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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Apr 25. 2018

브장송 아저씨

41.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다시 시작한 길과 상념들, 놀라운 재회

10월 19일 

프랑스길 Burgos - Hontanas 31.1km


이제는 아주 익숙하게 6시쯤 눈을 뜨고 아침식사를 한다. 대충 눈곱만 떼는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끼니를 때운다. 애석하게도 빨래들은 아직 덜 마른 상태이다. 내 대왕 스포츠 타월에 덜 마른 빨래들을 둘둘 말아 가방에 욱여넣는다. 다음 알베르게에 가서 한번 더 빨아야겠다. 어제 뗀다고 떼었던 휴지조각들이 아직도 다닥다닥 붙어있다.


길을 나서려는데 어제 계속 눈이 마주치던 여자분과 인사를 나누게 된다. 스스로를 H라고 소개했던 이 분, 날카로운 첫인상과는 다르게 아주 시원시원하고 멋진 분이다. 경계를 풀고 내 이야기를 건넨다. 요 며칠간 있었던 내 일을 이야기해주니 이 분이 더 역정을 내신다. 내가 이상한 사람이 아니었어하는 안도감, 그리고 왠지 모를 고마움이 고개를 내민다.


한동안 H언니와 길을 걷는다. 부르고스 나가는 길은 도저히 명료하게 찾을 수가 없어서 언니와 한참 길을 헤맨다. 이 사람 저 사람의 도움을 받긴 했지만 결국 헤매는 건 우리인지라, 결국 구글맵의 도움을 받아 억지로 길을 이어간다. 그래도 길동무가 있으니 외롭지는 않다. 수다를 떨며 길을 걷는데 차가 우리 옆에 멈추어서더니 창문이 내려간다. "너희 여기로 가면 안 돼~ 저쪽 너머로 가야 해!" 오지랖 넓은 동네 아저씨의 길 안내. 마침 거기에서 길이 끊기던 참이라 H 언니와 나는 강을 따라 난 길을 찾아 화살표를 만난다. 


인력, 혹은 사람을 갈아 넣는다는 표현을 들어본 적 있으실 게다. H 언니 또한 인력을 갈아넣기로 명성이 자자한 필드에서 수년간 근무하다가 어느 순간 정말 지쳐서 잠시 숨을 돌리고자 이 곳에 왔다 했다. 


나는 아직 어리고 견문이 좁다. 짧은 시간 동안 내가 만난 사람들은 대다수가 숨 가빠하고 힘들어했다. 힘들어 죽겠어요, 그래도 그냥 사는 거죠. 참 많이도 들었다. 그리고 내가 참 많이도 말했다. 물론 각자 나름대로의 숨 쉴 틈을 만들고는 있지만 그게 해결책은 아니었다. 일과 삶과 마음 이 세 가지에 적절히 무게를 배분해 가면서 사는 모습을 많이 보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살길 원하지만 조금씩 어려움을 겪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 당장 나부터 그랬고, 서점 베스트셀러 선반에서 볼 수 있는 '힐링' 책들로 비추어 볼 수 있었고. 마음을 살피고 싶은데 마음을 살필 시간이 없다. 살기 위해 일해야 하는데 일하다 죽을 것 같은 이상한 상황들.


원인은 어디에 있을까. 다수의 사람들이 문제라고 생각하고 있다면 모두가 함께 협의해서 바꾸어 볼 수는 없는 건가. 우리 이제부터는 이렇게 해 보자 하고 준비- 시작! 하는 것처럼 해볼 수 없을까. 또 생각해보면 그만큼의 다수는 그 반대편의 다수를 사회 부적응자 혹은 아직 치기 어린 무리 이렇게 보고 있어서 더 어려운 건가. 과연 10년 20년 뒤의 나는 어떤 입장에서 세상을 보고 있을까. 발에 치이는 돌멩이들을 보며 상념에 젖는다. 


