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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16. 2018

피차 외로운데 나랑 한잔 하지?

38.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대환장 망언 파티, 민폐 아저씨

글을 시작하기 전 말씀드립니다. 

제가 겪은 일은 아주 개인적인 사례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런 것은 아닙니다. 순례길에는 정말 자신의 길을 찾기 위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다만 이 사람은 이런 사람도 만나고 이런 일도 겪었구나 하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10월 16일 

프랑스길  Villamayor de Monjardín - Viana 29.6km



무난한 아침이다. 내가 오늘 겪을 가시 돋친 일들은 예상치도 못했지만.

가지고 있던 것들로 아침을 때운다. 알베르게에서 아침용으로 몇 가지 파는데 좀 비싼 감이 있어서 굳이 그걸 사지 않고 어제 슈퍼에 가서 사과나 바게트를 사 두었었다. 아침식사를 하며 퀘벡에서 왔다는 할머니와 인사를 나누고, 이제는 둥글넓적 가방을 버린 안타까운 스코티쉬 청년과도 이야기를 나눈다.


오늘도 날씨가 그렇게 상쾌하진 않다. 비바람이 몰아치는 것 보다야 낫지 않은가. 어둠이 조금씩 가실 때 길을 나선다.

너무 낡아버린 GR65 마크를 만난다.

마을을 뒤로하고 안개가 내려앉은 길을 나선다.

저 앞의 순례자와 계속 일정한 거리를 두고 걸어간다.

이 들판에서 나는 한국인 아저씨 F를 만난다. 이전부터 C언니가 F아저씨가 나에게 궁금한 게 많다고 이야기했었더란다. C언니는 그 아저씨가 말하길, 내가 걸어온 길이 어떤지, 여차하면 여기 걷던 걸 멈추고 내가 걸었던 곳으로 가고 싶다 등등의 이야기를 했단다. 그래서인지 이 아저씨는 나를 보자마자 안 그래도 소아씨랑 이야기 좀 하고 싶었다며 반색하신다. 요 며칠 나도 한국인들을 만나지 못한 터라 방언 터진 듯 수다를 떨었다. 


알고 보니 아저씨는 어제 나와 같은 마을에 묵었지만 나는 좀 저렴한 알베르게에 묵고, 아저씨는 빨래도 다 해주고 식사도 다 근사하게 잘 해주는 조금 비싼 알베르게의 독방에 묵어서 마주치지 못했던 모양이다. 아저씨는 사람과 마주치는 것이 번거로워서 항상 독방에서 묵으신단다. 알베르게에 가면 외국인들이 말 걸어서 귀찮다고. 아저씨의 무릎보호대 차는 것을 보고 나는 내 템포대로 그냥 길을 가려는데 아저씨가 굳이 날 부른다. 부르면 기다리지 아니할  이유는 없다. 아저씨를 기다렸다가 같이 길을 간다.

나보다 15살 많은 아저씨. 어린 나이에 사업을 시작하셨고 그에 대한 프라이드도 강한 분이셨다. 자신의 일을 그렇게 일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대단하시네요~ 하고 말씀드리니 좋아하신다. 아저씨는 내 나이를 묻더니 시집은 언제 가려고 여기 와서 이러고 있냐 신다. 뭐라고? 일장연설, 멈출 생각을 안 한다. 정신 차리고 남자 잡아서 시집을 가란다. 실소가 나온다.


마을에 도착해서 커피 한 잔을 한다. 아저씨는 아침식사를 하지 않으셨다며 어제 당신이 묵은 알베르게에 부탁해서 포장한 닭요리를 꺼내어 식사를 하신다. 몹시도 뿌듯해하신다. 아저씨는 내 종교를 묻더니 내가 천주교인걸 확인하고서는 묻는다. 


마리아 외계인 아니에요? 이게 무슨 소리야. 한참 동안 천주교에서 성모님을 공경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한다. 닭을 뜯으며 내 이야기를 듣던 아저씨는 여기 걸으면서 다 산타마리아 성당밖에 못 봤다며, 천주교가 다 마리아만 빠는(??!!!) 종교 아니냐 하신다. 어이가 너무 없어서 한참을 와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아저씨는 자신의 이야기가 재밌어 웃는 줄 알고 좋아하신다. 


거기다 추가로 하나 더. 식사를 마치면서 아저씨, 이렇게 말씀하신다. 

마을 도착하면 영 쓸쓸하더라고. 다른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 한번 와 봤는데 영 재미없고 외롭네. 피차 외로운 마당에 나랑 한잔 하지?


