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 May 14. 2018

혼자 걷는 길은 이제 끝

46.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엄마를 만나러 갈 도시, 레온으로

10월 24일 

프랑스길 El Burgo Ranero - León 37.3km


다른 순례자들의 부스럭거림에 눈을 뜬다. 오늘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레온으로 바로 들어가는 순례자들은 아침 일찍부터 서두른다. 이 알베르게에는 나가야 하는 시간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더더욱 빨리 서두르는 느낌도 있다.

간단하게 아침을 챙겨 먹고 알베르게를 떠난다. 봉사자 할머니들의 살가운 인사에 마음이 따뜻해진다. 오늘 레온에 다다르면 한동안 만나지 못했던 H언니와 중국식 뷔페에 갈 가능성도 있다. 내가 무사히 레온에 다다라 언니가 있는 알베르게에 도착한다면 말이다. 발걸음이 가볍다.

아침 나오는 길, 엘 부르고 라네로를 돌아보며.

마을 사진을 찍고 있는데 킴! 하는 소리가 들린다. 이제는 그렇게 소스라치게 놀라지는 않는다. GR65 콩크에서부터 연을 이어온 브장송 아저씨이다. 브장송 아저씨도 어젯밤에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묵었다 말하신다. 당신은 사립 알베르게에서 묵었고 슈퍼를 두 번 정도 왔다 갔다 했는데 나를 한 번도 보지 못한 것을 신기해했다. 아저씨는 오늘 내가 어디까지 가는지 묻는다. 저 오늘 레온까지 가요, 근데 내일 마드리드 내려갈 거예요. 아 드디어 내일이구나 너희 어머니 오는 날. 네 맞아요! 그래 봉 슈망! 쿨하게 아저씨는 인사하고 길을 떠나신다.

왼쪽 구석에 있는 브장송 아저씨의 뒷모습.

나는 매일 아침같이 아름다운 터치들을 보며 정말 행복했다.


순례길의 가장 큰 기쁨은 매일 해가 뜨는 시간 또는 내리는 비를 온전히 다 느끼며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것이다. 해가 언제 뜨는지 또 언제 지는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던 날들이 먼 과거같다. 바깥에 비가 와도 집 지하주차장에서 회사 지하주차장 사이로 오가는지라 비를 창으로만 보았던 날도 있다. 이제는 비가 오면 비를 온전히 맞고 가방 꽁꽁 싸맨다. 해가 뜨면 행복하게 일출을 바라보며 오후의 더위를 생각한다. 자연의 흐름이 내 일상이 되는 기쁜 나날들이다.

들판의 끝에 숲이 있었다.


한참 평지를 걷다 보면 힘들지 않은 듯 힘이 든다. 목이 너무 마르다. 오전의 한가운데. 곳곳의 바에서 순례자들이 아침식사나 음료 한잔씩 하고 있었다. 나는 굳이 바에 갈 생각은 없다. 식료품점에서 콜라 한 캔을 사들고 나와 그 앞의 벤치에 앉아 벌컥벌컥 마신다. 그때 근처 고양이들이 날 탐색하러 온다. 귀여워 사진을 찍고 있는데 분명히 앞서 가던 브장송 아저씨가 뒤따라 오신다.


브장송 아저씨가 나에게 묻는다. 

킴, 나 너의 사진을 찍어도 되겠니?


생각해보니 브장송 아저씨와는 프랑스 멀리서부터 우연히도 꾸준히 만나고 있는 인연인데, 사진 하나 제대로  찍지를 않았다. 아저씨는 레온 이후에도 계속 길을 이어갈 생각이라 이제 나를 보지 못할 거라 생각하신 모양이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프랑소와즈 쟝 미셸 아저씨도 그렇고, 왠지 마지막일 것 같은 예감은 항상 들어맞았다. 함께 사진을 찍길 원하냐 물으니 그건 아니고 가만히 있으면 당신이 잘 찍겠단다. 세상에서 제일 무뚝뚝한 프랑스인일 거야, 하고 속으로 깔깔대며 웃었다. 어색하게 브이하고 사진을 찍힌 뒤, 나도 아저씨에게 사진 하나 찍어도 되는지 부탁했다. 아저씨는 처음으로 (아저씨 나름의) 가장 밝은 미소를 지으며 내 사진의 피사체가 되어주셨다. 지금 보니 눈썹은 여전히 찡그리고 있지만, 입과 눈만은 웃으려 노력(!)하고 있는 것이 선명하다. 

아저씨는 세상에서 제일 쿨하게, 손을 들어 봉 슈망! 하시더니 바로 들어가신다. 아저씨다운 마지막이다. 나는 기분 좋게 길을 이어간다.

마을 어귀에 있던 공원과 작은 경기장. 

