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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람지 Aug 23. 2018

허접한 여행기, 책으로 펴낸 후일담

<슬로모의 72일 중남미 배낭여행>, 판매가 아닌 소장용으로 남겨두다

브런치 POD 서비스 덕에 난생 처음 내 글들을 책으로 펴낼 생각을 했고, 여행기를 완성했고, 원고를 받아들었고, 허접한 포토샵 실력으로 표지를 디자인했으며, 그렇게 내 첫 책이 탄생했다. 하지만, 지금 내게는, 그 책의 실물은 없다. 대신 언제든, 내가 원한다면, 주문 즉시 5만원~7만원의 돈을 내고 책을 인쇄해줄 수 있다는 가상의 증표같은 것이 생겼을 뿐.

무려, 총 4권이나 된다.

만약에 내가 수많은 구독자를 거느린 작가였다면.

내가 글솜씨가 유시민 작가 뺨치도록, 아니 그의 절반만 되었더라면.

아마 나는 지금 이 글을 존댓말로 써야 했을 것이다. 나의 구독자, 혹은 팬(?)들을 의식하여.


"여러분, 기다려주셔서 감사합니다! 제 여행기가 드디어 책으로 나왔습니다. 축하해주세요!"


그리고 남들에게 널리 읽히기를 기대하며, 혹은 어떻게 하면 그 책을 사서 읽어볼 수 있냐며 아우성치는 이들을 위하여 이런 말도 당연히 덧붙였을 듯하다.


"구매를 원하시는 분들은 아래의 링크를 들어가시면 됩니다!"


하지만 내 여행기, 그냥 판매용이 아닌 '소장용'으로 찍었다. 전체 대략 2200여쪽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사진이 너무 많은 탓이다)을 4권으로 나누었는데도, 한 권당 5만원에서 7만원의 가격이 책정되길래 실은 글쓴이인 나 자신조차도 아직 내 책을 갖고 있지 않다. 그 돈 있으면 차라리 나는 티셔츠 한 벌을 살래.


칠만칠천오백오십원이라뇨... 여러분 그냥 제 브런치에서 공짜로 읽으세요...




 그래도, 나름대로 인생 첫 책인데, '나 작가다!' 하고 허세도 부리고 기분도 내볼 겸 왜 남들도 볼 수 있도록 출판하지 않았냐고? 여러 가지 이유가 속으로 뒤엉킨다.


1. 여행기, 웬만해선 남들 읽힐 만한 글은 아니다.


 가장 궁극적인 이유. 내 여행기, 남들 읽을 만한 글, 아니다. 구태여 남들이 자신의 귀한 시간과 돈을 들여 사서 읽을 만한 가치의 글은 못 된다. 그 정도로 잘 쓴 글도 아니고, 문장을 읽는 맛이 있지도 않고, 읽다 보면 남들이 수첩에 필사하고플 만한 예쁜 문장이 있지도 않고, 그렇다고 검색하면 나오는 그 흔한 네이버 블로그 글처럼 어느 식당이 괜찮고 어느 여행사가 괜찮고 숙소가 좋더라 하는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처음 여행을 계획하려 서점에서 여러 여행 서적을 뒤질 때. 나는 깜짝 놀랐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여행기를 책으로 펴내고 있었다니! 몇 권 집어 그 자리에서 읽어보았다. 으으, 도저히 못 읽겠다! 너무 못 썼다! (나도 글 잘 쓰는 사람은 아니지만) 내가 써도 이것보단 낫겠다! 몇 페이지 못 넘기고 다시 제자리에 꽂았다. 물론 뛰어난 명문장가만이 책을 내라는 법은 없다. 자유 국가 자유 사회 자유 시민. 누구나 원한다면 작가가 될 순 있다. 하지만 그것을 남들에게 팔아서 수익을 내려고 하는 마음가짐에 대해선 난 약간 삐딱한 마음이 들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의견이다.) 아니 대체, 양심적으로, 잘 쓰지도 않았고 재미있지도 않은 글을 대체 왜 가격을 매겨서 남들이 구매하게끔 서점에 비치하는 걸까? (물론, 현명한 소비자의 시장에서 가치 없는 물건을 걸러내는 필터링 능력을 믿으면 될 일이지만.)


너 지금 걸리버 오빠 앞에서 여행 얘기 하는 거야???? 소인국 대인국 갔다 와봤냐?