도착하면 샤워, 빨래하고 빨래를 넌다. 가방 정리하고 장을 봐 온 뒤 저녁 준비를 한다. 그다음에는 다음 길 계획 짜느라 정신이 없다. 기쁜 맥주 한잔에 피로를 다 잊고 그 후에는 몸이 뭉칠까 스트레칭 겸 요가도 한두 시간 정도 한다. 그리고 그 날 있었던 일들을 기록하느라 분주하다. 마지막으로는 찍은 사진까지 핸드폰과 클라우드에 옮긴다. 잠들기 전에는 책을 마저 읽는다. 이게 내 일상이다. 피차 외롭다뇨 그게 무슨 소리예요ㅋㅋㅋ 별거 없어 보이지만 이 일상만으로도 저는 바빠요. 저는 외롭지 않고 그렇게 술자리를 만끽하고 싶지는 않으니 사람 많은 알베르게로 가서 다른 순례자들과 한 잔 하시는 게 어떨까요 하고 말씀드린다.


내 말이 잘 안들리는 모양이다. 거듭 한 잔 하자시길래 정중히 거절한다. 정 그러면 저녁을 당신이 사시겠다고 저녁을 같이 하자신다. 또 정중히 사양한다. 제가 먹을 만큼은 들고 여행에 왔으니 너무 걱정 마시고, 저보다 훨씬 어리고 젊은 순례자들도 많으니 그들에게 맛난 저녁 한 끼 사주심이 어떨까요? 하고 말하니 걔네들은 지네들끼리 잘 노는데 왜 내가 밥을 사주냐고 하신다. 그러면서 말하신다. 


외롭게 혼자 밥 먹지 말고 내가 사 줄 테니 딱딱하게 굴지 말고 그냥 같이 먹자고~


다시 거절한다. 저는 (불편한 사람과 밥 먹는 것보다는) 혼자 밥 먹는 게 편해요. 

귀여운 아들 자랑을 한참을 하시던 아저씨. 외국에 오면 한국인들 다 개방적으로 변해 여행을 아주 잘 즐기는 것 같다고 부럽다시더니, 당신은 카사노바로 변모하고 싶으신 모양이었다. 내가 이분을 떨어뜨리고 싶어서 좀 더 속도를 내니 거의 뛰어오다시피 따라오시면서 이야기하신다. 소아씨 엄청 빠르네~

도망치려고 시동 걸던 마을.

아저씨를 떨구기 위해 정말 열심히 걷는다. 마치 오브락 고원에서 비바람 속에서 너무 추워서 엄청 빨리 걸었던 것처럼, 진짜 전속력으로 걷는다. 결국 아저씨가 조금 멀어질 때 안심하고 계속 나의 걸음대로 길을 간다.

내 마음처럼 황량한 들판을 본다.


길을 걷다가 신기한 장소를 만난다. 돌탑이 잔뜩 쌓여있는 공간. 한국의 국립공원이나 산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풍경이지만 프랑스나 스페인에서는 보기 힘든 풍경임에 틀림없다. 한참 이 곳에서 명상하듯 쌓인 돌탑들을 보다가 나도 하나 올려두고 다시 길을 재촉한다.

오늘 비아나 가는 길은 결코 곱지 않다. 급작스런 오르막길이 있기도 하고, 갑자기 내리막이 나오기도 한다. 아침에는 그렇게 꾸물거리던 하늘도 어느 순간 쨍 하니 맑게 개어 뜨거운 햇살을 내리쬔다.

내 마음이 날카롭고 바짝바짝 갈라지는 것 같다. 이런 나무가 눈에 들어온다.


오늘은 그냥 길가의 올리브 밭에 걸터앉아 가지고 있던 빵과 초리소로 점심식사를 때운다. 아무래도 비아나에 빨리 도착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F아저씨가 비아나에 올 확률은 아주 높겠지만, 아저씨 때문에 일정을 바꿀 순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비아나의 마을 초입새 언덕길 바로 직전에 있는 알베르게에 자리를 잡는다. 내가 비아나에 도착했을 때는 오후 네시 무렵. 내가 알베르게에 들어갔는데 아무도 없어서 순간 닫은 줄 알고 나왔다. 그때 직원이 나를 부른다. 미스! 들어와요!!


알고 보니 오후 네 시가 되었는데도 순례자가 한 명도 오지 않았단다. 그저께만 해도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을 정도였는데, 오늘 무슨 일이 있었냐며 나에게 되묻는다. 글쎄요, 난 잘 모르겠는데요.

순례자 일과인 샤워, 빨래, 빨래 널기 등등을 마치고 저녁거리를 확인해본다. 좋았어, 오늘은 라면과 고기를 먹어야겠다. 팜플로나부터 소중히 싸 온 라면을 드디어 개시할 날이 된 것이다!


내가 장을 보려고 나오던 5시 반 무렵, F아저씨가 알베르게로 들어온다. 아저씨가 나를 보더니 묘한 표정으로 인사를 한다. 여기 시설 좋아요~ 사람은 없네요 하고 내가 웃으며 인사를 한다.  


