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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y 09. 2018

40km 멀긴 멀구나

45.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가장 많이 걸었던 날

10월 23일 

프랑스길 Calzadilla de la Cueza - El Burgo Ranero 40.2km


오늘은 나 자신에게도 도전의 날이다. 

24일에는 어떻게든 레온으로 들어가야 했다. 칼사디야에서 레온까지는 대략 78~80km 정도 거리가 남았다. 내게 적당한 거리인 30km 정도만 걷고 나머지 거리를 버스나 택시를 타고 갈지, 아니면 나 스스로를 시험해서 하루 40km 정도씩 걸을지 결정해야 했던 날. 아침에 눈을 번쩍 뜨고 나는 결심했다. 좋아, 해보자!


평소 같으면 7시쯤 일어나 8시쯤 길을 시작해도 오후 서너 시 정도면 다음 마을에 도착했겠지만 이번은 좀 다르다. 하루에 40km. 어림잡아 계산해도 대략 10시간 정도 걸리리라. 중간중간 점심을 먹는 시간까지 고려하면 더욱 많이 걸리겠지. 물론 행군 경험이 있는 분들이나 나보다 체력이 더 좋은 분들이 이 글을 보면 뭐 그런 걸 갖고 하고 코웃음 치실 수도 있겠다. 하지만 시속 3.8km에서 4.3km로 길을 걸으며 장족의 발전을 이룬 나에게는 큰 도전이 아닐 수 없다.


오늘은 6시에 일어나 7시에 길을 시작한다. 다행히도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A와 B도 그 시간에 함께 일어나 알베르게에서 출발했다. 다만 나는 알베르게에서 내가 갖고 있던 빵으로 대충 아침을 때웠다면, 그들은 바에 들러 아침식사를 하려는 모양이었다. 바 앞에서 그들과 인사를 하고 나의 길을 시작한다.


알베르게를 나설 때 보았던 하늘. 달이 동그랗게 걸려있던 모습과 빛나는 지평선.  

동쪽 하늘을 등에 지고 서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해가 뜨는 반대편 하늘의 빛깔을 충분히 시간을 들여 볼 수 있다. 일출하는 하늘은 찬란한 아름다움이 있지만 일출하는 하늘 반대편의 하늘은 나름의 차분한 맛이 있다. 떠오르는 햇빛에 빨갛게 물든 들판을 보며 길을 걷는다.

길을 걷다 나보다 조금 어려 보이는 한국인 여성 순례자와 만났다. 마드리드로 입국해서 마드리드에서 바로 순례를 시작했다는 이 분은 그 마드리드 길에 사람이 너무 없어서 조금 무서웠단다. 그래서 사람이 그리워서 사람을 더 만날 수 있는 프랑스길로 버스를 타고 오셨다고. 좋은 선택이다. 아무리 좋은 길이라도 사람이 아예 없으면 정말 무섭다. 토르에 필적하는 아주 강력한 천하장사에다 수호천사가 한 열명 붙어있지 않은 이상, 어느 누가 외딴 시골길이 두렵지 않을까.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걷는 속도도 다르고 해서 안녕하고 계속 내 길을 이어간다.


온전히 걷는 것에 집중하기 위해서 귀에 팟캐스트 방송을 꽂았다. 회사 다닐 적 나의 손꼽히는 즐거움이었던 팟캐스트 지대넓얕(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얕은 지식)을 미리 다운로드 해 둔 터였다. 


매주 이 방송이 업로드되기만을 기다렸던 때가 있었다. 여러 가지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할 때 들으면서 머리를 비웠다. 그렇지만 퇴사 무렵 때부터 한동안 나는 지대넓얕을 전혀 듣지 못했다. 이런저런 일들과 마음의 분주함 때문에 방송에 대한 관심이 조금 사그라들었을 때였다. 방송을 미리 좀 다운로드해서 들으며 걸어야지 하고 어제 오랜만에 팟캐스트 사이트에 들어가 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7월 무렵에 이 방송이 끝나 있었던 것이었다.