조용한 마을에 알베르게 하나가 보여 달달한 초콜라떼를 한잔 하기로 한다. 언니는 길을 계속 이어간다고 하기에 인사를 한다. 알베르게에 들어가 보니 친절한 주인의 인사, 익숙한 한글이 빼곡한 메모지들이 나를 반긴다.

초콜라떼를 기다리며 메모지들을 하나하나 읽어본다. 오랜만에 한글들을 보자니 왠지 반가운 마음이 가득하다.

어쩜 사람들은 이리도 비슷한지. 힘들고 힘들다, 힘을 내서 다시 걸어가겠다, 사장님이 친절하다...  

따뜻한 초콜라떼와 서비스로 주신 쿠키 하나, 그리고 내가 다 기분이 좋아지는 금빛 성모님 펜던트. 여기를 미리 알았더라면 하루 묵었을 텐데 하고 생각한다. 그래도 이렇게 들러서 잠깐이라도 기분 좋아졌으니 이게 어디야. 당도 채웠겠다, 다시 힘차게 길을 나선다. 

왠지 아쉬운 마음에 뒤돌아 찍은 알베르게.


다시 길을 걸으니 마음이 훨씬 가벼워진다. 혹시나 만날까 걱정했던 그 아저씨도 보이지 않는다. 마주치는 사람들 전부 젠틀하게 인사를 나눈 뒤 자신의 길에 집중한다. 순례자들이다. 

너른 메세타 사이로 난 길을 자박자박 걷는다. 몹시도 큰 바람소리에 내 숨소리와 발자국 소리가 묻힌다. 바람과 나만 있는 것 같은 시간을 가로질러 앞서 가는 순례자들의 뒤를 따른다. 신기하게도 계속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게 되는 길. 이전 같았으면 심심해서라든가 혹은 내가 걸음이 빨라서라든가 하는 이유로 앞사람을 따라잡았을 터였다. 이제는 혼자 있고 싶다면 적당히 거리를 유지하며 걷는다. 

레스토랑에 들르느라 먼저 보냈던 H 언니를 다시 만났다. 언니는 컨디션이 그다지 좋아 보이지 않는다. 걱정하지 말라고 하지만 걱정되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언니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길을 이어간다.

집 근처 공원을 떠올리게 하던 나무.

점심시간이 조금 지났을까. 웬 앰뷸런스 하나가 나타나서 이게 무슨 일인가 싶었는데 군용 차량 서너 대가 오는 바람에 순례자들이 길을 비킨다. 곧이어 행군하는 군인들을 만날 수 있었다. 순례자들은 그들이 신기하고 그들도 순례자들이 신기하다. 순례자들을 하나하나 보며 살짝 인사하기도 하고, 근엄한 표정으로 폼을 잡으며 걷기도 한다. 전체적인 대열은 왠지 동네 뒷산 산책 가는 것 같은 분위기. 그들의 뒤꽁무니를 사진으로 남겨 본다.

그렇게 무념무상으로 길을 걷고 있을 때였다. 도랑 비슷한 것을 지나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왠지 익숙한 목소리가 들린다. 그것도 한 음절.


"킴!"


아 설마. 설마 했다. 

뒤돌아보니 프랑스 생콤 돌트에서부터 콩크까지 함께 걸었던 브장송 아저씨가 정말 똑같은 모습으로 거기에 서 있었다. 맙소사. 거의 한 달만의 만남이다.

잘 지냈어 킴? 우와 무슈 어떻게 여기 계세요? 그러는 너야말로 어떻게 여기 있어? 서로 너무 놀라서 어이없는 웃음을 터뜨리고 만다. 여전히 말이 많지 않은 브장송 아저씨는 정말 표정 변화 하나 없이 말한다. 만나서 반갑네. 봉 슈망.


걸음이 빠른 브장송 아저씨는 눈 깜빡할 사이 저만치 앞서간다. 이게 얼마 만에 듣는 봉 슈망인지! 반가움에 광대가 한껏 올라간다. 나도 성큼성큼 발걸음을 옮긴다.

