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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y 07. 2018

그날 밤의 이야기들

44.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조용한 알베르게에서 세 여자의 수다 

10월 22일 

프랑스길 Poblacion de Campos - Calzadilla de la Cueza 32.4km


약간은 무서웠던 밤이 지나 아침이 왔다. 새벽 내내 바람이 세차게 불어 건물이 울리는 바람에 잠을 조금 설쳤다. 천고가 높은 집에서 사는 걸 동경했었는데, 너무 높으면 바람 소리도 자주 들리겠구나.. 하는 피드백도 얻었다. 바깥을 둘러보니 아직 레스토랑에는 아무도 출근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알베르게에는 나 혼자뿐이니 조금은 요란스럽게 짐을 싸도 눈치 볼 걱정이 없다. 

갖고 있던 빵 쪼가리와 버터, 초리소로 간단한 샌드위치를 만들어 아침을 먹는다. 알베르게 주방에 티백이 많다. 하나 골라 물을 데워 차를 내어 마신다. 흡족한 아침식사다.


아침에 길을 나선다. 마을을 지나며 공립 알베르게를 흘끗 보니 순례자 한 명이 머리를 빗는 모습이 보인다. 한 명도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사람이 있긴 있었구나. 시선을 거두고 계속 길을 이어간다. 마을은 여전히 잠들어 있는 것처럼 보인다. 


길을 나설 때에는 어둑하던 하늘도 어느 정도 몸이 데워질 만큼 걷고 나면 어슴푸레 밝아진다.

밝아온다.


어느 정도 길을 걷고 나니 길이 갈라진다. 두 갈래로 난 길, 거치게 되는 마을들이 달라서 그렇지 결국은 하나로 수렴하는 길이다. 보아하니 왼쪽으로 난 길은 도로를 따라 난 길이고 오른쪽으로 난 길은 숲도 지나고 마을도 지나는 것 같다. 나는 왼쪽 길을 택한다.

왼쪽 길을 걸으며 바라본 오른쪽 길. 길은 잘 안 보이지만 숲 사이로 순례자가 걷는 것을 보았다.

하늘에는 폭신한 질감의 터치가 가득하다. 


도로를 따라 난 길을 걷는다. 소실점을 향해 계속 직진하는 기분이 제법 괜찮다. 일요일 아침이라 그런지 지나가는 차도 별로 없고 조용하다. 순례자 하나라도 만날 법 한데 한 명도 마주치질 못했다. 아무래도 오른쪽 길을 택했거나, 아니면 내가 출발한 마을이 일반적으로 선택하는 마을이 아니어서 그랬거나. 조용히 길을 걷고 싶다면 남들이 묵지 않는 마을에서 묵고, 사람들을 만나며 조금은 다이내믹한 길을 걷고 싶다면 많이들 머무는 마을에서 묵는 것이 좋은 방법 이리라.

소실점을 향해 나란히 줄 서 있는 산티아고 조가비 표지석들.

산티아고까지 463km라니. 지금까지 내가 얼마나 걸었는지, 나는 계산 같은 건 전혀 하지 않고 걸어왔다. 그냥 당장 하루에 ㅇㅇkm씩 걸어야지~ 이 정도만 정해왔었더랬다. 이제는 대략 계산해도 1000km 정도라는 정말 먼 길을 내가 걸어왔다는 걸 알 수 있다. 기분이 이상하다. 하루하루 그냥 할 수 있을 만큼 걸었을 뿐인데 벌써 이렇게 많은 시간과 거리를 지나왔다니. 길이 끝나지 않았는데도 아쉬운 마음이 자꾸 고개를 든다.

이 아름다운 메세타.

오늘 길의 중간 지점인 카리온 데 로스 콘데스이다.


아침부터 카리온까지 나는 대략 15km를 걸었다. 시간을 보니 대충 11시가 조금 안된 시간. 당연히 더 많이 걸을 수 있는 시간이지만 고민거리가 하나 있었다. 카리온과 다음 마을인 칼사디야 드 라 쿠에사간의 거리가 17km였기 때문이다. 산티아고 순례길에 있는 마을들은 보통 5~6km 정도의 거리를 두고 있어서 중간중간 필요한 것을 채우기 좋게 되어있는다. 카리온과 칼사디야는 17km, 내 걸음으로는 대략 4시간 정도 더 걸어야 하기 때문에 적게 걷느냐 좀 많이 걷느냐를 결정해야 했다.


