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걷던 길을 벗어나 관광객으로 변신하다
10월 17일
프랑스길 Viana - Logrono 9.5km > Bilbao
오늘은 빌바오로 도피하기로 결심한 날. 프랑스길의 도시들 중 빌바오와 가깝고 또 빌바오행 버스를 탈 수 있는 곳들은 로그로뇨, 부르고스이다. 나는 내가 어제오늘 묵었던 비아나에서 두 시간 반 정도 걸으면 도착하는 로그로뇨에서 버스를 타기로 마음먹는다.
아침에 일어나 조식을 먹고 있는데 F아저씨가 또 새벽같이 출발한다. 매일 새벽 6시 무렵이면 길을 나선다고 하시더니. 내가 인사를 건네도 본체만체 시다. 뭐, 아저씨도 내가 고분고분한 어린 여자애가 아니었어서 짜증 나셨겠지. 바게트를 질겅이며 그분이 나가시는 걸 본다.
벨기에 아가씨가 일어나서 같이 아침식사를 이어가는데 갑자기 문을 쿵쿵쿵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이 친구가 밖에 나가보니 아저씨 두고 가신 게 있나 보다. 왜 문이 닫혀있냐고 화를 내시더니 짐을 챙겨서 슝 가버리신다. 아무래도 아침에는 알베르게 관리자가 없어서 안에서 열 경우에는 잘 열리지만 밖에서 열 경우에는 잠기도록 되어있는 모양이었다. 음... 그래도 문 열어준 친구에게 감사인사는 하시지...
나도 비아나를 떠나 로그로뇨로 향한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로 향하는 버스가 내 앞을 지나치는 것 같지만 신경을 끄기로 한다. 어찌 됐건 로그로뇨까지는 걸어갈 거야.
마을을 빠져나가는 길
로그로뇨로 발걸음을 옮긴다.
로그로뇨로 가는 길. 수확이 끝난 너른 밭이 텅 비어 있다. 그 사이를 가로지르는 길을 걷는다. 해가 떠오르기 시작하는 시간.
대도시로 들어가는 길. 스페인에서는 꽤 자주 이렇게 조성된 육교를 건너곤 했다.
대도시로 향하는 길은 언제나 힘들다. 위성도시도 크고, 헛된 희망처럼 그 도시의 팻말이 사방에 걸려있어서 마치 그 도시에 도착한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이다. 로그로뇨 근처 마을에는 도장을 찍을 수 있게 해 둔 곳도 많다. 어느 노인이 조악한 기념품들을 팔며 무료 도장을 찍고 가라고 순례자들을 부르기도 한다.
로그로뇨 들어가기 전 주차장으로 추정되는 너른 공터도 지나간다. 한 가족이 모두 검은 정장 차림으로 지나가는 것을 본다. 아무래도 근처에 공동묘지 같은 게 있는 걸까.
로그로뇨 시내로 들어가는 다리를 건너기 바로 직전, 한국인 아저씨 F를 다시 만났다. 나보다 한 시간은 먼저 출발하셔서 다시는 못 만날 줄 알았는데 이렇게 금방 만날 줄이야. 얼굴을 정면으로 보고 안녕하세요 하고 인사했는데도 본체만 체 하셔서 인사하기를 그만둔다.
도시로 들어왔더니 확실히 분위기가 달라졌다. 로그로뇨는 붉은 도시이다.
가게들이 열지 않은 이른 오전에도 관광을 나온 사람들도 꽤 많다.
로그로뇨 성당 앞에서 사진을 하나 남겨본다.
로그로뇨 대성당에서 신기했던 것. 성당 직원처럼 보이는 이가 문을 열어주면서 어서 오라고 밝게 인사를 한다. 알고 보니 구걸하는 길거리 거주민(?). 거지라고 하기에는 너무 멀끔하셔서 나름 고심한 직업명이다.
성당을 한번 둘러보고 버스터미널로 간다. 미리 버스 시간표를 알아봐 두었기 때문에 오늘은 여유가 좀 있다. 버스터미널로 가는 도중 디아에 들러 버스 안에서 먹을 점심 겸 간식도 산다. 대도시라 그런지 가게들이 엄청 많고 사람들이 전부 분주하다.
광장 근처에는 책을 저렴하게 파는 곳도 있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선전물도 정말 저렴한 가격, 2~3유로 정도에 팔고 있었는데 사고 싶어서 가슴이 두근거리는 걸 참느라 혼났다. 역사를 빠삭하게 알고 있는 건 아니지만 1, 2차 세계대전 역사에 굉장히 관심이 많은 나로서는 팜플로나의 라면만큼이나 깊은 유혹이었다.
