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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진 Apr 25. 2021

역시 사람은 이름대로 살게 되지는 않겠죠?

민정으로도 충분한 민정님에게.


 역시 사람은 이름대로 살게 되지는 않겠죠?

 어렸을 때는 내 이름에 딱히 아무런 불만이 없었습니다. '소시지' '소머리국밥'같은 별명이 붙기는 했지만 그런 별명쯤이야 어떤 이름이어도 붙게 마련이니까요. 오히려 '지영, 지은'처럼 흔하지 않은 제 이름이 좋았습니다. 어렸을 땐 동명이인을 만날 기회도 없었고, 소진이란 이름의 연예인도 없었거든요.


 그런데 대학생이 되자마자 내 이름을 의심하기 시작했어요. 우리 동아리는 여름 방학마다 도보여행을 다녔어요. 일학년 여름 방학 때였는데, 늘 싱거운 농담을 던지는 선배가 도보여행 내내 제 주변에서 "소진아, 힘이 소진되었다~"라는 말을 반복했죠. 처음엔 그 말에 웃었지만 걸음의 수가 늘어나고 발에 물집이 부풀어 오를수록 그 말이 듣기 싫어 짜증이 났습니다.

 

 그때부터였어요. 선천적으로 마른 몸에 친구들보다 부족한 체력이 '소진'이라는 이름 때문인 것 같았습니다.

그 후로도 종종 비슷한 농담을 들었습니다. 신입사원이던 시절, 우리 팀이 할당받은 전략 상품 재고가 쉽게 소진되지 않았었는지, 팀장님이 우스개 소리를 했어요. "소진아 재고 좀 소진해봐" 그때도 역시 속으로 욕했던 것 같습니다. 아직도 그 말을 기억하고 있는 걸 보니 역시 그래요.

 

 하지만 민정님도 알다시피 그렇다고 내가 이름을 바꿀 만큼 부지런한 사람은 아니잖아요. 그저 찝찝한 마음을 안고 살아갈 뿐이죠. 살면서 에너지가 부족한 게 불만이라면 생활 습관을 바꾸고 운동을 하면 될 것을. 

'아 나는 역시 이름 때문에 어쩔 수 없네'라며 이상한 자기합리화를 시도했던 것도 같아요.


 아!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던 합리적인 이유가 하나 더 있었습니다. 유명한 소설가 '김소진'님이 안타깝게도 33세의 젊은 나이에 돌아가셨더라고요. 그 때만 해도 그분이 내가 아는 유일한 '김소진'이었기 때문에, 내 이름은 위험하다는 생각의 축에 무게가 조금 더 실렸습니다.


 하지만 이후로 기업가 '김소진'님도 네이버 인물 정보에 등장했고, 배우 '김소진'님도 연예계에 등장하였습니다. 두 분 다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 것 같아 안심할 수 있었어요. 어느새 소설가 김소진님 보다 내가 더 오래 살고 있기도 하고요.


 얼마 전 민정님이 빌려주어 읽은 책 '피프티피플'을 읽고, 내가 가장 인상 깊었던 인물로 이호라는 늙은 노교수를 꼽은 것 기억하나요? 80년 가까운 자신의 인생사를 '솔직히 말도 안 되게 운이 좋았다'라고 자평할 수 있는 인물. 실재하는 인물이 아닌데도 너무나 부러웠습니다. 하지만 이내 글 속에서 다른 사실을 알게 되었죠. 이호 교수는 운이 좋았던 게 아니라 태도가 좋았던 사람이더라고요.



유학시절은 영양실조에 걸릴락 말락 할 정도로 힘들었지만 굶어 죽기 직전엔 꼭 누가 도와주었다. 운 좋게도 결핵은 걸리지 않았다. 그 시절 결핵은 무시무시했고 그 병으로 친지를 여럿 잃었다. 지금도 한국은 결핵에서 벗어나지 못했는데, 다들 너무 가벼이 생각한다. 하여간 꼬챙이처럼 말라서는 공부만 열심히 했다. 장학금을 못 받으면 곁에서 누가 숨어 있는 장학금을 찾아주었다. 도움을 받았다. 끊임없이 도움을 받았다. 스스로가 잘나서가 아니었다. 머리가 나쁘지는 않았고 공부도 좋아했지만 그 정도 인물이야 흔하다. 무얼 이뤘건 모두 운 좋게 받은 도움들 덕분이었다. 이만큼 적시에 도와주려는 손들이 다가왔던 인생이 또 어디에 있을까. _ '이호편', 피프티피플, 정세랑.


'이호'라는 이름이 사주팔자상으로 특별히 운이 좋은 이름은 아니었겠지요. 이호는 분명 누가 보아도 도와주고 싶을 만큼 자신의 인생에 충실했을 것이고, 힘든 일을 겪더라도 그 다음에 찾아오는 좋은 일에 감사하는 사람이었을 거예요. 스스로의 인생을 비꼬아 보는 법 따윈 없었을 것 같습니다.


민정님으로도 충분한 민정님, 나는 오늘부로 맹세합니다.

선서. 나 김소진은 앞으로 내 이름을 비꼬아 보고 의심하는 일은 없을 거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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