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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Mar 16. 2018

조용히 묵상하는

37.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신을 사랑하는 이들의 알베르게

10월 15일 

프랑스길 Mañeru - Villamayor de Monjardín 26.1km


아침에 무난하게 6시 반쯤 일어난다. 어제 뉴질랜드 아주머니가 알려 준 비밀의 장소(라봤자 따끈한 보일러실이다)에 널어 둔 빨래들이 바싹 말라 기쁘다.


짐을 싸고 출발한다. 오늘은 그리 멀리 가지 않을 거니까. 프랑스에서 길을 시작하던 버릇이 이 곳에서도 이어져 나는 웬만하면 8시쯤 길을 나섰다. 8시에 길을 나서면 그보다 훨씬 전에 길을 시작한 순례자들이 한창 길을 걷고 있는 걸 볼 수 있다. 늦게 출발하든 일찍 출발하든 결국 다 비슷한 거리를 걷게 된다. 한창 성수기도 아니라 알베르게를 구하는 데 어려움을 겪지도 않으니, 마음 놓고 내 몸의 리듬을 따르기로 맘먹는다. 


길을 걷다가 어떤 마을 식수대 근처에서 콜라 한잔 마시며 잠깐 쉰다. 자전거를 탄 순례자 커플이 사진 촬영을 부탁한다. 사진을 찍어주고 돌아서니 프랑소와즈 쟝 미셸이 오고 있다. 아침 일찍부터 시작하셨는지 딱 마을에서 만났다. 잠깐 안부를 나누고, 프랑소와즈의 부탁으로 사진을 찍힌 뒤 함께 길을 나선다. 

쟝 미셸은 꼭 사진 찍고 있으면 이렇게 장난을 친다... 프랑스 아재.... 

오늘은 날씨가 전혀 곱지 않다. 꾸물거리는 게 찜찜하니 아예 비라도 내렸으면 좋겠는데, 비 내릴 기미는 보이지 않는다. 정말 신기하게도 프랑스와 스페인 국경을 넘어오자마자 우비를 단 한 번도 쓴 적이 없다. 프랑스에서 걸을 땐 매일같이 우비를 뒤집어쓰고 덜덜 떨며 걸었는데 말이다.

이렇게 건물 사이를 지나는 길도 있다.

골목 끝 삼거리에 빼꼼 보이는, 파랑과 노랑의 색 조합이 예쁜 조가비 타일.

다 무너져가는 다리를 건너기도 한다.

중간에 만난 너른 올리브 밭과 기부제 쁘띠 상점. 올리브 절임 캔들과 물들이 있었다. 나는 항상 물은 많이 들고 다니니까 올리브 캔을 하나 집어 들고 상팀 있던 것을 모아서 넣는다. 이런 예상치 못한 이벤트들을 만나면 괜스레 기분이 좋아진다.

다리에는 항상 노란 화살표가 있다. 행여 길이라도 잃어버릴까 봐.

굴다리를 지나기도 한다.

드디어 에스떼야에 도착했다. 이곳의 바에서 에스떼야 담 맥주를 꼭 한잔 하고 말겠어하며 신나 했더란다. 하지만 내 다리가 퉁퉁 부은 걸 보고 C언니와 H가 술은 절대 안 된다고 그랬다. 그래서 론세스바예스부터 술이라고는 입에도 대지 않았다. 매일 맥주 8도짜리 큰 거로 한 캔, 혹은 와인 한 병은 비우던 나에게는 말도 안 되는 일인 게다! 하지만 에스떼야니까 맥주 한잔쯤은 괜찮지 않을까~ 하면서 마을로 입성한다. 신이 난다.

성당을 지나 마을 꽤 초입새에 있는 바에 들어가서 바게트 샌드위치 하나와 맥주 한잔을 부탁한다. 맙소사. 에스떼야가 없단다. 마호우밖에 팔지 않는 바를 쏙 골라 들어가다니. 하지만 바게트가 너무 맛있어 보이고 이미 가방도 내려놔서 귀찮았던지라, 그냥 포기하고 먹기로 한다. 그래도 맥주는 맛있다.


