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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경재 Aug 31. 2024

살아있는

앙(仰) 이목구심서Ⅲ -2

요안나 이모가 선종하셨다는 원내방송을 듣는다.

나이 차이가 안 되는 장애인이라서 개인적으로 이모라 불러왔다.


"요안나 님께서 조금 전인 10시 18분, ○○병원에서 선종하셨습니다. 고인이 되신 요안나 님을 위해 많은 기도 부탁드립니다"

하고 실내 스피커에서 바이러스 같은 부음이 흘러나와 주위를 어둡게 만든다.


그러나,

아무런 동요가 일어나지 않는다.

한 줌 바람처럼 귓속에 맴돌다 그대로 나가버린다.

가슴까지 도착하지 못한 선종은 무덤덤하다 못해 냉정하다.

얼마 전까지 사슴처럼 촉촉하던 눈동자를 바라보며 서로 인사말을 주고받지 않았던가.


저녁 뉴스에서 일방적으로 보여주는 우크라이나 전쟁 장면처럼 무색무취로 멀게만 느껴진다.

의미 없이 내 안구에 잠깐 고였다가 사라질 뿐이다.


이런  모습보면서 흠칫 놀란다.

'내가 이래도 되는 건가?'

'마음이 왜 이렇게 굳어버렸을까?'

하며 나 자신의 생경함에 놀람을 넘어 혐오감마저 밀려든다.


이곳 성심원에 온 지 어언 10년을 넘어섰다.

강산이 변한다는 기나긴 시간이다.

되돌아보니 해마다 칠팔 명 이상의 어르신이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그래서일까?

처음엔 어르신의 빈 침대가 너무나 크게 다가왔고 그 부재가 두렵기까지 했다.

한동안은 어르신의 죽음으로 혼란스럽고 심란한 마음이 이어졌다.

때때로 상주가 되어 텅 빈 빈소를 지켰고, 진주 화장장에 가 백골이 된 어르신을 수없이 보았다.

그때마다 난 삶과 죽음을 생각해야 했다.


이런 마음들이 매번, 해마다 반복되었다.

그러다 죽음은 일상처럼 평범한 일 중 하나인 양 받아들이기로 마음먹었다.

그렇지 않고서 어르신의 죽음을 옆에서 지켜보았다면 나는 공포와 허무 사이에서 온전하지 못했을 것이다.


밟으면 밟을수록 단단해지는 바닥처럼 내 마음은 죽음이라는 할 수 없는 발자국으다져져 벽돌처럼 단단해지고 차가워졌다.

한마디로 무디어져 갔다.

죽음은 옆집에 사는 이웃과 같아서 언제라도 찾아올 수 있는 존재였다.


칼이나 낫이라면 숫돌에 갈아 다시 무딘 날을 예민하게 세울 텐데, 마음은 그러지 못한다.

세월이 갈수록 단단해지고 거칠어 눈물이 스미지 않는다.

바늘로 찔러도 아프지 않을 만큼 두꺼운 수피로 덮여버렸나 보다.


이제, 무너진 감수성을 다시 회복할 수 있을까?


지금 당장은 해답이 보이지 않는다.

허물어보이지 않는 마음에 건축물을 세우려면 더 많은 자재와 에너지가 필요하리라.

그냥 나 자신을 돌아보는 게 급선무이리라.

마음 창고의 세간을 다 꺼내어 뒤집어 가며 부채와 자산을 셈하고 적나라하게 드러난 현재의 나를 처방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기억하는 것이다.

살아가면서 망자의 이름을 자주 부르리라.

먼저 가신 이들의 이름을 부를 때마다 뜨거운 어떤 것이 가슴속에 들어와 따뜻해져 옴을 느낀다.

이는 틀림없이 나의 부름을 듣고 보이지 않는 그들의 영혼이 곁에 찾아왔기 때문이다.


미사 중에 하늘을 보고 그의 영혼을 따뜻이 안아주도록 기도하리라.

내가 잊지 않고 기억하든, 혹은 유가족이 기억하든 누군가로부터 호명받고 호출되는 한, 요안나 이모내 안에서 살아있는 것이다.

뛰는 심장을 데웠다는 건 존재하는 어떤 존재의 영향이 원인이다.

보이지 않는 몸을 입고 지금 여기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잊지 말고 자주 이름을 불러드려야지.


살아서도, 죽어서도 우리 어르신이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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