라에서 공감을 충분히 받으며 성장한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공감을 받아보지 못한 우리는 어디서 배울 수 있을까. 가끔 상담을 받으면 상담선생님이 내 감정을 공감해주긴 한다. 그 순간에는 내가 공감을 받았구나는 생각이 들어서 기분이 좋지만, 하루만 지나도 까먹는다. 결국 가장 가까운 사람, 같이 사는 사람이거나 가족에게서 받는 공감만이 온전히 내가 받아졌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파트너와 나는 공감이 부족했던 과거를 서로에게서 찾는다. 가끔 각자의 공허함을 상대로부터 채우려고만 할 때, 괜시리 서글프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몇 년간 상대의 빈공간을 조금씩 채우는 법을 습득했고, 앞으로도 정혜신 작가님처럼은 아니어도 서로만의 방법으로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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