한참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제법 큰 마을에 다다랐다. 빵도 충분히 있고 초리소도 충분히 있다. 콜라만 하나 사서 점심을 먹어야지 하고 계획한다. 먹는 것, 걷는 것, 자는 것. 이 세 가지가 순례길의 삼위일체가 아닐까.

장이 열렸다. 조금 구경한다.

40km 가까이 걷는 날들은 마음이 그렇게 편치가 않다. 오늘도 그렇다. 가능한 한 레온에는 6시 전에 들어가고 싶어서 발만 보고 걷다 보니 정신이 없다. 그래도 이 흐름이라면 충분히 안정적으로 레온에 당도할 것 같다. 길을 걸으며 많은 생각을 한다. 이제부터 엄마와 걷는 길이라니.

긴 듯 짧았던 시간이었다. 한 달 하고도 2주를 더 혼자 걸었다. 내가 걸었던 길을 계속 생각한다. 만났던 사람들을 생각한다. 콩브리오 지트의 친절한 주인아저씨, 로카마두르의 이상한 아저씨, 쟝, 티보 키트리와 말리스, 생장에서 만났던 기운찬 아가씨 3인방, 마음 따뜻했던 언니와 이상했던 사람들, 프랑소와즈와 쟝 미셸 부부와 오늘까지 신기한 만남을 이어온 브장송 아저씨, 그리고 H언니까지.


내 기억에 내 길을 계속 아름답게 새겨올 수 있던 이유. 이 많은 사람들에 또 이름이 기억나지 않은 많은 사람들, 모든 이들과 만났던 순간들이 제각기 다른 빛깔로 어우러져 내 안에 가득하기 때문인 것 같다. 이런 간질거리는 생각을 하며 레온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풍경이 제대로 기억나지 않는 길들이 이어진다. 혼자 걷는 마지막 날이라는 생각에 더더욱 머리 속에 상념이 많아져 그런 모양이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크기의 위성도시들이 보이고, 한참이나 걸려 레온으로 입성한다. 레온은 지금까지 만난 도시들과는 차원이 다른 크기이다. H언니가 있다는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알베르게 홀에 H언니가 앉아있다. 언니는 다른 순례자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시간은 거의 6시가 다 된 시간. 어제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나를 보았던 이탈리안 순례자 둘이 나를 보고 어 너?! 하고 아는 체를 한다. 인사를 하고 체크인을 한 뒤 순례자 일과를 마친다. 이 알베르게는 순례자들에게 빨래가 무료란다. 이 멋진 기회를 놓칠 수 없다. 빨래를 그러모아 부탁한 뒤 방으로 돌아와 잠깐 휴식을 취한다.


침대 아래층의 할머니는 내일 길을 시작하는 게 그렇게 걱정이시란다. 그러면서 내게 이것저것 물으신다. 내가 순례자 어플을 알려드리고 깔아드린 뒤, 구글맵 보는 법과 어플 지도 보는 법에 대해 설명을 해 드렸는데도 헷갈려하신다. 정말 한참을 설명을 했는데도 결론은 "나는 잘 모르겠어. 아- 날 데려다 줄 사람이 있으면 정말 좋으련만!" 아, 난감하다.


그때 H언니의 타이밍 완벽한 카톡. 소아씨, 웤 안 갈래요? 우와우!!


웤 WOK은 스페인 안에 있는 중국식 뷔페이다. 메뉴 델 디아 정도의 가격으로 뷔페를 즐길 수 있는 것이 큰 강점이고, 맛이 엄청 뛰어나진 않지만 배고픈 한국인 순례자들이 초밥과 중국요리를 맘껏 먹을 수 있는 곳이기도 하다. 로그로뇨, 부르고스, 레온 등등 순례길 위의 큰 도시마다 있는 것으로 알고 있는데 나는 레온에서 처음 가는 것이었다. 오픈 시간보다 한참 먼저 가는 바람에 오래 기다려야 했지만 그 기다림마저 즐겁다. 입구 앞의 테이블에서 언니와 노닥거리다 오픈하자마자 잽싸게 들어간다. 직원들이 한참 기다리던 우리를 알아보고 웃는다. 웃으면 어떠한가. 눈 앞의 뷔페가 우리에게 새로운 희열을 주는 것을.

고기를 열심히 먹는다. 초밥도 열심히 먹는다. 이렇게 신나는 기분으로 많이 먹는 것은 오래간만이다. 뷔페는 딱히 어떤 것이 맛있지는 않지만 적절히 맛있는 수많은 음식이 모여 큰 기쁨이 되는 곳이다! H언니와 나는 정신없이 기쁜 식사를 마친 뒤 가득 찬 배를 두드리며 웤을 나올 수 있었다.


내일이면 나는 엄마를 만나러 마드리드로 내려간다. 언니는 언니의 길을 나선다. 부는 바람처럼 지나갈 수다를 떨며 알베르게로 돌아오는 길, 큰 도시 레온의 밤은 여전히 밝았다.

매거진의 이전글 40km 멀긴 멀구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