계속 이어가는 길.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 보들보들할 것 같은 구름 결.

저 앞의 브장송 아저씨를 열심히 따라가 본다. 오늘의 목적지인 온타나스가 얼마 남지 않았다. 

온타나스는 너른 메세타 평원의 한 복판에 뜬금없이 폭 내려앉아있다. 마을에 들어가니 몇 개의 알베르게가 손님들을 맞는다. 왠지 공립 알베르게는 조금 꺼려져서 마을 중간에 있는 사립 알베르게에 들어간다. 이 근처 알베르게들은 저렴한 가격으로 손님을 끄는 것이 특징인 것 같다. 9.50유로로 순례자 메뉴를 먹을 수 있다는 말에 끌려 들어간다. 무엇보다도 마을 중간 쪽에 청소년들이 바글바글하다. 단체로 순례를 온 모양이다. 왠지 이 알베르게에는 저 청소년들이 묵을 것 같지 않아서 선택한 것도 크다. 어디에 가면 좋을지 고민하고 있던 브장송 아저씨도 나를 따라 들어온다. 아저씨도 시끄러운 걸 피하고 싶었겠지. 아저씨는 프랑스에서 그랬던 것처럼 도착하자마자 맥주 한 잔을 시켜 바에 자리를 잡으신다. 나는 피곤하니까 숙소로 직행한다.


저 학생 무리만은 피하자! 비슷한 생각들을 많이 했는지 벌써 이 알베르게에 순례자들이 가득하다. 다행히 나쁘지 않은 자리에 배정을 받았다. 하지만 안에 들어가 보니 볕이 잘 들지 않고 왠지 퀴퀴한 냄새가 나는 듯 해 불안감이 든다. 프랑스에서 사놓고 막상 프랑스에서는 별로 쓰지 않았던 베드 버그 퇴치제를 스페인에서 다 쓸 것 같다. 침대 매트리스 뒤집어가며 꼼꼼하게 다 뿌린 다음 침낭도 펼쳐 다시 꼼꼼하게 뿌린다. 절대 물리고 싶지 않아 베드 버그...!


어제 세탁기를 잘못 돌려 처치곤란이 된, 휴지 조각 투성이인 내 빨래들과 새로 빨 것들을 열심히 손빨래한다. 이 마을은 바람이 세차게 분다. 해는 나지 않았지만 왠지 빨래가 잘 마를 것 같다. 이 곳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빨래집게가 많이 없었다는 것. 프랑스에서는 지트 주인들이 넘치게 제공해주곤 했는데 스페인으로 넘어오니 약간 아쉽다. 


순례자 일과를 마치고 맥주를 한 잔 한다. H 언니와 함께 다니던 A 씨가 이 알베르게 바에서 한 잔 하고 있었다. H언니와 B 씨는 뒤쪽 마을에 있는 모양이었다. 맥주를 다 비운 뒤 마을을 한 바퀴 돈다. 다른 순례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을 귀동냥 하기를, 이 마을은 30분 만에 다 돌아볼 수 있다 하였다. 30분은 무슨. 10분이면 되는 작은 마을이다.

재건축을 위해 열심히 성금을 모으고 있던 성당. 각 국가별 성서를 읽어볼 수 있게 조성해둔 기억이 난다. 

성당의 모습.

저 멀리 보이는 내가 묵었던 알베르게.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순례자 메뉴를 먹기로 한다. 나는 한 노부부가 앉은 테이블에 자리 잡는다. 그때 브장송 아저씨가 들어와 두리번거리다 다른 테이블이 정말 시끌벅적한 것을 눈치채고 내가 앉은 테이블로 온다. 앉아도 되겠니? 그럼요!


저녁 메뉴를 보는데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그리고 한국어가 있는 것에 굉장히 놀란다! 그만큼 한국인이 정말 많이 오는구나, 하고 놀란다. 내가 신나서 사진을 찍으니 직원이 안뇽하세요오 하며 인사한다. 와.. 진짜 많이 오는 모양이구나. 

