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레터
2주 전, 태어나 처음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어요. 첫째 날, 둘째 날에는 하카타역 주변의 숙소에 머물며 여행하고, 셋째 날에는 2시간 정도 버스를 타고 유후인으로 넘어가 료칸에서 온천을 즐긴 후 마지막날 바로 공항으로 가는 일정이었습니다.
셋째 날, 유후인으로 넘어가는 버스에서 잠시 눈을 붙이던 중, 불현듯 소름끼치는 사실이 떠올랐습니다.
"아아아아악, 어제 쇼핑한 것들 싹 다 호텔 로비에 두고 왔어!"
아침에 체크아웃을 하고 잠시 로비에 앉아 있다가 옆에 놔둔 가방을 깜빡하고 안 챙긴 것이었죠. 관광지에서 구매한 귀여운 소품과 선물들, 그리고 어제 백화점에서 큰 맘 먹고 구매한 새 지갑까지 들어 있는 가방을 말이에요! 순간 너무 놀라서 어찌해야 좋을지 몰라 얼굴을 감싸쥐었어요. 호텔에 전화를 걸어보았지만 구매해간 유심으로는 통화가 되지 않았고, 이메일과 호텔 예약 사이트를 통해 문의 메시지를 남겨두었지만 언제 답변이 올지 모르는 상황이었죠.
사실 일말의 희망은 있었어요. 이틀 동안 여행을 하면서 본 일본은, 주인이 없는 물건에 함부로 손을 대지 않는 문화 같았거든요. 함께 여행을 간 지인들 중 마지막날 다시 하카타역 근처로 가는 지인도 있었으니, 누군가 가방을 훔쳐가지만 않았다면 다시 되찾을 방법은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가방을 찾지 못할 상황에 대해서도 빠르게 계산을 해봤어요. 가방을 찾지 못한다면 대략 왕복 비행기표 값을 잃은 셈이더군요. 돈도 돈이지만, 그 물건들을 사면서 쓴 시간과 저의 기쁨을 생각하면 눈물나게 아까웠습니다.
그때, 제 옆 자리에 탄 친구가 기지를 발휘했습니다.
"버스에 타고 있는 현지인에게 전화를 빌려볼까?"
버스 뒷편에 엄마 또래 정도로 보이는 인상이 좋으신 아주머니가 앉아계셨어요. 친구는 번역기를 돌려가며 현재 제 상황을 열심히 설명해 주었고, 아주머니는 감사하게도 직접 호텔에 전화를 걸어 제 가방이 로비에 있는지 확인해 달라고 요청해 주셨습니다. 호텔의 답변을 기다리는 그 순간, 저는 3박 4일간의 일본 여행 중 가장 가슴이 두근거렸어요. 가방이 없다는 답변이 올까 봐 걱정돼서라기보다는, 그냥 이 순간이 가장 여행 같았거든요.
2022년, 처음 '원지의하루' 라는 유튜브를 알게 된 후 모든 콘텐츠를 외울 정도로 반복해서 봤어요. 원지님은 그리스에서 배를 타고 가다가 이름 모를 섬에 잘못 내려 캄캄한 밤에 숙소를 찾아다니기도 하고, 난방도 잘 되지 않는 일본의 한 PC방에서 하룻밤을 자기도 하고, 이집트에서는 가는 곳마다 사기를 당하기도 해요. 어떻게 보면, 도전적인 여행을 즐기는 사람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는 않아요. 그녀는 저와 같이 '안전'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이라 저녁만 되어도 바깥을 돌아다니지 않아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행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당황스럽고 예기치 못한 상황들이 발생하게 되는데, 그러한 상황들마저 '여행'으로 만드는 그녀에게 푹 빠져들었던 것 같아요.
이름 모를 섬에 잘못 내리면 다음 배가 올 때까지 기다리면 되고, 난방이 안 되면 패딩을 입고 자면 되고, 바가지 요금을 씌우면 까짓 거 바가지 요금 내버리고 다시는 가지 않으면 될 것을. 어쩌면 대단히 위험하지도 않은 불편한 상황들을 맞을 때마다 나는 그것을 온전히 나의 '과오'로 받아들이고 스스로를 힘들게 만들었던 건 아닐까, 그녀를 보며 깨달았어요.
지나간 실패를 되씹는 사람은 건강한 자신감을 지닐 수 없다.
이런 사람은 무력감에 시달리며, 긍정적인 결과를 달성할 수 없다.
- 보도 섀퍼 -
잠시 후, 호텔에서 가방을 찾았다는 연락이 왔고 버스는 유후인에 도착을 했습니다. 아주머니께는 두 번 세 번 감사의 인사를, 그리고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먼 자리에 앉아있던 지인에게 스펙터클했던 소식을 전하며 내일 하카타역으로 가면서 제 가방을 찾아와 달라고 간곡히 부탁했습니다. 알고 보니 지인도 호텔에 두고 온 짐이 있어 제 가방을 함께 찾아다 주었고, 이렇게 유후인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의 작은 소동은 해피엔딩으로 끝이 났습니다.
일본에서 돌아와 여행이 어땠냐는 질문을 받으면 저는 가장 먼저 이 에피소드를 말합니다. 그게 해피엔딩이든, 새드엔딩이든 마찬가지였을 거예요. 마치 본인의 일처럼 도와주신 일본 아주머니, 식은 땀 흘려가며 번역기를 돌려준 친구, 그리고 그 옆에서 부랴부랴 이메일을 쓰고 있던 저의 모습까지. 유후인으로 향하던 버스 안에서의 그 한 장면은 영원히 잊히지 않을 것 같아요. 그리고 돌아온 일상 속에서도 이 한 가지는 잊지 않으려 해요.
이미 잃어버린 가방 때문에 앞으로 남은 여행의 가치를 망치지 말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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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글레는 교육, HR, SaaS 등 다양한 분야를 거친 회사원이자 <나답게 쓰는 날들>, <아무에게도 하지 못한 말, 아무에게나 쓰다> 에세이를 2권 출간한 작가가 보내는 일하고 글 쓰는 사람들을 위한 에세이 레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