여기에 앉아서 식사를 하고 있으니 순례자들이 지나가는 걸 다 볼 수 있다. 프랑스 부자 순례자도 들어와서 인사를 하고 식사를 한다. 바 안을 둘러보니 그냥 여행자들과 순례자들이 반반 섞여있다. 식사를 마치고 다시 가방을 들쳐 메고 길을 이어간다. 보통 다른 이들은 이 곳에서 길을 많이 끝내곤 하지만 나는 더 갈 거니까.

노란 화살표, 노란 조가비가 그려진 파란 타일이 곳곳에 잘 표기되어있다. 정말 길 표시가 확실하고 좋다.

난 진짜 이 길을 건너면서 기염을 토했다. 사진을 보시라. 화살표가 세 개나 있다. 진짜 혹시라도 길 잃어버릴까 봐 세 군에나 화살표를 그려놓았다. 오른쪽으로 가! 오른쪽으로 가!! 오른쪽으로 가!!!


길을 걸으며 생각했던 걸 다시 생각하게 한다. 사는 데에도 이렇게 화살표가 계속 있더라면 얼마나 좋을까. 스무 살까지는 항상 그려져 있던 화살표만 열심히 쫓아왔는데 어느 순간 화살표가 뚝 끊겨 있는 것 같다. 내가 화살표를 그려가며 살면서도 이게 맞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불안감에 그냥 따라가면 되는 길을 걸으러 여기까지 온 것이기도 하지만.


그나저나 내가 에스떼야를 지나 좀 더 가겠다고 맘먹을 것은 '어떤 장소'를 오후에 지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떤 장소'에 너무 이른 아침에 가면 안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었다.

그 어떤 장소는 바로! 프랑스길의 명물인 이라체 수도원!! 

이 수도원이 명물이 된 이유는 와인이 유명해서이기도 하겠지만 그것은 바로 다름 아닌...!

이 이라체 샘(!?)때문이 아닐까!!

이 이라체 수도원의 명물; 와인 수도꼭지에서는 왼쪽에는 레드와인, 오른쪽에서는 물이 나온다. 비용? 그런 것 없다. 마시고 싶은 만큼 마실 수 있다. 맛이 어떨지 굉장히 궁금했고 기대도 했었다. 어땠는지 물으신다면... 걸으시면서 직접 느껴보시길 권한다.

이 곳에서 개를 두 마리 데리고 이 지역을 관광하고 있는 가족들을 만난다. 그들이 와인 테이스팅을 마친 뒤 나도 한번 맛본다. 그거 맛있어? 하고 묻는 순례자가 있다. 내가 대답을 해주니 어깨를 으쓱하고는 자신도 테이스팅 해본다. 그렇게 제이콥을 만났다. 

이라체 수도원 근처의 산세가 멋지다. 바로 근처에는 캠핑장이 있는데 운영비는 나올까 걱정이 된다.


제이콥은 미국 국립공원 관리를 한단다. 산티아고 길은 친구가 걷고 나서 추천해주어서 알게 되었고, 또 자신의 이름과 같은 이름이기도 한 이 길이 궁금했단다. 자신의 직업 특성상 일 년에 3~4개월 정도는 긴 휴가를 가질 수밖에 없는데, 그때마다 색다른 액티비티를 즐기며 살고 있다 한다. 

언덕길이 나올 때마다 내가 낑낑대니 제이콥이 재밌어한다. 다리가 길고 키가 매우 큰 제이콥은 내가 열 번 걷는 걸음을 네다섯 번 만에 성큼성큼 간다. 이런...

제이콥과 함께 수다를 떨다 보니 마을에 도착한다. 항상 도착하기 1시간 전부터 정말 힘든데, 오늘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혹시 몰라 마을 성당에 가서 미사 시간을 확인해 보니 이미 미사는 오전 중에 끝났다.