 여행기를 출판한 수많은 아마추어 작가들의 의도를 오해했다면 미안하지만, 저들은 일종의 '여행기를 위한 여행기'를 쓴 게 아닌가 싶다. 국내여행을 넘어 해외여행도 너무 흔해지고, 단순한 배낭여행도 모자라 대륙일주와 해외일주를 하는 사람들이 너무 흔해진 시대. 이젠 더 이상 여행 좀 갔다온 걸로 주변 사람들은 내게 "멋있다!" "부럽다!"고 해주지 않는단 얘기다. 최소한 여행기 정도는 출판해 줘야, '나 이제 작가님입네-'해야, '멋있다' 소리 들을 수 있게 된 거다.


 한때 특히 20대 청춘들 사이에서 여행은 초울트라 근사한 '스펙'이었다. 알바해서 모은 돈으로 몇 달 배낭여행 다녀왔다고 하면, 면접관 앞에서 내가 이렇게나 진취적이고 문제해결력이 뛰어난 사람임을 증명하기 딱 좋은 스펙이 된다. (물론 나도 그런 의도가 전혀 없지 않았다. 근데 요즘엔 그 스펙의 '약발'도 거의 사라졌지.) 하지만 솔직해지자. 여행은 남을 위해서 하는 게 아니다. 그 과정에서 얼마나 고생을 하든, 그것은 자신의 선택이고 본질적으로 여행은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위한 활동이다. 뭐 대단한 것 포기하고, 뭐 대단한 이타심에 기인하여 다녀오는 것, 절대 아니다. 제 돈 주고 제가 호강한 것이 '멋있다'는 소리를 들을 일인가? 왜 그것을 가지고 '멋있다'는 칭찬을 받으려 애를 쓰는가. 처음엔 나도 물론 어린 나이에 여자 혼자 남미를 다녀왔다는 이야기를 하면 "우와, 멋있어!" 라고 해주는 주변 어른, 친구, 선배들의 말에 우쭐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게 너무 오글거려서, 정색하고 이렇게 대답한다. "전혀 멋있지 않아."



 어릴 때부터 우리 자매에게 책을 참 많이 읽힌 우리 엄마의 서재에 유일한 '남'의 여행기가 있다. 그건 바로 <바람의 딸 한비야 걸어서 지구 세 바퀴 반>. 당시에 엄청난 베스트셀러였고, 어린 나도 엄청나게 재미있게 읽었다. 몇 년 전 그녀의 책에 대한 인터넷에 떠도는 비판글(비판이라기보다는 한비야보다 자신이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는 우월감, 혹은 정 반대로 그것을 인정받지 못하는 열등감이나 악의에서 비롯된 비난에 가까웠다고 기억한다. 역시 내 개인적 의견이다.)도 읽었고 몇 가지는 독자들이 생각해볼 지점이 있는 비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인정하자. 한비야씨 책, 엄청 재밌잖아. '세계 일주'라는 콘셉트조차 생소하던 시대에 온갖 오지를 맨몸으로 누빈 용감무쌍한 여자 이야기. 미취학 아동인 내가 읽어도 눈이 번쩍 뜨이는 재미였다. 그녀가 세련된 명문장가는 아닐지라도 사람을 빨아들이는 마성의 흡입력은 있다. 그 정도 재미가 되면 내가 돈 주고 사 읽겠다.


 인정하자. 여행기 잘 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다.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동, 거대하고 이국적인 자연을 마주하는 그 생생한 감각. 그거 엄청 주관적인 거다. 아무리 남에게 설명해도 잘 안 된다. 그걸 독자에게 와닿게 쓰고 감동을 주는, 돈값하는 여행기는 극히 드물다. 그나마 요즘에는 사진이라도 있지, 사진 한 장 없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이,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이 대단한 이유다. 그래서 나는, 그들처럼 잘 쓸 자신이 없어서. 겸손하게, 내 여행기를 누구나 인터넷에서 볼 수 있는 공짜 글로 남겨두기로 했다. 나만의 추억팔이를 위한 글로 남겨두기로. 나는 글솜씨는 없어도 양심은 있는 걸로...!  


2. 나르시즘의 향연지옥: 셀카가 너무 많다. 


  앞서 신랄하게 비판한 대부분의 '못 쓴' 여행기들이 온갖 억지 감성적인 표현과 말장난으로 나르시즘을 난사해 놓았다면, 내 여행기의 경우에는 '내 얼굴'로 나르시즘 범벅을 해 놨다. 아마도 내 구독자들이나 우연히 정보 검색을 위해 내 글을 읽으신 수천 수만 명의 분들께선 짜증이 나서 눈살을 찌푸리셨을 수도 있다. "뭔 셀카가 저렇게 많아?" 요즘 같이 험한 시대에 얼굴 도용이라도 당하지 않을까, 신상 털리지 않을까 걱정하셨을 수도 있겠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다. 죄송하다. 공주병 맞다. 빛나는 청춘, 가장 예쁠 나이, 72일의 24시간을 빼곡하게 이 세상에 대한 경이로움과 모험심과 성취감을 느끼며 그걸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내 얼굴을 영원히 박제해놓고 싶었다.  