아저씨는 그동안의 내 근황이 궁금했던 모양이다. 나도 꽤 궁금했다. 

"아저씨 걸음 빨라서 저보다 훨씬 먼저 갔을 줄 알았어요." "너야말로 걸음이 빨라서 나보다 훨씬 먼저 갔을 줄 알았어. 잘 걷고 있었니 킴." "아뇨 아저씨 저 중간에 다리도 접질리고 난리도 아니었어요. 솔직히 저 로그로뇨에서 빌바오 들러 여기 올 때 버스 탔어요. 치팅했어요." "아 뭐. 난 생쟝에서 이틀 쉬었어. 그 뒤로 그냥 쭈욱 걸어왔지 뭐. 알다시피 콩크에서 하루 더 머무르기도 했고. 걸을 땐 좀 많이 걸었고..." "여하튼 진짜 미스터리 하네요..." 블라블라...


이렇게 수다를 떨고 있으니 같은 테이블의 노부부가 신기한 듯 한참을 듣는다. 그러면서 어디에서부터 길을 시작했는지 묻는다. 브장송 아저씨는 프랑스 브장송부터, 나는 프랑스 르 퓌 엉 벨레부터. 어딘지 잘 모르시길래 지도를 보여드리니 눈이 똥그래진다. 당신들은 그저께 부르고스에서부터 걸어 여기 오는데 이틀이 걸렸단다. 그런데 나와 브장송 아저씨는 브장송부터 여기까지 30km를 하루 만에 걸어냈다며, 몹시도 부러워하신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나오는 이야기들. 할머니 할아버지는 필라델피아에서 오셨단다. (필라델피아 크림치즈 하고 이 두 분을 외웠다는 건 안 비밀...) 당신들은 언젠가 순례길 걷는 게 꿈이었는데 차일피일 미루셨단다. 그러다 할아버지에게 갑자기 심장마비가 찾아왔고, 한동안 의식이 없다가 하늘이 도와서 의식을 찾으셨단다. 그 후유증으로 걷는 것이 불편해지셨다고. 의식을 찾고 걸음을 옮길 수 있게 되자 할아버지가 할머니께 말하셨단다. 순례길을 걸으러 가자. 그렇게 비행기표를 끊고 오셨단다. 한걸음 한걸음이 힘들지만 그렇게 마음이 충만할 수가 없으시단다. 산티아고까지 갈 수 있을지는 잘 모르겠지만 걸을 수 있는 데 까지 걸어보겠다며 웃으신다.


조금 가라앉은 테이블의 분위기를 할머니가 눈치채시고는 밝게 말씀하신다. 얼마나 멋진 일이에요! 이 넓은 세상에서 각자 다른 이야기로 같은 곳에서 만나서 이렇게 식사를 하고 있다니! 정말 청춘드라마 같은 대사라 오글거릴 법도 한데 왠지 더 마음이 숙연해진다. 건강하게 걸어온 내 몸과 나의 운과 이런 시간을 가질 수 있는 기회에 감사하게 되는 시간.


그럭저럭 먹을 만했던 메뉴와 나름 괜찮았던 와인, 자잘한 수다들과 항상 세계인의 관심을 받을 수 있는 북한 이야기 등등으로 저녁 식사 시간을 채웠다. 식사를 마치고 나니 벌써 바깥은 어둑하다. 차갑게 마른 빨래를 걷어와 정리해 내일 짐을 들쳐 메고 나갈 수 있게 준비한다. 


약간 소란스러운 분위기의 알베르게. 아직 저녁식사가 끝나지 않은 사람들의 소란스러움을 배경음악 삼아 잠에 든다. 코를 찌르는 베드 버그 퇴치제의 냄새에 괴로워하며 생각한다. 내일부터는 좀 덜 뿌려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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