오늘 묵을 알베르게는 종교단체에서 운영하는 알베르게. 기진맥진하여 알베르게로 도착해보니 다행히 묵을 자리가 있었다. 도장을 받고 체크인을 하려고 가니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왔다는 봉사자와 영국식 영어를 쓰는 꽤 나이 든 봉사자 할아버지가 환대해주신다. 오스트레일리아의 젊은 봉사자는 도장 찍는데 익숙지 않은 모양인지 순서대로 도장을 찍어주지 않고 빈칸을 하나 두고 찍는다. 내가 으악?! 하고 놀라니 할아버지 봉사자가 그 젊은 봉사자에게 잔소리를 대신해주신다. 순서대로 찍어야지 이렇게 띄어서 찍으면 안 된다고... 젊은 봉사자가 겸연쩍어하며 머리를 긁는다.  


젊은 봉사자가 안내하여 이 건물 꼭대기 다락방에 가 보니 어제 만났던 뉴질랜드 독일인 커플이 있다. 뉴질랜드 여자분, 하나도 반갑지 않은 것 같은 표정으로 다시 만나 반갑네 하고 인사해주신다. 가만 보니 나름 활짝 웃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일반적인 순례자 일상인 샤워와 빨래를 마친다. 제이콥은 순례자 일상 같은 건 별로 신경 쓰지 않는 모양이다. 내가 빨래를 너는 것을 보더니 벌써 이렇게 마쳤냐며 놀라워한다. 지금 빨래 널어야 오후 내로 바싹 말라 저녁이나 밤에 걷을 수 있을 거야. 안 그러면 너 가방에 빨래 널고 걸어야 할걸? 웃으며 말하니 제이콥, 빨래하러 성큼성큼 뛰어간다. 

늘어지는 시간, 해가 길어지는 오후. 이렇게 느긋할 수 있을까 하는 시간 안에서 천천히 유영하듯, 햇볕을 쪼이며 책을 본다. 책이 조금 지루해질 때쯤 봉사자 아주머니가 호두 까는 것을 뉴질랜드 여자분과 함께 돕는다. 저녁에 나올 전식 샐러드에 데코 할 호두란다. 봉사자 아주머니가 까면서 먹어도 된다고 하신다. 자신도 깐 것보다 먹은 게 더 많은 것 같다며 웃는다. 더 열심히 깐다. 까는 것의 반은 입으로 들어간다. 까맣게 마른 것들은 정말 고소하고 달다.


호두 까는 것도 지겨워져서 맥주 한 캔 사서 다시 알베르게 앞에서 늘어지게 앉는다. 봉사자들과 인사도 한다. 내가 발목이 삐어서 아팠다고 그것 때문에 조금 힘들었다고 이야기하니 물리치료사 출신이라는 이탈리안 순례자가 신발을 묶는 법을 조언해준다. 특히 내리막길에서 신발을 너무 꽁꽁 매지 말고 약간 풀어서 발목이 자연스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하라 등등의 조언을 해준다. 


그런 수다를 떨고 있을 때, 피레네를 넘던 날 만나고 그 후로도 한두 번 마주쳐 인사했던 둥글넓적 가방의 스코티쉬 청년을 다시 만났다. 무거운 다리를 이끌고 기우뚱기우뚱 걸어오던 이 청년을 다른 봉사자가 거의 구조(?)해오다시피 한 것 같다. 물집도 너무 아프고 온 몸이 근육통으로 아프다는 스코티쉬 청년. 손에 짐이 들려있으면 배로 힘들다는 걸 드디어 깨달은 모양이지 그 둥글넓적한 가방은 보이지 않는다. 청년은 간신히 체크인을 마치고 가방을 질질 끌며 알베르게로 들어간다. 저런... 


잠시 뒤 작은 종소리와 함께 할아버지 봉사자가 모두를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기분 좋은 저녁식사 시간이다. 이 알베르게의 모든 이가 다 모여 정말 시끌벅적하다. 이렇게 많은 이가 모인 저녁식사는 정말 오랜만인 것 같다. 꽁끄 이후로는 처음인 것 같다. 