 

쯧쯧 가관이다 가관..... @내 여행기에서 스스로 캡처함.


 근데 솔직히 나도 놀랐다. 내 여행기에 내 얼굴 사진이 너무 많아서. 그래서 고작 두 달 반의 여행기의 분량이 2000페이지가 넘어간다는 사실에 깜짝 놀라서, 처음 받은 원고를 편집하며 내 얼굴 사진을 몇 장 빼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내가 진짜 어쩔 수 없는 나르시스트인게, 풍경사진은 몇 장 뺄 수 있어도 셀카는 죽어도 한 장도 못 빼겠더라. 도리어 출판사측에서 보내준 원고를 검토하다가 히히거리면서 넋을 놓고 내 얼굴 구경에 푹 빠진 나 자신을 발견했다. 


 어쩌겠어. 앞서 말했듯이, 내가 다녀온 여행이다. 정보 제공을 위해서 남을 다녀온 사전 답사도 아니고, 국제 기구 일원으로서 인류 평화를 위해 의료봉사로 다녀온 것도 아니다. 오로지 나 자신을 위해서 다녀왔고, 이 여행을 통해 가장 즐거웠던 것도, 가장 괴로웠던 것도 나 자신이므로 이 여행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내 셀카인 것 같다.


 아무튼 내 얼굴이 70%의 지분을 차지하는 여행기를, 사람이 양심이 있다면, 어떻게 남들 읽으라고 서점에 내놓을 수 있겠어. 나 혼자만 얌전히 보겠습니다.


3. 우리는 왜 여행기를 쓸까?


 자유 사회의 자유로운 시민으로서 자유 의지로 여행기를 쓰는 수많은 사람들을 너무 신랄하게 비난한 탓에 갑자기 미안한 마음이 들어서일까? 이 글을 쓰는 중에 또 다른 방향의 생각이 떠올랐다. 사람은 왜 여행기를 쓰는 걸까? 서점에 가면 에세이라는 분류 아래에 자서전, 시, 일기, 신변잡기적 수필, 비평 등등 수많은 형식의 책이 있지만, 저자의 대부분은 직업 작가이거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인 경우가 많다. 그러나 유독 여행기는 진입장벽이 낮다. 평범한 사람들이 여행기는 부담없이, 의욕적으로 글을 써서 출판을 한다. 왜일까?


 대부분의 나처럼 평범한 사람들은 평소엔 '글감'을 생각하며 살지 않는다. 누군가가 네 얘기를 담아서 자서전을 쓰라거나 경수필을 써 보라고 하면 엄청난 부담일 것이다. 평범한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 속에서는, 죽어도 글감이 생각이 잘 안 난다. 생각이라는 걸 하고 사는지도 잘 모르겠다. 우리 모두는 대개는 기계적으로, 맨날 맨날 똑같이, 살아지니까 그냥 산다. 


여행과 사랑은 사람을 예술가로 만들지.


 그러다가 여행을 가게 됐는데, 여행은 엄청 다른 거다. 일상의 패턴에서 벗어나서 갑자기 한꺼번에 많은 것들이 눈에 들어오고 귀에 들어오고, 하루 안에 수많은 낯선 곳들을 가고 낯선 사람과 사건을 겪는다. 하루종일 익사이팅한 이 기분. 갑자기 글로 쓰고 싶은 이야기가 넘쳐날 것이고 갑자기 영감이 찾아올 것이고, 어서 남들에게 들려주고 싶을 것이다. 나도 내 여행기를 브런치 매거진에 연재한 사람으로서 그 마음을 충분히 이해하고, 또 '창작'을 행동에 옮긴 경지를 칭찬한다. 그것을 가격을 매겨 가급적이면 많이 팔리기를 바라며 허풍과 과장을 섞어 이윤을 추구하는 건 또 다른 얘기지만.



 본의 아니게 장문의 글이 돼버렸다. 그래도 나는 글쓰기만큼 건강하게 자아를 표출하는 활동도, 생산적인 활동도 없다고 믿는 사람이다. 우연히 이 허접하고 삐딱한 글을 읽은 모든 사람들, 나의 모든 구독자들, 부디 생이 끝나는 날까지 열심히 글을 쓰시길. 열심히 예쁜 삶의 기록들을 남기시길. 내 "소장용 책"의 서문을 공유하며 글을 마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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