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 May 02. 2018

메세타를 가로질러

43.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메세타를 질러 잠든 마을에서 머물던

10월 21일 

프랑스길 Castrojeriz - Poblacion de Campos 28.5km


비빔밥 덕에 만족스러운 하루를 보냈으니 남은 기간에는 그만큼 많이 걸어야 한다. 25일에는 어떻게든 레온에서 마드리드행 기차를 타 엄마를 마중 나가야 하니까!


아직도 발 상태가 나아 보이지 않는 B 씨는 값비싼 택시를 눈물을 머금고 타고 간다. 나와 H언니, 그리고 A 씨는 함께 길을 나선다. 오늘 아침도 역시 하늘이 꾸물거리는 걸 보니 오전에는 하늘이 맑지 않을 것 같다. 해가 너무 쨍해서 온 몸이 다 익어버릴 것 같은 날씨보다는 낫지 않은가. 

카스트로헤리즈는 생각보다 긴 마을이었다. 큰 마을이라기보다는 길-다란 느낌... 걸음이 빠른 A 씨는 저만치 앞서 가고 있다. 나와 H언니는 발걸음을 맞추어 걷는다. 마을의 끄트머리에서 식수를 충분히 챙겨 길을 나선다.


오늘은 초장부터 길이 편하지가 않다. 한참 동안 오르막길을 오르다 숨이 가빠져 헉헉댄다. 이 곳에는 언덕을 넘는 길과 우회하는 길이 있는데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언덕 넘는 길을 선택한다. 뒤돌아보니 순례자 하나만 우회하는 길을 선택하고 나머지는 낑낑대며 오르막을 오르고 있다. 한창 산을 오르내릴 땐 몰랐지만 너른 평원인 메세타에서 만나는 언덕은 유난히 더 힘들게 느껴진다. 날씨도 곱지 않고 바람도 불어서 더더욱 그렇게 느낀다.

언덕을 올라 뒤돌아보니 우리가 지나온 마을이 참 조그맣게도 보인다.

사진을 아니 찍을 순 없다.


이 곳에는 순례자들이 짧게 쉴 수 있도록 쉼터가 마련되어있다. 이 곳에는 한국어 낙서도 정말 많이 만날 수 있는데, 하나같이 아귀찜이나 냉면 등등 한국음식을 그리워하는 내용들이라 참 웃겼다. 마침 H언니와도 한국 음식 이야기를 했던 차라 더더욱 그렇다.


바람이 씽씽 부는 메세타 고원을 계속 걸어간다.

지평선 저 너머에 맑은 하늘이 빼꼼 비친다.


고원의 끄트머리에는 내리막길이 이어지고 멋진 평원이 일렁이며 우리를 맞는다. 모랫빛깔의 파도가 멈춘 시간에 갇힌 것 같은 풍경. 한참 동안 카메라로 그 모습을 담는다. 카메라로는 부족하지만 말이다.

사람 마음은 다 같다. 예쁜 걸 보면 눈에도 사진에도 담고 싶어 지기 마련. 우리 앞의 순례자들 전부 사진을 찍느라 여념이 없다.

카스티야 이 레온 안의 지점들을 설명해놓은 패널. 

며칠만 걸으면 레온이다. 며칠만 있으면 엄마를 보겠지. 엄마가 보고 싶지만 엄마와 함께 올 김치도 보고 싶다.

그나저나 이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라는 지명이 자주 보이는 걸 보니, 끝이 많이 가까워진 모양이다.



점심을 먹기에는 조금 이른 오전, H언니가 기진맥진해 보여 잠깐 쉬기를 제안한다. 하지만 이곳은 나무 한 그루 만날 수 없는 메세타. 마땅히 쉴 데가 보이지 않아 그냥 길 한구석에 앉아 쉬기로 한다. 가방에 레인커버를 씌운 뒤 그 위에 앉으면 간이 의자가 따로 없다. 그렇게 가방에 앉아 언니와 초콜릿을 나누어 먹으며 주위를 둘러본다. 와, 정말 사방에 지평선이 펼쳐진다. 소실점, 지평선을 이렇게 원 없이 볼 수 있던 게 언제였더라. 아니, 내가 살면서 그런 날이 있었던가.