아직 11시가 되지 않았다. 힘차게 더 걷기를 결정한다.

카리온 마을 어귀에 있던 벽화

잠깐 들렀던 산티아고 성당. 하루 일과인 감사 인사를 드린다.


카리온에서는 운 좋게도 일요일에 연 슈퍼를 만날 수 있었다. 영업시간을 보아하니 일요일에는 오전에만 영업을 하는 모양이다. 운이 정말 좋았다! 슈퍼에는 사람들이 아주 많다. 아침 끼닛거리인 빵과 초리소 팩, 귤 한 봉지, 그리고 미제의 마약인 코카콜라도 산다. 이 정도 큰 마을이라면 분명히 공원 같은 게 있을게다. 공원을 발견하면 여기서 산 음식들로 점심을 먹어야지, 룰루랄라 콧노래가 절로 나온다.

마을을 나가던 길.


다행히도 내 예상이 들어맞았다. 카리온을 거의 다 나왔을 무렵, 어느 호텔 겸 유적이 하나 있었고 그 앞에 아래 사진과 같은 강가 공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벤치도 여러 개 있고 식수대도 있겠다, 깔끔해 보이는 벤치를 골라 점심식사를 한다. 시원한 바람 아래서의 점심식사. 상쾌하다.

점심식사를 하던 벤치에서 보이던 곳. 가족 하나가 이 곳에 놀러 왔다가 이 건물을 열심히 보고 있었다. 


오후 길을 나선다. 카리온을 나서는 길은 한참 차도를 따라가다가 다른 쪽으로 빠지면서 밭을 가로지르는 긴 길로 이어진다. 처음에는 나무도 있고 그늘도 있지만 점점 가면 갈수록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이다. 일요일인지라 사람들도 많이 보이지 않는다. 자전거 순례자 두 팀이 날 지나치며 부엔 까미노 하고 외친다. 햇빛은 점점 강렬해진다. 덥다. 점퍼를 벗고 민소매만 입고 걷는다. 어깨가 익는 느낌이다. 

하늘이 점점 짙은 푸른색을 자랑한다. 구름이 햇빛을 가릴 땐 정말 구름에게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어 지는 지경. 가끔 구름 사이로 햇볕이 비집고 나오면 다른 구름이 해를 가리는 곳까지 잰걸음으로 뛰듯이 걷기를 반복한다. 


이렇게 네 시간을 걸어야 하는 걸까! 너무 괴로운 나머지 쉴 곳만 기대하며 걷는데 도저히 쉼터 하나 보이질 않는다. 걸터앉을 바위 비슷한 것들도 보이지 않는다. 나무도 보이지 않는다. 가끔 빈 밭을 가는 트랙터와 농부가 보이긴 하지만 말이다. 덥기만 하면 문제가 아니다. 더위를 견디며 걷는 건 이제 꽤 익숙해졌는데, 가장 큰 문제는 날벌레들이었다. 날벌레떼가 사방에서 무리 지어있다. 붕붕거리며 날아다니는 벌레들, 요 말썽쟁이 벌레들은 내가 그 사이를 비켜갈 때마다 사냥거리를 발견한 양 나를 쫓아오기 바빴다. 얼굴에 자꾸 달라붙는 벌레들, 혹시라도 가방에 들어가서 내 음식들에 알이라도 깔까 봐 배낭 커버를 얼른 장착한다.


그러다 눈에 들어온 쉼터! 돌로 된 테이블과 벤치가 있어 냉큼 달려간다. 보자마자 앞뒤 가리지 않고 가방을 풀고 등을 식힌다. 아무리 가방이 잘 만들어져서 등에 바람이 잘 통한다 할지라도 가방을 메지 않는 것보단 못하다. 아 좀 살 것 같다- 하고 고개를 든 순간 보였던 건 말벌 세 마리..! 말벌 세 마리와 날벌레들이 내 가방에 꼬물대고 있었던 것.


