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빌바오를 떠나 부르고스로
10월 18일
Bilbao >> Burgos
다시 순례자로 돌아가는 날.
오늘 꽤 이른 아침에 부르고스행 버스표를 예약해두었었다. 조식을 정말 10분 만에 먹고 바로 출발해야 한다. 나는 짠순이 순례자니까 꼭 조식을 먹고 가야지! 하고 결심했던 터였다. 새벽부터 일어나 씻고 짐을 다 싸 둔 다음 7시 조식 시간을 기다린다.
내가 이른 시간부터 분주하게 준비하며 조식을 기다리고 있으니 직원이 왠지 불안했는지 덩달아 빨리 준비를 해 준다. 덕분에 아침식사는 무사히 마치고 출발할 수 있었으나... 급한 마음이었던 나. 시리얼을 담은 그릇에 우유를 담으려고 하는데 손이 엇나가 그릇을 엎고 만다. 촤-아!
그 순간 나 이외에 조식을 먹으러 온 아저씨 둘, 갑자기 멈춘다. 도와줘야 하나 하고 눈알을 데굴데굴 굴리는 아저씨들. 순간 기지를 발휘해 나는 구석에 세워져 있던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가져와 얼른 쓸고 약간 엎어진 우유도 냅킨으로 쓱쓱 닦고 모른 척 다시 시리얼을 담는다. 그 순간 어찌나 등골이 서늘했던지. 부끄러워 죽겠다.
이른 아침의 빌바오 버스정류장으로 향하는 길. 출근하는 사람들도 많고 차들도 밀린다. 아침 8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아직 해가 뜨지 않았다. 하늘에는 두꺼운 구름이 끼어있고 굵은 빗방울이 가끔씩 투둑 하고 떨어진다. 곧 비가 오려나. 봉변당하기 전에 내달려 버스를 타러 간다. 어 이상하다. 부르고스행 버스가 잘 보이지 않는다. 혹시나 해서 남쪽으로 가는 버스로 보이는 것들을 보니, 마드리드행 버스 경유지들에 부르고스가 적혀있는 것을 발견한다. 기사님에게 이 버스가 맞냐고 여쭈니 맞다시면서 내 가방을 트렁크에 실어주신다. 한숨 돌리고 버스를 탄다. 출발할 시간이 되었는데도 버스가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아서 주위를 두리번 거리니 저 멀리서 커플 하나가 열심히 달려오고 있다. 사람 좋은 기사님은 그 커플을 태우고 출발하신다.
새삼 느낀 것. 스페인 내 버스들, 특히 알사버스는 시설이 좋다. 한국에서 고속버스를 타 본 적이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알사버스들은 와이파이도 되고 현재 위치도 계속 모니터로 보여주어서 꽤 편하게 이용할 수 있었다. 굵은 빗방울들이 더 잦아져 한차례 비가 지나가고, 부르고스에 닿을 때쯤 빗방울들이 가늘어진다.
부르고스의 공립 알베르게는 아직 열지 않았다. 알베르게 앞의 바에서 순례자들이 옹기종기 모여 문을 열기를 기다린다. 이미 사람들은 서로 너무 잘 알고 있는 사이. 다들 인사를 나누며 자리를 잡는다. 그 사이에 끼어있는 나는 마치 이방인같이 느껴진다.
친구의 추천으로 모르시야를 먹는다. 큼직한 모르시야와 빵, 그리고 맥주를 먹기로 한다. 생각보다 너무 맛있어서 정말 놀란다. 이건 내가 정말 사랑하는 전주 피순대의 맛과 같다..!!! 눈 깜짝할 사이에 해치우고 나니 이렇게 아쉬울 수가 없다. 안 되겠다. 저녁에도 피순대, 아 아니, 모르시야를 먹겠다 결심한다.
알베르게가 열리기 전에 먼저 장을 봐 오기로 맘먹는다. 구글맵으로 검색해 보니 바로 근처에는 슈퍼가 없고 걸어서 좀 가면 디아가 있다. 비가 후드득 떨어지고 있지만 바람막이 모자를 뒤집어쓰고 빠른 걸음으로 디아에 도착한다. 오랜만에 고기를 구워 먹고 싶어져서 한 덩어리 포장된 것을 산다. 샐러드 할 것들도 사고, 내일 먹을 빵과 초콜릿 같은 단 것도 산다.
드디어 호스피탈레라 아주머니께서 알베르게 문을 연다. 사람들이 기다렸다는 듯 문으로 내달려 긴 줄을 만든다. 눈 깜짝할 사이에 나도 밀려나 사람들 사이에 끼인다. 단체 순례자들이 자연스러운 새치기를 이어가는 바람에 내 순서는 한참 뒤가 되었지만 강력한 아주머니 아저씨들을 이길 자신이 없다.
배정된 곳은 2층 침대. 아무래도 혼자 왔고 순례자 중에는 어리다 보니 항상 2층을 배정받게 되는 것 같다. 자리 정리를 마치고 순례자 일과를 치른다.
그렇게 고딕 양식의 정수, 부르고스 대성당을 보러 간다.