H언니와 잠깐 숨 돌렸던 길 한구석.

열심히 걷는 H언니와 갑자기 맑아진 하늘. 해가 쨍쨍 내리쬐니 걷기에는 조금 괴로워진다. 힘이 나지 않지만 힘을 내어 걸음을 옮긴다. 지도상으로는 프로미스타 전에 마을 하나가 있다 한다. 거기에서 점심을 먹기로 한다.


다행히 그렇게 멀리 가지 않아 마을이 하나 나오고, 바를 겸하는 알베르게라 들어가서 점심식사를 하기로 한다. 언니는 샌드위치를 싸 온 것이 있어 음료와 오렌지 하나를 사 식사를 한다. 나는 정말 정말 배가 고팠기에 큰 보까디요 하나를 주문해 먹는다. 음료는 무조건 미제의 마약 코카콜라. 친절하고 활기찬 알베르게 주인 덕에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진다. 알베르게 자체도 아늑하고 아기자기한 맛이 있다. 기회가 닿는다면 여기서 묵고 싶었지만 나는 더 많이 가야 하니까...

마을을 벗어나 나무 사이의 길을 걷기도 하고

꽤 긴 거리를 잇는 운하를 따라 걷는다. 운하를 보며 언니와 4대 강 사업 등등의 이야기도 하고. 성공적이었는지 아닌지는 몰라도 이 길을 걷는 순례자 입장에서는 꽤 기분 좋은 장치임에는 틀림없다. 차분히 흐르는 운하의 물결, 그 위에 비친 하늘을 보며 기분 좋게 걷는다. 오후가 되니 해가 더 쨍해졌지만 그만큼 나무 그늘도 많아져 다행이다. GR65를 걸으며 보았던, 우거졌던 숲길 그리고 므와삭의 운하를 떠올린다. 길을 걷고 있는데 길이 그립다.

파란 바람에 나부끼던 노란 이파리들.  

곧 프로미스타 가는 길의 명물인 카스티야 운하가 나온다.

이 곳에 다다르니 다른 순례자들도 한창 사진들을 찍고 있다. 나도 하나 담아본다.

카스티야 운하를 지나면 바로 프로미스타가 나온다. H언니와는 여기서 헤어지기로 한다. H언니는 A 씨와 B 씨가 잡아놓은 알베르게로 간다 한다. 나는 3~4km 정도만 더 가서 묵기로 한다. 하루하루 3,4km씩 더 걷는 것은 생각보다 큰일이 아니지만 이것이 쌓이고 싸이면 큰 차이를 벌릴 수 있다는 것을 나는 길을 걸으며 배웠다. 어느 일이든 그러리라. 

조금씩 더 걸어서 어떻게든 24일에 레온으로 들어갈 수 있도록, 내 머릿속에는 나름 알찬 계획이 들어차 있다.

프로미스타를 벗어날 무렵인 오후 2시는 정말 덥고 힘든 시간이다. 물론 이 시간은 웬만하면 걸으면 안 된다. 하지만 10월이라 생각보다 햇살이 괴롭지는 않았다. 이건 정말 내가 운이 좋았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프로미스타에서 멈추는 가운데 더 걷는 것은 확실히 조금은 외로운 일이다. 텅 빈 길,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차도 옆으로 난 길을 따라 걸으며 텅 빈 들판을 바라본다.


내 멋대로 만든 순례길 법칙 중 하나; 항상 최종 목적지 도착하기 전 한 시간이 가장 힘들다.


오늘도 그러했다. 최종 목적지인 포블라씨옹 데 캄포스 Poblacion de Campos 가기 전 한 시간은 정말 고역이었다. 

포블라씨옹 데 캄포스 Poblacion de Campos 마을 바로 들어가기 직전, 내가 묵으려던 알베르게가 보인다. 카미노 어플에는 포블라씨옹 데 캄포스 Poblacion de Campos 에 공립 알베르게 하나만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이 알베르게의 존재는 H언니가 알려주었다. 최근 후기를 읽어보았는데 여기가 그렇게 깨끗하고 좋다며 내게 추천해준 곳이다. 약간 기대하며 들어간다.