으악 하고 아무도 없는 이 들판에서 비명을 지른다. 가방을 얼른 집어 들어 붕붕 두 바퀴 돌려 벌레들을 떨구어내고 배낭 커버와 점퍼를 들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13kg가 훌쩍 넘는 가방을 어떻게 그렇게 과자봉지 흔들듯 휘둘렀는지 지금 생각해봐도 엄청나다. 다행히 벌들은 나를 쫒아오지는 않는다. 어느 정도 벌레가 좀 보이지 않을 무렵, 쉬기를 포기하고 마을이 보일 때까지 계속 걷기로 한다. 이런 휴식이라면 취하지 않으니만 못하겠어.


뜨거운 볕 아래 보이지 않는 마을을 향해 난 길을 계속 이어간다.

그렇게 한참을 간다.

지평선이 끝난 뒤 길이 내려앉은 곳에서 나는 칼사디야에 다다랐다.

칼사디야에 도착하자 두 알베르게가 눈에 띈다. 사립 알베르게 하나와 공립 알베르게가 나란히 있었다. 그중 사립 알베르게의 주인이 나와 저렴한 가격으로 영업을 하고 있었다. 어차피 공립이랑 가격도 비슷하면 시설도 비슷비슷하겠지.. 별생각 없이 사립을 택한다. 


알베르게로 올라가 보니 정말 최저단가로 뽑은 듯한 알베르게가 있었다. 아마 이 곳도 성수기에는 사람들로 가득하겠지. 벌레 때문에 하루 종일 시달렸던 나는 얼른 씻고 쉬고 싶었다. 그렇게 순례자 일과를 마치고 빨래도 널고 나니 시간이 넉넉하다. 알베르게 뒷마당에서 과자를 아작아작 먹으며 핸드폰을 한다.


저녁시간이 되어 알베르게에서 알려준 레스토랑에서 순례자 메뉴를 먹는다. 혼자 온 순례자들끼리 합석하게 되어 미국에서 온 순례자 두 명과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다. 둘 다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는다며, 무난한 대화를 이어갔다. 평범한 식사와 평범한 와인, 무난한 대화, 평범한 후식으로 하루를 마치고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근처에 큰 도시도 없는지 하늘에는 별이 쏟아져 내릴 듯 가득하다.


잠자리에 들었지만 영 잠이 오지 않는다. 알베르게에는 신기하게도 나, 그리고 나 이외의 여자 순례자 둘 밖에 없다. 저녁시간 레스토랑에서 보았던 다른 순례자들은 전부 공립 알베르게에서 묵는 걸까. 머리 속에서 여러 가지 생각이 어지럽게 맴돈다. 눈을 감고 있지만 전혀 잠들지 못하기를 한 시간째, 다른 두 순례자가 두런두런 수다를 떠는 것이 들린다. A는 핀란드에서, B는 미국에서 왔단다. 이 두 사람은 동선이 같았는지 일주일째 계속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는 모양이었다. 


내가 후우 하고 한숨을 조그맣게 내쉬었는데 B가 내 한숨을 들었던 모양이다. 그 넓은 알베르게에서 저 구석 침대에 있었는데도 말이다. B가 무슨 일이 있는지 물어보며 내 침대로 오고, A도 마치 내 절친처럼 내 옆에 걸터앉는다. 어느 새인가 각자의 고민거리를 이야기한다. 알베르게 주인도 없는 이 조용한 알베르게에서 세 여자의 수다는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어진다.


어느새 자지 않으며 안 되는 시간이 된다. B는 나 코골이가 장난 아니니 미리 사과할게 하고 찡긋 눈인사를 하며 제자리로 돌아간다. A는 키가 너무 커서 2층 침대여야만 머리를 부딪히지 않는다며 2층으로 자리를 옮긴다. 넓은 알베르게, 서로 멀찍이 자리 잡은 침대들에서 굿 나잇 인사를 나지막이 외친다. A의 부에나스노체스~ 인사와 함께 불이 꺼졌다. 머리를 들어 본 창 밖의 하늘에는 별빛이 더욱 가득하다. 편하게 잠을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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