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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Apr 27. 2018

비빔밥 때문에

42.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그래, 이게 다 고추장 때문이야

10월 20일 

Hontanas - Castrojeriz 9.2km


하하

아직도 이 날을 생각하면 웃음이 비실비실 나온다. 아무리 내가 먹을 것을 좋아한다지만 먹을 것 때문에 내 계획을 바꾼 건 정말 인생에서 처음이라고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 아침부터 오늘은 뭔가 심상치 않았다.


온타나스에서 신기했던 점은 마을에서 나가는 길 가장자리에 조명이 있어서 밤에도 많이 무섭지 않았다. 오, 상당히 '친'순례자적인걸, 하며 길을 걸었더랬다. 한 시간쯤 걸었을까. 한 한국인 순례자 부부를 만나 인사도 나눈다. 어제 나를 보지 못한 걸 신기해하면서 나중에 보면 또 인사해요, 하고 지나간다. 그 후 미국에서 왔다는 사진작가 순례자도 지나친다.

그렇게 두 시간 좀 안되게 걸었을까. 마치 판타지 게임 스폿 같은 장소가 나와 놀란다. 상상력을 마구 자극하는 이 폐허를 한참 둘러본다. 도장을 준다며 조그만 기념품들을 파는 아저씨가 있지만 싱글싱글 웃어넘긴다. 하루 하나 받는 도장만 해도 이미 내 순례자 여권은 가득 찬다. 사리아부터 하루 두 개씩 받으려면 지금 미리 많이 받아두면 안 되지.

신기한 곳이다. 이것저것 상상하다 다시 길을 이어간다. 여기에서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H언니의 길동무이자 친구인 A 씨와 마주친다. 가볍게 인사를 하고 계속 길을 걷는다.

카스트로헤리즈의 명소인 언덕 위의 유적이 저 멀리 보인다. 정말 무슨 판타지 게임에서 초보 사냥꾼이 된 느낌이다. 이 마을에서 MP와 HP를 채우기로 한다.

저기 보이는 성당이 궁금해 잠깐 들러 보기로 한다.


들어가려고 보니 성당 입장료가 있다. 큰돈은 아니지만 이만한 성당은 많이들 볼 수 있는지라 (아주 배가 불렀다) 잠깐 저어했지만 그래도 오늘 성당 들러 감사 기도드리는 하루 일과도 치르지 못했고 해서 그냥 들어가기로 한다. 비도 자꾸 내려서 몸이 무겁기도 했고.


직원의 안내로 성당에 들어가 내부를 둘러본다. 

중세의 느낌이 물씬 남아있는 성상들을 본다.


중세의 작품들을 볼 때마다 나는 수 없이 스러져간 예술가들을 생각한다. 거대한 작품 안에서도 각기 작업 한 사람에 따라 다른 분위기를 가진 부분들을 볼 때마다 그들 나름대로의 개성을 가만히 본다. 수없이 많은 소위 그림쟁이, 혹은 널리고 깔린 디자인 한다는 사람 중 하나인 나를 생각한다.

이곳에서도 볼 수 있는 장미 창. 

성당 이름이 궁금해서 찍어본다.

그렇게 성당을 나선다.


이제 9km 남짓 걸었으니 오늘 목표한 바에서 3분의 1 정도 걸었다. 이상하게 몸이 쳐진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것은 둘째 치고, 왠지 몸이 너무 무거운 것이 아플 징조인가 걱정이 든다. 


이제 마을로 진입하는 길목에서 다시 A 씨를 만난다. A 씨는 H언니와 B 씨를 기다리고 있단다. 내가 이유를 물어보니 이 마을에 된장국을 먹을 수 있는 알베르게가 있단다. 한국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란다. 뭐 된장국?!!!


이때 나는 몸도 별로 좋지 않고 기분도 처져서 귀에 무언가가 잘 들어오지 않았는데 귀에 된장국이 들어온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A 씨는 그 알베르게에서 점심으로 된장국이나 라면을 먹을 수 있으면 먹고 아니면 하루 묵을 생각도 하고 있단다. 순간 흔들린다. 