유럽 여행은 어떻게 보면 박물관&성당 투어라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유럽에는 많은 성당이 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성당, 건축사적으로 중요한 성당 등등 많은 성당을 보고 정말 큰 성당도 많이 보았지만 지금까지 내 안의 베스트는 부르고스 대성당이 아닐까 한다. 계속 순례와 성당 관람을 섞어서 하다가 오랜만에 오롯이 성당을 보았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 곳을 찾았을 때의 내 마음이 더 스펀지같이 쭉쭉 흡수할 수 있는 상태였기 때문일까.
사진으로는 다 담을 수 없는 반짝이는 시간들을 마음에 새긴다.
표정 하나하나가 인상적이었던 입상들.
스테인드 글라스 너머로 보이는 부르고스 대성당의 일부.
성당 관람을 마치고 나오는 길, 출구 쪽에 이 성당을 작게 만들어놓은 모형이 있다. 한 눈에는 담기 어려웠던 구조를 살필 수 있다.
오랜만에 빨래를 다 돌려볼까 하고 맘먹는다. 가지고 있던 옷가지에서 당장 입을 것을 제외한 옷가지 전부를 챙겨 세탁기가 있는 곳으로 간다. 세제는 자판기에서 뽑아 넣고 돌리고 나는 저녁 먹을 곳들을 둘러본다. 영 요리를 하기에는 적합하지 않은 알베르게이다. 그렇게 주방을 둘러보고 있는데 한국인 젊은 청년 둘과 내 또래로 보이는 여자분 한분이 자꾸 보인다. 머뭇거리다 인사는 나누지 못했다. 왠지 낯선 기분이 들었기 때문.
내 침대가 있는 위층으로 올라가 이불을 정리하고 책을 읽다 보니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 모른다. 빨래를 돌렸다는 사실 자체를 까먹고 있었다. 한참 후에야 내려가 보니 내 빨래들은 따로 나와 있었다. 오, 다행히 없어진 것은 없다. 옷더미를 살피고 있는데 뒤에서 다른 순례자가 자신 것들을 돌리기 위해 따로 빼놓았다고 양해를 구한다. 꺼내 줘서 고마워, 인사한 뒤 빨래를 살피는데 아주 난리도 아니다. 바보같이 주머니에 휴지를 넣고 돌려서 휴지가 잘게 조각 나 옷에 온통 붙어있다. 으... 속상해. 어쩔 수 없다. 하늘은 꾸물거리지만 일단 빨래를 널어본다.
아까 살펴본 알베르게의 식당은 도저히 요리를 할 수 없어 보인다. 무엇보다도 인덕션 같은 것이 보이지 않는다. 또 모르시야를 먹어야지. 알베르게를 나서 부르고스 시내를 구경한다.
트립어드바이저 별점이 괜찮은 곳들을 찾아보다 눈에 들어온 바에 들어간다. 별다른 이유는 없었다. 가장 이른 시간에 열기 때문이었다. 메뉴판을 살피고 익숙한 단어인 모르시야를 콕 찍어 이것을 달라고 한다. 작게 타파스로 원하냐고 묻길래 요리로 달라고 요청한다. 바 주인이 이것만 먹어도 되냐고 묻길래 이걸 먹으러 왔다고 답한다.
따끈따끈한 모르시야, 그리고 생맥주 큰 잔 하나.
나는 지금 세상에서 한 다섯 번째쯤 행복한 사람.
사진을 보니 다시 모르시야가 그립다.
혼자 바에서 식사를 하다 보면 주위 사람들이 눈에 잘 들어오기 마련이다. 스페인 음식이 맞지 않는지 아니면 배가 너무 불러서 다 못 먹었는지 음식을 거의 절반은 남긴 영어 사용자 부부. 타파스 하나와 맥주 한 잔을 시켜 한참 동안 저녁 시간을 누리고 돌아가던 맹인 신사분. 세상에서 제일 신나 보이는 젊은 순례자 무리들. 그들을 바라보며 고소한 생맥주를 한입 한입 마신다.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간다. 좋은 식사였나요? 네! 하고 대답하고 돌아섰지만 왠지 모를 쓸쓸한 감정이 가득하다. 하루 종일 꾸물거리는 날씨 탓이리라.
알베르게 뒤편 마당에는 이런 동상이 하나 있다. 순례자라면 빙긋 웃음이 새어 나올 만한 모습. 물론 나의 모습이기도 했다.
침대로 돌아와 보내 아래 칸에 아저씨 한 분이 근육을 풀고 계신다. 이 분도 르퓌에서 시작했단다. 다만 이 분은 자전거로 순례하고 있었어서 나보다 훨씬 단기간에 이 곳에 도착했다. 자신은 한 일주일 정도면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 같다고 한다. 한참 동안 GR65길에서 좋았던 도시들 이야기를 한다. 벌써 깜빡거리고 있는 기억들이 다시 살아나 기분이 좋아진다.
오늘은 날씨가 좋지 않고 습도도 높은지라 빨래가 아직 축축하다. 침대 사방에 빨래를 널어 말리려는데 먼지가 너무 많아서 괴롭다. 이 먼지들 다 내 콧구멍으로 들어가는 건가... 번뇌하며 침대에 눕는다.
오늘은 영 아니야. 일찍 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