끝을 상상해보지 않은 것들이 있다. 한때 아주 가까웠던 어릴 적 친구, 나름 행복했던 학교 생활, 재미있게 보던 장편드라마 등등. 끝을 상상하지 않았던 것들의 끝을 마주했을 때는 처음에는 당황하기 마련이지만 차차 그에 적응해왔다. 하지만 지대넓얕이 끝났다니. 내 빈 틈을 차곡차곡 채워주던 작은 자갈들이 와르르 무너진 느낌이었다. 무서워서 차마 맨 마지막 방송을 듣지는 못하고, 그동안 내가 듣지 못한 부분부터 차례차례 듣기 시작한다.


그렇게 마을 하나에 닿았다.

한적한 스페인 시골의 풍경

저 멀리 저 언덕? 동산? 비슷한 것이 보일 때부터 뭔지 엄청 궁금했다. 올림픽공원의 몽촌토성 같은 걸까, 생각하며 다가가 보니 와인 창고. 하긴 이렇게 평지밖에 없는 곳에서는 이 형태가 가장 효율적이긴 하겠구나, 납득하며 길을 걷는다.

그렇게 마을 하나로 이어지는 길. 나무에 둘러진 장식들과 성당을 본다. 

성당의 벽에 가방을 기대어 두고 물병에 물을 채운다. 물을 마시다 보니 성당 벽에 벌들이 웅웅 거리는 것을 보고 얼른 가방을 떼어 내 멀찌감치 떨어진다. 

이 마을에서 본 신기한 것. 바로 도서관 버스이다. 자세히 찍는 것이 실례인 것 같아 살짝 찍고 말았는데, 버스 안에는 책이 가득했고 한 노인이 책을 살펴보고 계셨다. 우리나라에도 이런 이동도서관이 있다고 들었는데. 흥미롭다.

산티아고까지 376km.

매일같이 보는 풍경이지만 질리지 않는다. 마음이 깔끔하다.

길을 이어간다.

이제 제법 표지판들에서 레온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 물론 레온이라는 이름 자체는 꽤 이전부터 많이 볼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정말 '엎어지면 코 닿을 곳'에 레온이 있는 것이다.


마음속의 기점이었던 사하군을 지난다. 사하군은 제법 큰 마을. 이 곳에서 점심을 먹으려고 작정하지만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는다. 아까 마주친 마드리드 한국인 순례자도 다시 이 곳에서 만났다. 그분은 디아에 들러 점심거리를 산다 하신다. 나는 그냥 바에 들어가 보까디요를 하나 주문한다.


흠.. 사하군은 여러모로 나에게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을 듯했다. 바글바글한 관광 순례자들 덕분에 머리가 지끈거렸는데, 이 보까디요는 내가 스페인에서 먹은 최악의 것이었다. 오래되어 안에까지 말라비틀어진 바게트에 끼워진 하몽. 나는 하몽을 좋아하는데 처음으로 하몽의 비린내를 이 곳에서 느꼈다. 차마 다 먹지 못하고 함께 나온 냅킨으로 둘둘 싸고 있는데, 친절한 바 주인은 보카디요를 가져가 은박지로 꽁꽁 잘 싸 준다. 맛은 없을지언정 인간적이고 상냥한 바 주인의 친절에 감사를 표한다. 


길을 계속 이어가는데 나무 그늘 밑에서 아까 만난 한국인 순례자를 마주친다. 이 분은 심지어 차도 건너편의 벤치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계셨는데, 나를 보자마자 가방 안에서 얼른 무언가를 꺼내 무단횡단(!!)까지 해서 나에게 건네주셨다. 짜 먹는 홍삼이다. 오늘 내가 엘 부르고 라네로까지, 그러니까 40km 정도의 먼 거리를 걷는다 한 게 걱정되셨나 보다. 감사인사를 하고 계속 걸어간다.

웬일인지 이 긴 길들 바로 옆에 가로수가 나란히 있다. 감사하게도 걸으면서 가로수 그림자 덕을 많이 보았다. 하늘은 너무 쨍하고 햇살은 살을 후벼 파는 듯 따갑지만 그림자 덕에 조금 살만하다.

