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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에서나온사람 Nov 05. 2022

너도 임신 하지마 다 남편 시켜

[애니메이션 포스트프로덕션 - 음악(3)]

[지난 이야기]
K-pop을 개사하여 노래를 흥얼거리고 다닐 정도로 본인 작품에 과몰입했던 감독 노경무. 유명 음악감독 섭외도 성공했겠다, 기깔난 영화 주제가를 만들 생각에 잔뜩 신이나 있었다. 그러나 그러나 기대에 못미치는 데모곡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지는데...


이 이야기가 영화라면, 나는 역경과 고난을 뚫고 멋들어진 주제곡을 만드는 데 성공했어야 겠지? 그러나 나는 이러저러한 이유로 포기했다. 엔딩크레딧에 주제곡을 올릴 계획이었지만, 러닝타임을 30분 이내로 줄이는 과정에서 크레딧 길이가 대폭 짧아진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물론 데모곡도 생각만큼 잘 나와주지 않았고. 해결책이 잘 보이지 않는 문제에 세월아 네월아 매달리고 있는 것도 성미에 맞지 않았다.



감독님, 저..주제곡 안 만들려고요...(쭈뼛)


네~ 알겠어요. (So Cool)



장감독님은 살짝 웃으면서 대답했는데, '잘 생각했다'고 말씀하시는 듯 했다.






감독님과의 첫 미팅은 2021년 겨울이었는데, 그 때 얼굴도 처음 뵙고, 계약서도 체결했다. 내 인생에 그렇게 유명한 사람을 긴밀하게 만나는 것은 처음있는 일이었다. 그래서 나름 신경 써서 흰 셔츠를 꺼내입었던 기억이 난다. 나는 스몰토크에 딱히 능하지 않았기에 간단한 인사 후 본격적으로 일 얘기를 시작했다.


미팅에 앞서 표 하나를 짰다. 이런 표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는데, '예상' 큐시트라고 해야할까? 음악이 필요한 부분을 정리한 표였다. 이 표대로 영상을 스킵하면서 감독님과 애니매틱을 훑었다. 한 시간 내내 혼자 떠들었다. 각 씬이 어떤 내용인지, 누가 주인공인지, 어떤 음악이 필요한지 등을 설명했는데, 아마 횡설수설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감독님은 잠자코 듣고만 계셨다. 정말 듣기만 하셨다. 그때는 그런 반응이 조금 혼란스러웠다. 감독님이 내 말을 잘 듣고 계시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신지 알 수 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일방적으로 하고싶은 말을 모두 쏟아낸 후, 첫 미팅이 얼레벌레 끝났다.



첫 미팅때 들고간 예상 큐시트



이 후 제작 일정이 이래저래 늦어져서, 다음 해 봄이 되어서야 음악작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었다. 대면 미팅은 총 네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2022년 5월 19일 - 1차 미팅

2022년 5월 29일 - 2차 미팅

2022년 7월 17일 - 3차 미팅

2022년 9월 3일 - 믹싱 미팅


첫 미팅때 나는 적잖이 놀랐다. 장감독님 말고도 두 분의 작곡가가 더 와 있었기 때문이다. 30분짜리 독립영화에 작곡가가 세 명이나 붙을 일인가. 내가 그렇게 돈을 많이 드리지 않았는데...! 음악을 듣기도 전에 황송해졌다. 음악을 들은 후에는 더 황송해졌고, 그 분들의 이름을 검색해 봤을 때는 더욱 더 황송해졌다. 집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내내 생각했다.



아, 나는 진짜 복받은 인간이다.







음악미팅은 보통 이런식으로 진행되었다.


1. 만든 음악을 영상 위에 올리고, 멈춤 없이 한 번 쭉 본다.

   (나는 영상을 보면서 폭풍 메모를 한다.)

2. 다시 처음부터 보면서, 논의가 필요한 지점에서는 영상을 멈추고 함께 이야기 한다.

   (때를 노리고 있다가 적절한 시점에 내가 아쉬웠던 지점 및 요청사항을 이야기 한다.)

3. 간단한 수정사항은 바로 적용해보고, 나머지는 다음 미팅 때까지 반영해보기로 하고 미팅 종료.