나는 로그로뇨 버스정류장에서 12시 30분 차를 타고 빌바오로 향했다. 가격은 10유로. 밖에서 보면 이게 버스정류장인가 싶을 정도로 헷갈리게 생겼는데, 혹시나 몰라 사진을 남겨 본다. 심지어 나는 구글맵이 시키는 대로 갔더니 후문으로 간지라 더 당황했었다.
정말 오랜만에 버스를 타니 심장이 두근댄다. 내가 순례자로 보였는지 아주머니 한 명이 나에게 말을 거신다. 빌바오로 놀러 가냐고. 네 잠깐 빌바오 가요. 씩 웃으시면서 아주머니는 내 등 쪽에서 도깨비바늘 같은 것을 똑 떼어 주신다. 헤헷 감사합니다.
버스에 타고 한참 동안 창밖을 본다. 평지가 계속 나오다 어느 순간부터 산세가 험해진다. 서울에서 강원도로 가는 버스 안에 탄 것 같은 느낌이다. 산맥이 깊어지고 높아지며, 지평선이 산에 가려 보이지 않는 시간이 얼마간 지난 뒤 저 멀리 은하같이 퍼져있는, 몹시 큰 도시가 보인다. 빌바오다.
빌바오에 도착해 바로 부르고스행 버스를 예약한다. 엄마와 마드리드에서 만나기로 약속한 날인 25일이 거의 임박했다. 내일모레부터 부르고스에서 걷기 시작하면 정말 딱 24일에 레온에 입성할 수 있을 것 같다는 계산을 어제 마무리 한 참이었다. 부르고스로 가는 버스는 선택지가 많다. 적당한 시간의 것을 하나 골라 표를 뽑는다. 버스표 판매기가 잘 되어있는데 제대로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많은지 도우미 직원이 한 분 계신다. 내가 표를 계산하고 있는데 뭔가 도와줄까? 하고 다가오셨다. 계산을 마친 것을 보시더니 엄지를 척 치켜세워주신다.
빌바오에 예약한 숙소는 버스터미널에서 걸어서 10분 거리의 게스트하우스. 걸어서 버스터미널과 구겐하임을 아우를 수 있는 위치에 저렴한 가격이 맘에 들어 선정했더란다. 들어가 보니 직원도 적절하게 친절하고 시설도 그럭저럭 무난하다. 시설은 알베르게 평균치의 퀄리티.
옆방 멤버를 보아하니 동유럽 쪽에서 온 듯한 젊은 여학생들 네댓과 어느 나라인지 추측할 수 없는 남학생 네댓. 내가 묵은 방 멤버들은 다들 조용하고 심지어 내 바로 옆 침대와 아래층 침대는 나이를 꽤 드신 분들이라 한층 더 조용했는데, 옆방이 아주 파티를 하는 것처럼 난리도 아니다. 오늘 잠은 다 잤다.
짐을 정리해두고 게스트하우스 직원에게 핀쵸스 바를 두어 군데 추천받는다. 그녀는 하루 안에 최대한 빌바오를 압축적으로 볼 수 있는 코스를 알려주었는데, 나는 이 하루를 통째로 구겐하임 미술관에 쏟아부을 것이라 그다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대신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이 게스트하우스로 돌아오는 길, 빌바오를 따라 흐르는 강 Ria del nervion o de bilbao 에 건설된 각자의 조형미를 뽐내는 다리를 꼭 보며 오라 추천하는 것을 머릿속에 새겨둔다.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가는 길.
공원에서 사람들이 휴식하는 모습도 보고. 완연한 관광객이 되어 빌바오를 거닌다.
붉은 도시였던 로그로뇨와는 사뭇 다른 느낌의 빌바오. 건축가들이 새로운 시도를 많이 해 본 결과물들을 이곳저곳에서 만날 수 있었다.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처음 알게 된 건 허니와 클로버라는 만화 덕분이다. 그 만화에 등장하는 인물 중 건축가였던 부부가 나누는 대화가 있다. 아름다운 미술작품들을 다 감싸 안는 미술관. 그래서 나는 빌바오의 구겐하임이 그렇게 궁금했다. 빌바오라는 도시가 한국에 사는 우리에게는 접근성이 그다지 좋지 않은 도시라는 이유도 크겠다. 산티아고 순례길이 스페인 북부를 쭉 걸어가는 길이라는 걸 알고는 제일 먼저 든 생각이 "오 그럼 빌바오 근처도 지나가려나!?"였으니까 말이다.
한때는 철강 산업의 중심이었으나 그 영광이 스러진 후, 구겐하임 미술관을 계기로 문화의 도시로 재탄생한 빌바오. 그 심폐소생의 주역인 빌바오 구겐하임 미술관이 정말 궁금했다.