가만히 생각해본다. 된장국. 그래 된장국... 그래 혹시 점심으로 먹을 수 있으면 먹고 오늘 조금만 걸을까? 된장국인데?? 우와 된장국? 이미 내 발은 A 씨를 따라 그 알베르게로 향하고 있었다. 한국음식을 입에 넣은 지 한 달 넘었다. 팜플로나에서 먹었던 라면으로는 조금 부족하다. 된장국이라니. 지금 이 단락에 내가 쓴 된장국 단어의 수보다 정확히 곱절의 된장국이 내 머릿속에 가득 차 있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해보니 한국인 주인분이 계셨다. 인사를 드리고 여쭈니 무려 저녁 메뉴가 비빔밥 고정 메뉴란다!! 아니 A 씨 된장국이라며요?! A 씨는 그전부터 된장국과 비빔밥을 함께 먹을 수 있다고 설명했는데 정신없는 나는 반을 흘려들은 것이었다. 비빔밥이 있다면 고추장을 먹을 수 있다는 이야기 아닌가. 나는 여기에서 저녁을 먹어야겠다. 가방을 내린다. 숙박비를 지불한다. 이 모든 결정은 다 비빔밥, 아니 고추장 때문이다!


잠시 뒤 B씨도 도착한다. B 씨는 교통편을 이용한 모양이다. 보아하니 발 상태가 아주 좋지 않다. 엄청 큰 물집이 발을 뒤덮고 있다. 저렇게 해서 길을 걷겠나.. 걱정이 든다. 


순례자 일과인 샤워 빨래를 마치고 빨래를 널고 있을 때 한 젊은 백인 순례자 하나가 들어온다. 등에 대문짝만 한 CANADA가 쓰여 있고 팔에는 국기가 또렷하게 그려져 있는 터라 국적을 물어볼 필요도 없다. 그는 내가 맡은 2층 침대 아래층에 자리를 잡는다. 캐나다의 소방관이라고 하는 이 젊은 순례자는 차후 엄마의 최고 애정 하는 순례자가 된다. 하하


순례자 일과를 마치고 보니 A 씨와 B 씨가 불닭볶음면과 짜파게티를 같이 끓인 것을 먹고 있었다. 나는 처음 보는 조합. 먹어보니 정말 신세계이다. 배가 너무 고파져 불닭볶음면을 하나 사 끓여 먹는다. 너무 매워 죽을 것 같다. 이렇게 매운 것을 못 먹지는 않았는데 그 사이 혀가 많이 약해진 모양이다. 그동안 강렬한 걸 그렇게도 그리워했는데 이렇게나 금방 약해지다니 신기하다.


한 구석에 있는 클래식 기타를 뚱땅거리기도 하고, 이제는 필요 없어진 미암 미암 도도를 사진 찍기도 한다. 그 사이 온 H언니와 재회의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아침에 추적추적 내리던 비가 무색하게끔 해가 반짝 뜬다. 햇살 아래에서 책을 읽으며 한가한 시간을 보낸다. 


드디어 저녁시간이다. 저녁 먹는 게 떨리는 건 정말 오랜만이다. 식당으로 가 보니 아름다운 빛깔의 비빔밥을 만날 수 있었다. 마치 멋진 사람을 만나러 가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알베르게 주인분께 부탁했던 대로 고추장도 두배로 받았다. 그 많은 밥 한 그릇을 그야말로 뚝딱 비웠다. 된장찌개는 그냥 미소된장이 아닌 한국식 된장이었다. 완벽한 저녁식사였다. 

아름답다.

영롱하다.


행복한 저녁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온다. 수다쟁이 캐나다 소방관 청년의 전화 통화를 한참 듣다가 와이파이도 잘 터지겠다 오랜만에 한국 소식도 들여다본다. 내가 몹시도 애정 하는 그룹이 어제 음악방송에서 처음 1위를 했단다. 내 최애들이 우는 걸 보며 나도 눈물 콧물을 삼켜본다. 이렇게 완벽한 날이라니. 비록 내일부터의 나는 괴로워하며 많이 걷겠지만, 오늘의 나는 진심으로 행복하다. 고추장과 비빔밥, 그리고 내 가수들의 1위라니. 빠순이 순례자의 행복한 하루가 저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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