길 바로 옆에 나란히 있는 가로수들

이렇게 뜬금없는 조형물도 만난다.

나란히 이어지는 가로수들. 오늘 목적지인 엘 부르고 라네로 직전 마을인 베르시아노스 델 헤알 까미노 Bercianos del Real Camino이다. 많은 순례자들이 이 마을에서 묵을 생각인 모양이었다. 벌써 오후 세시가 조금 넘은 시간. 땡볕 아래에서 계속 걸어와 어깨가 빨갛게 익은 순례자들이 각자 묵을 알베르게를 찾고 있었다. 시에스타 시간이라 그런지 마을은 아주 잠잠하다. 마을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잠깐 내려놓고 미지근해진 물을 벌컥벌컥 마신다. 


나와 한 시간 정도 전부터 계속 같이 걸었던 미국인 할아버지가 나에게 어디서 묵을 건지 묻는다. 자신은 알베르게 고려하지 않고 왔다고. 나는 이다음 마을까지 갈 거라고 말했더니 8km 정도 더 가야 한다며 그만두란다. 저 내일 레온까지 가야 모레 마드리드 가는 기차 타고 엄마 만날 수 있어요, 하고 말하니 그냥 버스 타란다. 어깨를 으쓱하던 할아버지는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 한 뒤 알베르게 화살표 방향을 따라 골목으로 들어가신다. 

태양은 너무한다 싶을 정도로 햇빛을 쏟아붓는다. 으악 너무 더워 화나! 하고 사진을 찍었는데 그게 또 너무 예뻐서 억울한 기분이 든다.


한계다 싶었을 때 엘 부르고 라네로로 진입한다. 엘 부르고 라네로로 진입하는 길은 큰 차도 밑을 지나는 길을 지나 꺾어 들어간다. 오후 다섯 시가 조금 안된 시간. 나쁘지 않은 시간이다. 내가 잘 곳 하나 정도는 있겠지.

엘 부르고 라네로에서 내가 묵기로 한 알베르게는 한 도네이션 알베르게. 나는 라피 Laffi라고 불렀다. 한동안 도네이션 알베르게에 묵지 못한 것이 떠올라서 묵어보기로 한다. 


지친 발걸음으로 알베르게에 들어가니 눈물이 핑 돌 정도로 따뜻한 봉사자분들의 환대가 있었다. 늦은 시간까지 고생이 많았다며, 우선 짐을 내려두고 체크인을 하라고 하신다. 내 앞의 이탈리안 커플이 체크인을 마치고 나도 체크인 자리에 앉는다. 이 순례를 어디에서 시작했는지, 또 오늘 어디에서부터 시작했는지 체크하신 뒤 도장을 쿵 찍어주신다. 내 나름의 도네이션 알베르게 기준 금액을 기부함에 넣는다.


잠깐 지나가는 나만의 도네이션 알베르게 금액 지불 기준.


나는 프랑스의 지트, 스페인의 알베르게들을 지나치면서 몇몇의 기부제 지트와 알베르게를 만났다. 어떤 분들은 도네이션이라 하면 아주 적은 금액을 넣기도 하고 아예 스킵하기도 하시는 것을 보았다. 이는 한국인뿐만 아니라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등등 국적을 불문하고 그러했다. 하지만 나는 내 나름의 기준을 정해서 꼭 그를 지킬 수 있도록 했다.


프랑스 지트 DP(저녁 및 조식 포함) 기부제에 머물 때의 나의 금액 지불 기준 : 25~30유로

스페인 알베르게 기부제에 머물 때의 나의 금액 지불 기준 : 8~10유로 


기부제라니 공짜인 건가...? 하고 그냥 넘어가지 말자. 


스페인에서는 먼 나라인 한국에서 온 사람들이니만큼 우리는 많은 사람들의 관심과 호기심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특히 한국인들이 많은 산티아고 순례길에서는 내 작은 행동들이 많은 한국인들의 이미지에 좋거나 혹은 나쁘게 기여할 수 있으니 주의하자.