그래, 저 멀리 구겐하임이 보인다.
현대 미술 수업을 들은 사람이라면 지긋지긋하게 보았을 이 꽃 개. 제프 쿤스의 강아지는 마치 교과서의 한 장면처럼 그곳에 그렇게 있었다. 눈으로 보고 있지만 뭔가 비현실적인 기분이 든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들어가기 전 광장에서 나는 순례자 무리를 만난다. 북쪽길은 이 빌바오를 지난다 들었다. 그들은 꽤 피곤한 얼굴이지만 정말 밝은 표정으로 구겐하임 미술관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순례길을 걸으며 계속 오래된 유적만 만나왔는데, 순례길을 걷다가 이런 도시를 만나면 어떤 기분일까. 팜플로나도 로그로뇨도 정말 대도시같이 느꼈는데 이곳은 오죽할까. 언젠간 북쪽길? 이런 시답잖은 생각을 하며 구겐하임 미술관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입장하자마자 보이는 뷰. 그래, 이렇게 생겼구나.
바르셀로나 사그라다 파밀리아에 처음 들어갔을 때의 전율과 비슷한 것을 느낀다. 조금 다르다면 사그라다 파밀리아에서는 성당 내부 디자인 자체에 감탄했지만 여기에서는 이 곳의 공간 구성들에 감탄했다고 해야하나.
너무 유명해서 또 있네 이런 생각을 할 만한 대가이겠다. 살아있는 키치의 제왕 제프 쿤스의 작품.
무심코 고개를 들었는데 이런 뷰가 보인다.
높은 곳은 무섭지만 다른 시선은 좋아.
차곡차곡 구성되어있던 건물 어느 구석의 모습.
창 밖으로 루이스 부르주아의 마망이. 리움을 다녀오신 이라면 익숙하리라.
홀을 중심으로 전시관들을 이어주는 다리들이 있다. 그 위를 거닐어본다.
오가는 사람들.
하루의 절반을 구겐하임에 쏟아붓고 나왔다. 어땠냐고 물으신다면....
기회가 생긴다면 꼭 가보시길.
이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겠다. 말을 아끼고 싶은 곳이다.
상설전들도 좋았다. 오래간만에 뇌를 일깨우는 느낌이다.
낮에 들어갔는데 나와보니 저녁시간이 다 되어간다. 시간이 순간 삭제된다면 이런 느낌 이리라. 오늘은 워낙 날이 흐려서 대낮이나 저녁이나 비슷하다. 서쪽 하늘만 조금 붉게 물든, 꾸물꾸물한 회색의 날씨이다. 미술관 바깥에서 한번 빙 둘러본다.
구겐하임 미술관을 뒤로하고 게스트하우스로 돌아간다. 게스트하우스 직원이 추천해준 대로 강을 따라 걷는데 굵은 빗방울이 하나둘씩 떨어지기 시작한다. 거슬릴만한 양은 아니다. 등산 점퍼가 아직은 방수 기능을 잃지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강을 따라 걸으며 제각기 다른 디자인을 뽐내고 있는 다리들을 본다. 그리고 유난히 깔끔한 이 빌바오의 건물들을 본다. 같은 스페인이어도 어쩜 도시마다 분위기가 이리도 다른지.
비의 양이 예사롭지 않다. 유럽에서는 비가 내려도 우산을 쓰는 이는 거의 보지 못했는데 사람들이 드문드문 우산을 꺼내기 시작한다. 이내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에너지가 남으면 더 보려고 했던 카탈루냐 미술관에서 잠깐 비를 피한다. 매정한 하늘은 비를 그치게 할 생각이 없어 뵌다.
게스트하우스는 정말 시끄럽다. 사람도 더 많아졌다. 샤워를 마치고 내일 바로 나갈 수 있게 짐까지 꽁꽁 싸 둔다. 여기다 자고 일어난 뒤 침낭만 말아 넣으면 완벽하다.
우산을 사기는 싫어서 그냥 점퍼를 뒤집어쓰고 근처 바를 향해 달려간다. 그곳에서 핀초스 몇 접시를 먹고 나니 몹시도 배부르다. 시간은 아직 7시. 이들에게는 많이 이른 시간 이리라. 단골로 보이는 이들이 들어와 핀초스와 맥주를 한다. 퇴근길에 핀초스 두어 개에 맥주 하나 하는 모양이다. 맥주를 석 잔 정도 비우니 기분이 좋아진다.
이제 관광객 모드를 종료한다.
도망치듯 오게 된 빌바오에서 나쁜 기운을 싹 씻을 수 있었다.
내일은 부르고스로 가서 다시 순례자의 리듬을 찾아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