위 사진의 바 겸 레스토랑에서 묵을 수 있는지 묻는다. 보아하니 오늘 막 일을 시작한 것으로 보이는 서버 분이 체크인을 도와주시고, 주인으로 보이는 분이 흐뭇한 표정으로 우리를 지켜보고 있다. 그 뒤 주인분이 나를 걸어서 1분 정도 떨어진 건물로 나를 안내해주신다. 그 건물이 아래의 사진.

알베르게는 생각보다 정말 깨끗하고 그야말로 갓 지은 듯 한 느낌이었다. 아직 가시지 않은 페인트 냄새가 이를 증명하는 듯했다. 물론 시공이 완벽하고 깨끗하게 된 건 아니었지만 내가 방문했던 알베르게들 중 상위 10퍼센트 안에 들리라. 무엇보다 가장 큰 장점은 침대마다 커튼을 칠 수 있어서 알베르게들에게서는 찾기 어려운 프라이버시 보장을 받을 수 있다는 것! 그리고 내가 묵었을 때에는 세탁기도 무료로 이용할 수 있었다. 단 정식 세탁 말고 짧게 할 수 있는 간이 세탁만. 아무래도 정식 코스로 세탁하는 건 물도 전기도 많이 드니까 그러는 것 같다. 그러면 어떠하리. 손빨래보다는 낫지 아니한가!


순례자 일과를 마치고 나서도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저녁시간까지는 시간이 좀 남아있다. 소파에 앉아 책을 보다 포블라씨옹 데 캄포스 Poblacion de Campos 마을 자체를 구경을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설렁설렁 걸어 마을 한 바퀴를 구경한다.

포블라씨옹 데 캄포스 Poblacion de Campos 들어가는 곳.

내가 보았을 때 이 마을은 몇몇 상점과 공립 알베르게 말고는 잠들어있는 마을 같았다. 전부 문이 잠겨있거나 건물 자체가 비어 보였다. 약간 무서워서 얼른 알베르게로 돌아가기로 맘먹는다.

미키마우스가 무서워 보이기는 처음.

약간 무서워서 얼른 알베르게로 돌아간다.


아래 사진은 이 알베르게를 홍보하기 위한 사진들.

알베르게 이름은 Albergue La Finca

P-980, 16, 34449 Población de Campos, Palencia, 스페인

alberguelafinca.es

https://goo.gl/maps/VBGGELKbEs72

홍보하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북적이는 프로미스타같은 곳이 싫은 나 같은 사람이 조용히 머무를 곳을 찾는다면,

음식이 괜찮은 곳을 찾는다면! 

이곳은 꽤 괜찮은 선택지이다. 프로미스타에서 1시간만 더 걸으면 된다.

잘 지어놓고 홍보를 잘 못해서 사람들이 너무 없어서 안타까웠다.

이 날, 결국 이 알베르게에는 나 이외의 다른 순례자는 없었다.

아래 사진과 같이 각 칸이 있고, 커튼을 치면 된다. 그 안에 침대와 작은 선반, 그리고 조명이 있다. 그리고 계단을 올라가면 2층에서 묵을 수 있다. 나는 창문 있는 것이 좋아 2층에서 묵었다. 


적어도 내가 갔을 때에는 베드 버그는 없었다. 

남녀 화장실 둘 다 샤워 칸 2칸, 그리고 화장실 칸 1칸 이렇게 되어있다. 타일을 보아하니 시공한 지 얼마 되어 보이지 않지만 약간 대충한 것이 흠. 하지만 이 정도는 10유로짜리 알베르게에서는 평범한 것이라 생각한다. 샤워 물 나오는 것이 조금 시원찮지만.

이렇게 쉴 수 있는 곳도 있다. 책을 기부하는 책장도 있다. 

혼자 맥주 한잔 하느라고 펼쳐놓은 내 식량 주머니.

세탁기가 있다. 이용 가능하다. 작은 부엌이 있긴 한데, 조리는 하기 어렵다. 있는 음식을 데워먹을 수는 있겠다. 커피와 차가 많이 있어서 나는 알차게 이용했다.

순례자 메뉴, 숙박비 및 기타 안내들. 워싱 머신이 무료!