알베르게 침실은 2층에 있었다. 보아하니 전체 큰 공간을 가벽으로 나누어 방을 만든 것 같았다. 이 말은 천장은 다 이어져있다는 이야기. 밤에 코골이가 장난 아니겠구먼. 기부제라 그런지 많은 순례자들로 알베르게가 북적이고 있었다. 내가 거의 마지막 침대를 채운 모양이었다. 문 앞에 하나 비어있던 침대를 내가 쓸 수 있었다. 나무로 된 천장이 그대로 보이고 나무 가구들이 많이 보이는 것을 보니 베드 버그가 숨을만한 곳이 많아 보였다. 베드 버그 퇴치제를 얼른 꺼내 침대와 침낭과 가방에 촉촉할 정도로 뿌린 뒤 순례자 일과를 치르러 내려간다.


40km는 도저히 하루 만에 슝 하고 걸을 만한 거리가 아니었다. 온몸이 쑤신다. 내 등허리가 가방 등판의 모양대로 바뀔 것 같은 모양이다. 한참 요가 자세들로 스트레칭을 하고 나니 조금 살 것 같다. 수고한 나 자신에게 선물을 주어야겠다. 선물이 별게 있을까. 오늘은 라면이다.


소중히 모셔온 라면이 있으니 걱정이 없다. 뭔가 다른 것 먹을 게 없나 싶어서 알베르게 앞의 식료품점에 가서 이것저것 둘러본다. 맥주 하나와 문어 통조림을 하나 산다. 신난다. 완벽한 맥주 안주가 아닌가!


시간은 6시 반, 아직 남유럽 친구들이 저녁 생각을 하기 전이다. 이때다 싶어 얼른 주방에 가서 라면을 끓인다. 보통 6시에 주방에 가 보면 요리를 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독일 분들이었다. 역시나 독일어와 영어를 섞어 쓰는 여학생 세명이 주방을 점령하고 있었다. 나는 라면 하나만 끓이면 되는데.. 냄비를 들고 애처로운 표정 비슷한 걸 지으며 서 있으니 검정 숏컷의 친구가 화구 하나를 내어준다. 5분 만에 호로록 하나 끓여 의기양양하게 테이블로 가 라면을 먹는다. 라면을 먹고 있는데 아까 봤던 독일 친구들 세 명이 내 옆으로 와서 테이블을 함께 써도 되겠냔다. 왜 안 되겠어!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검정 숏컷의 여학생과 금발 포니테일의 여학생은 독일, 백금발에 든든한 체구의 여학생은 아일랜드에서 왔단다. 셋 다 동갑이고 다들 대학교 졸업하자마자 이 순례를 온 터라 금세 친구가 될 수 있었단다. 검정 숏컷의 독일 친구가 요리를 아주 잘해서 모든 요리를 담당하고, 나머지 친구들은 주로 보조를 한다고. 내가 오늘 시작한 마을을 이야기하자 이 친구들, 자신들은 그저께 그 마을에서 시작했다며 몹시도 놀란다. 길 중반부에 다다르니까 슬슬 컨디션이 안 좋아지기 시작했다며. 길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내가 사 온 맥주를 다 비울 수 있었다.


재밌었던 것은 통성명 시간이었다. 통성명을 해야 할까... 하지만 난 너희 이름 금방 잊어버릴 것 같아 하고 내가 말하니 이 셋, 엄청 웃는다. 그러면서 자신들도 수많은 한국인들을 만났는데 다들 킴 리 팍 이어서 이제는 이름 외우기를 포기했단다. 그럼 우리 서로 이름 알려주지 말고 'hey!'정도로 할까? 하니 신나게 동의한다. 그렇게 검은 숏컷 hey와 포니테일 hey, 그리고 아일랜드 hey와 인사한다.


해가 늦게 진다. 9시가 되어가는데도 서쪽 하늘은 아직 밝다. 마을을 한 바퀴 돌고 나니 금세 어둑해진다. 이탈리안 친구들과 스페인 친구들이 시끌시끌하게 주방에 바글거리는 것을 보고 침대로 돌아온다. 그렇게 잠에 빠져드는 순간도 모른 채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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