많은 영화감독들이 음악감독과의 의사소통을 어려워한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이미 주제곡 만들기에 실패하지 않았던가. 그래서 본격적인 음악 작업에 앞서 특훈을 하나 받았다. 한정인 음악감독님의 소규모 온라인 강의였는데, 거기서 얻은 교훈은 '음악 지식이 없어도 쫄지말고 자신의 언어로 잘 말하기'다. 그래서 나는 정말 쫄지않고 세 분의 작곡가님께 최선을 다해서 설명했다. 그 전에,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야 했는데, 그래서 미팅 내내 엄청난 집중력이 필요했다. 음악은 작곡가가 다 만들어주는데 감독은 가서 듣기만 하면 되는거 아니야? 맞다. 그런데 진짜 열심히 들어야 한다. 2~3시간동안 이 음악이 'O'인지 'X'인지 가려내다보면, 미팅 끝에는 아주 기진맥진한 상태가 되고만다.



아, 지금 음악도 좋은데, 사실 그 대목은 확실히 슬퍼야 하는 부분이라서요, 앞에 장례식에 들어갔던 음악 같은 느낌이면 좋겠습니다.


아, 이 씬에선 야릇함 보다는 장난스러운 분위기가 났으면 하거든요. 정환이가 얼떨결에 당하는 느낌? 이었으면 합니다.


음, 좋은데, 피리소리는 너무 구슬픕니다. 이 소리는 지옥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습니다.


뒤로 갈수록 편집 템포가 빨라지는데 음악은 여전히 느긋해서, 음악 호흡도 같이 빨라졌으면 좋겠어요!

아, 여기 너무 좋습니다. 제가 썼는데 제가 찡했어요...!!




나의 언어는 제련되지는 않았지만, 확실히 통했다고 생각한다. 왜냐면 내가 원하는 바를 찰떡 같이 반영해주셨고, 미팅을 거듭할수록 내가 장황하게 설명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때는 이 분들이 내 마음을 읽는 것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음악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다. 캐릭터, 배경, 스토리보드, 원화, 동화, 채색, 촬영, 뭐 이것 저것 할 것없이, 모든 과정에서 모든 스탭들이 내가 하는 말에 귀 기울이고, 내가 원하는 바를 구현하기 위해서 애써온 것이다. 대체, 내가 뭐라고? 내가 뭐 대단한 사람이라고 이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들어주지?







감독이니까.








나는 지난 2년동안 아주 지독한 감독 놀이에 빠져있었다. 내가 아주 중요한 사람이 되는 경험. 아니 그걸 넘어서서 어떤 세계의 '' 되어보는 경험.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거의 모든 요소들을 내가 통제할  있었다. 일평생 이런  느껴본 적이 없었는데! 그러니까 매번 음악미팅 마치고 집에 돌아갈 때면 몸은 너무 힘들지만 기분이 황홀한 것이다. 마약하는 기분이 이런건가? (아님) 갑자기  세상이  아름다워 보이고, 작은 것에도 감사할  아는 사람이 되고 만다.




학교를 졸업하고 나면 난 대체 어디서 이런 감정을 또 느껴보나? 이제 누가 나한테 신의 놀이를 시켜주나? 졸업을 앞두고 이 회사, 저 회사 원서를 내봤는데, 하나같이 족족 떨어졌다.







별 수 없지. 내가 나를 고용하는 수 밖에.













[덧붙이는 글]


제가 왜 주제곡 만드는 데 실패했을까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저는 너무 궁금했답니다. 삽입곡은 너무나 잘 나왔는데, 주제가 데모는 왜 그렇게 안 좋게 들렸을까?? 계속해서 생각했어요. 아마 장감독님은 이유를 알고 계셨던 것 같아요. 그래서 그때 살짝 웃으신 것 같습니다. 그때는 그냥 본능적으로 포기했는데요, 이제서야 그 이유를 제대로 깨쳤습니다. 그건 바로, 제가 'NEXT LEVEL'에 너무 함몰되어 있었기 때문이에요. 그 멜로디와 그 비트가 아니면 절대 제 귀를 만족시킬 수 없었던 것입니다. 거의 1년 가까운 시간동안 애니매틱을 수없이 보면서 제가 스스로 녹음했던 그 노래에 뇌가 절여져버린 것입니다... 여러분은 부디 레퍼런스의 함정에 빠지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럼 이만.


 




[덧붙이는 글2]

'신의 놀이'는 가수이자 영화감독인 '이랑'의 노래 제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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