내 앞에는 꽤 훤칠하게 잘 생긴 오스트레일리아의 봉사자 청년, 어제 함께 알베르게에서 묵었던 프랑스 부자 중 아들, 그리고 내 옆에는 대만에서 왔다는 YANG양이 앉았다. 길을 걷다가 이 알베르게에 반해서 일주일째 봉사를 하고 있다는 이 대만 아가씨는 얼마나 나에게 친근하게 대하는지 아주 팔짱 끼고 가까이 다가와서 대화하는지 아주 혼났다. 이 분, 팔짱 끼고 대화하면서 자꾸 얼굴을 들이댄다. 얼굴을 들이대다 못해 이제는 찰싹 달라붙는다. 아아..... 아아아..!! 내 앞의 프랑스 청년과 호주 청년이 흥미롭게 내 표정을 지켜본다. 나보다 좀 작고 동글동글한 편이었던 이 YANG양은 내가 키도 크고 오래 걸어서 까맣게 탄 것도 멋지고 근사하다며 엄청 달라붙는다. 대체 어디가? 참고로 나는 164cm 대한민국의 여성 평균 키를 가진 평범한 사람이다.

YANG양과 내가 함께 찍은 사진... 사진에서 티가 날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한껏 긴 벤치 구석으로 내몰린 상태였고 YANG양이 전식이 나오기 전까지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 있었다. 한쪽 엉덩이가 벤치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얼마나 애를 썼는지.


아까 한참 깠던 호두가 뿌려진 샐러드가 전식으로 나와 가득 덜어 먹으며 한참 이야기를 한다. 참다못해 YANG양에게 이야기한다.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떤지 잘 모르겠는데, 한국 사람들은 적어도 대화할 때 팔 길이만큼의 거리는 떨어져서 얘기한단다.... 하고 이야기하니 그제야 YANG양, 아 미안! 하면서 조금 떨어진다. 호주 청년과 프랑스 청년 아주 뒤로 넘어가게 웃는다. 웃쮜뫄롸라...^^...


저녁시간이 끝나고 각국의 언어로 된 복음서를 나누어주신다. 개신교 소속의 집단이거나 혹은 천주교 소속이라면 뭔가 오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싶은, 복음서를 받아 들고 알베르게 근처를 산책한다.

해가 다 지고 푸른 시간이 온다. 


알베르게에서 진행하는 묵상 시간에 참여한다. 모두 빙 둘러앉아 봉사자가 읽어주는 창세기를 들으며 조용히 묵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그 후 명상을 한다. 각자 자신만의 자세로 편안히 하느님의 말씀을 듣는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이들이 모인 이 알베르게에서 약간은 몽롱한 행복감을 느낀다.

묵상 시간이 끝나고 나와보니 마을에는 완전한 어둠이 내려있었다.


방에 돌아와 잠들기 직전, 천장에서 벼룩이라도 떨어질까 두려워하며 남긴 사진. 솔직히 말하면 알베르게의 상태는 그렇게 썩 좋진 않았다. 정말 벼룩이라도 있을까 봐 프랑스에서 샀지만 정작 프랑스에서는 단 한 번도 쓰지 않았던 베드버그 방지 스프레이를 이 곳에서 무진장 썼다. 내가 뿌리는 것을 보더니 깐깐징어 뉴질랜드 아주머니가 조심스레 그걸 빌릴 수 있냐 묻는다. 내가 물론이죠! 하면서 엄청 뿌려주니 몹시도 고마워한다. 이 프랑스산 베드버그 방지 스프레이(온갖 지트에서 다 판다)는 레몬향이 나서 그렇게 나쁜 느낌은 아니다. 뿌리는 김에 제이콥과 독일 아저씨 침대에도 뿌려준다. 제이콥의 굿나잇 인사와 함께 불이 꺼진다. 오늘도 여느 때와 같이 빠져들듯 잠에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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