저녁 먹을 7시가 되어 아까 체크인했던 바 겸 알베르게로 갔다. 그 많은 사람들이 어디서 왔는지 정말 신기할 정도로 많은 사람들이 자리들을 채우고 있었다. 아무래도 퇴근하고 바에서 한 잔 하고 가는 사람들인 모양이었다. 다들 바에서 자리를 잡고 술 한잔 하느라 신나 있었다. 내가 안내받아 들어간 레스토랑 안쪽에는 아직 아무도 없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좀 늦게 저녁을 먹는 편이고, 내가 7시에 딱 맞춰 간 터라 그런 모양이었다.


아직 해가 지지 않아 햇살이 길게 드리우는 레스토랑, 테이블에 앉아 순례자 메뉴를 기다린다.

일단 식전 빵과 와인을 받는다. 아까 내 체크인을 도와주었던 신입 직원분이 친절하게 서빙해주셨다. 와인 한 병 이거 내가 다 마셔도 되나... 하고 마시는데 정말 꿀맛! 그다지 비싼 입맛이 아닌 나에게는 정말 맛있는 와인이었다. 한 병 내가 게눈 감추듯 마실 것 같다는 예감이 든다.

전식은 감자와 대구, 그리고 조개 요리. 내가 이 요리 이름을 몰라서 정말 안타까웠다. 개인적으로 익은 조개류를 정말 싫어하는데, 이건 정말 맛있게 먹었다. 이게 끝이겠지 제발... 하면서 맛있게 싹싹 비운다. 남은 국물까지 전부 빵에 찍어서.


아 만족스러운 식사였어,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그 직원이 내게 다가온다. 고기 세 덩어리, 그리고 싱싱한 샐러드와 함께. 모든 채소가 정말 싱싱해서 놀랐다. 1명밖에 안 되는 순례자 주려고 이렇게 싱싱한 채소를 써도 되는 걸까 하는 걱정이 든다. 고기는 당연히 맛있다. 감자도 감자 하나하나를 잘 썰어서 막 튀겨 나와 포슬포슬한 질감이 그대로 살아있었다. 

이 레스토랑, 본전은 뽑고 장사하는 거겠지... 하고 걱정이 들 정도로 풍족한 양과 맛을 자랑하는 식사였다.(글을 쓰는 와중에도 입에 침이 고여 괴롭다.)


설마 디저트는 대충 주겠지! 하고 고개를 들었을 때 나를 환영한 건 이 크림+꿀+호두. 이렇게 맛있는 건 반칙이야 하고 감동의 눈물에 겨워 단숨에 해치운다. 

그때 제법 덩치가 좋은 아저씨 한분이 오셔서 간단한 영어로 물어보신다. 식사가 어떻냐고. 아! 주방장님이신가 설마!? 진짜 맛있어요 하면서 그렁그렁 감동한 눈으로 대답하니 정말 기분 좋아하신다. 그러면서 어디서 왔는지, 얼마나 걸었는지, 얼마나 걸을 것인지 많이 듣고 물었던 질문을 하신다. 그리고 음식의 어떤 점들이 좋았는지, 아쉬운 점은 없었는지 물어보신다. 저는 생각보다 많이 먹지 못하는데 너무 맛있어서 다 먹고 싶은 마음과 다 못 먹는 위장이 함께 해 아쉬웠다, 이렇게 대답하니 껄껄 웃으신다. 그러면서 많이 먹고 잘 걸으라고 씩 웃으며 돌아가신다. 


만족스러운 식사 뒤 알베르게로 돌아와 책을 읽으며 시간을 보낸다. 밤이 되니 저 멀리 시끌시끌하던 레스토랑도 잠잠해지고, 사람들이 퇴근하며 차를 몰고 가는 소리도 들린다. 깊은 밤이 되어 잠에서 잠깐 깨었을 땐 이 알베르게에 혼자 있는 것이 조금 무서웠다. 천고도 높고 넓은 공간의 알베르게에 나만 덩그러니 있자니 더더욱 그러하다. 다른 순례자들도 있으면 정말 좋았을 텐데.. 하고 다시 잠에 든다.

매거진의 이전글 비빔밥 때문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