장을 보려 알베르게를 나서는 나를 아저씨가 부른다. 소아씨, 나랑 저녁 같이 하지? 아니에요 괜찮아요~ 저는 혼자 먹는 게 편해요. 거절과 사양을 구분할 줄 아시는 분이면 참 좋겠는데, 슬슬 화가 난다. 진짜 화가 난 대목은 다음에 날아온 한마디.


어 그럼 소아씨. 내가 돈 줄테니까 내가 좋아할 만한 걸로 적당히 섞어서 좀 사 와봐. 잘 모르겠더라고 난.


아니요. 아저씨가 뭘 좋아할지 제가 어떻게 알아요~ 슈퍼 안 머니까 볼일 보시고 한번 직접 가보세요~ 하고 나오는데 욕이 튀어나온다. 나는 당신을 보필하러 온 부하직원이 아니다. 돈을 주고 해결하고 싶으시면 개인 가이드를 데리고 오셨어야 하셨을 텐데 말이다.

마을 돌아보면서 구경했던 성당.


장을 보고 돌아와 재빨리 요리를 마치고 밥을 먹는다. 메뉴는 마트에서 사 온 고기 패티 구운 것과 소중한 라면. 식사를 하는데 알베르게 관리자가 빵을 반 떼어 주고 와인도 한 잔 준다. 선물이란다. 그러면서 너 아까 그 한국 남자 들어왔을 때 표정이 장난 아니었다고 이야기를 건다. 내가 그 아저씨가 자꾸 술 한잔 하자고 해서 짜증 나서 그랬다니까 아주 난리도 아니다. 스페인 여자들은 아주 강하고 싫은 건 싫다고 바로 그 자리에서 얘기하지. 동양인들 특히 동양 여자들은 약간 돌려 말하는 것 같더라. 그냥 직설적으로 말해! 싫다고!!


내 일에 더 열 받아하는 이 직원에 기분이 풀려서 즐겁게 식사를 하고 있는데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벨기에의 젊은 여자가 하나 더 들어온다. 우와!!! 내가 몹시도 반가워하니 이 여자도 놀라워한다. 나는 이 알베르게에 다른 손님들이 오길 엄청 기다렸어~ 


이 벨기에 아가씨와 수다를 떤다. 벨기에 아가씨는 나에게 길에서 마주치는 사람을 한번 완전히 바꾸고 싶으면 점프를 하는 것도 괜찮다며 권해준다. 자신도 몇몇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서 팜플로나에서 약간 점프했더니 마음이 좀 더 편했더란다. 마음을 비우러 길에 왔는데, 마음을 시끄럽게 해서는 안되지 않겠냐며. 마침 내일은 로그로뇨를 지난다. 내가 가고 싶었던 빌바오로 버스를 타고 갈 수 있는 큰 도시이다. 


꽤 늦은 밤 아저씨가 혼자 고기를 굽는 소리가 사그라지던 그때, 문이 열리고 알베르게에 마지막 순례자가 들어왔다.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어제 같은 알베르게에서 묵고, 프랑스길 첫째 날부터 안타까운 마음을 불러일으키던 스코티쉬 청년이다! 이 청년은 핸드폰 배터리도 나가고 가이드북도 없어서 그냥 큰 마을이 나오길 바라며 계속 걸었단다. 그래서 늦은 밤에야 비아나에 도착했다고.


제일 문제가 되었던 건 이 친구 발바닥의 엄청난 물집이었다. 귀찮은 척 무관심한 척했지만 알베르게 관리자는 이 스코티쉬 친구 발의 물집을 소독하고 오색 실을 꿰어 준다. 저렇게 친절할 거면 웃으면서 해도 되는데 왜 인상 쓰면서 발이 이렇게까지 되도록 내버려두었냐고 화내는 거지. 재밌는 사람이다. 나, 벨기에 아가씨는 스코티쉬 청년에게 이 알베르게 나름 깨끗하고 요리하기에도 괜찮으니 여기서 하루 더 머물며 발의 경과를 지켜보는 게 어떠냐 제안한다. 청년은 고심하다 그리하겠다 한다. 벨기에 아가씨는 늦은 저녁식사를 하러 나간다. 스코티쉬 청년은 저녁이고 뭐고 너무 기진맥진해서 샤워한 뒤 방에 늘어져있다.


알베르게 관리자는 내일 아침에 8시가 되면 모두 나가야 한다며 엄포를 놓고 문을 닫고 간다. 대신 스코티쉬 청년은 하루 더 머물 거니까 안나가도 된다고 한마디 더 얹고 간다.


오늘 아저씨가 했던 대환장 망언 파티를 곱씹어보니 더 화가 난다. 

1. 성모님, 마리아 외계인설

2. 지속된 거절에도 술자리 제안

3. 지속된 거절에도 저녁식사 제안

4. 돈 줄 테니 내가 좋아할 만한 것 사 와봐라 

5. 나이가 얼만데... 6.... 7........


아무래도 난 빌바오로 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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