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소아 Mar 14. 2018

약간은 피하듯

36. 반갑고 외로운 프랑스길 - 헤어짐과 재회와 여왕의 다리

10월 14일

프랑스길 Pamplona - Mañeru 29.2km


오늘의 목표는 약간 다르다. 분명히 한국사람들을 만나고 싶어서 프랑스길을 기다려왔는데, 어제의 약간 불편한 경험 때문에 조금 조용한 마을로 가고 싶었다. 적어도 내게 다이어트를 논하시던 한국 아주머니 Z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묵는' 마을에 묵으실 테니 그곳을 피하고 싶었다. 보통 팜플로나 다음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많이들 머물테니, 그곳보다 조금 더 가면 될 것 같았다. 다행히 바로 다음 마을인 마녜루 Mañeru 가 그다지 멀지 않다. 오늘의 목표 지점은 그곳으로 설정한다.

동이 트기 시작하는 팜플로나. 출근하는 사람들과 길을 시작하는 순례자들이 섞여 아침에도 북적인다. 청소차와 쓰레기 수거차는 한창 분주하다. 아침식사가 가능한 카페에는 직장인들이 서서 커피와 아침식사를 한다. 평범한 도시의 아침에 순례자가 덧입혀져 있는 곳.


그나저나 어제 먹은 이부프로펜, 어제 바른 연고가 꽤 효과가 있는 모양이다. 다리가 많이 가라앉았다. 걷는데 기분이 좋다. 피레네를 넘을 땐 걸음걸음마다 다리가 붓는 것이 느껴졌는데 이제 그런 느낌은 가셨다. 2~3일 뒤에는 다 가라앉길 기도해본다.

팜플로나를 벗어나는 데 한참 걸렸다. 오늘은 그 유명한 용서의 언덕과 푸엔테 라 레이나를 지나는 날이다. 용서의 언덕은 산티아고 순례길을 염두에 둔 사람이라면 한 번쯤 보았을 그곳, 영화 The way의 배경이 된 곳이기도 하다.


들판으로 가기 직전 작은 마을의 성당에 들러 기도를 드린다. 기도를 드리고 나오니 사춘기 스페인 소년 미곌과 미곌의 어머니가 인사를 한다. 미곌은 순례길 끌려온 게 그렇게 짜증 나 보이더니, 오늘은 기분이 좋아 보인다. 순례길에서 수많은 외국인들과 만나 인사하고 대화하는 게 재밌는 모양이다. 귀엽다. 어제 옆 침대를 썼던 커플과도 인사를 한다. 이 커플은 다른 사람들은 본체만 체 하곤 했는데 나에겐 친절해서 기분이 이상하다.


도시와 마을들을 벗어나니 들판이 나온다. 이제야 길을 걷는 느낌이 난다.

길을 가다가 C언니와 C언니와 비슷하게 동글동글한 아저씨를 만난다. 두 분은 걷는 속도가 비슷해서 자연스럽게 길동무가 된 것 같다. 부럽다. 언니와 반갑게 안부인사를 나눈다. 조금 같이 걷다 보니 언니가 내게 말한다. 소아씨 먼저 가요 걸음에서 속도 내고 싶어 하는 게 느껴져. 어떻게 아셨지. 숨기는 것에 재능이 없는 나는 언니에게 인사를 하고 속도를 내어 걷는다. 자전거를 탄 스페인인 일행이 우리 옆을 쌩 하고 지나가며 인사도 한다.


이제는 길을 걸으며 내가 넘어야 할 것들을 미리 대비하는 버릇이 생겨서 먼 곳을 보며 걷는다. 저 멀리 지평선에 풍력발전기가 웅웅 돌아가는 것이 보인다. 그리고 그 위에 작은 점들이 걸쳐져 있는 것도 보인다. 그래, 저기가 그 용서의 언덕 이리라.

이미 수확이 끝난 밭이 넓게 펼쳐져있다.

용서의 언덕을 올라가는 길은 결코 곱진 않다. 작은 자갈들과 건조한 날씨는 올라가는 걸음들이 조금씩 미끄러지게 한다. 길을 가다 한국인 아주머니 Z를 또 만나 함께 걸어 이 용서의 언덕까지 함께 올랐다.

THE WAY에 나왔던 용서의 언덕.

그래, 이 곳에 와보고 싶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다. 그렇게 와 보고 싶었던 곳인데 큰 감흥이 없다. 마치 에펠탑을 처음 봤을 때의 느낌과 같다. 아라곤 길을 거쳐 프랑스길로 오겠다고 했던 초기 계획 때도 용서의 언덕의 이 조형물들이 정말 보고 싶어서 일부러 중간에 팜플로나로 버스를 타고 와 이 곳을 지날 예정이었다. 하지만 와 보니 그렇게 마음이 요동치지 않는다.


내 마음을 요동치게 하는 것은 사람들과 사람들을 만나는 시간, 그리고 쌓아온 길이다. 이 조형물은 내가 쌓아온 길에 올려진 약간 예쁜 고명 정도의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 고명 옆에서 사진을 아니 찍을 순 없지.

그나저나 내 얼굴과 양 팔이 철판만큼이나 뻘겋고 검게 탔구먼.

저기 있는 비석 아래에서 한국인 아주머니 Z와 잠깐 숨을 돌렸다. 미곌은 기분이 좋았는지 과자 한 봉지를 주위 순례자들에게 나누어주고 다녔다.


그렇게 보고 싶었던 용서의 언덕. 이 언덕에서 한동안 숨을 돌리고 다시 길을 걷는다. 어제 불편한 대화가 오간 이후로 한국인 아주머니 Z와는 함께 있기가 조금 어려운 마음이 든다. 약간은 피하듯 먼저 길을 재촉했다.

안녕, 용서의 언덕.

용서의 언덕을 내려오는 길은 정말 가파른 내리막길이다. 자갈들도 몹시 커서 관절에 무리가 간다. 발을 내딛을 때 주르륵 몇 번 미끄러지는 바람에 몹시 긴장하고 걸을 수밖에 없었다.

마을에 들어가기 전, 벤치에 앉아 점심식사를 한다. 메뉴는 갖고 있던 버터 바른 깜빠뉴, 그 위에 초리소를 잔뜩 얹어 짭조름한 샌드위치를 만들어서 먹고 있었다. 내가 먹는 게 맛있어 보였는지 지나가던 순례자들도 옆에 앉아 보다가 다른 바에 들어가 식사를 한다. 익숙한 이가 다가온다. 덴마크 친구 에밀이다. 평소에는 예의 그 나이 있는 친구와 다니더니 오늘은 왠지 혼자이다. 에밀은 내가 앉아있는 벤치 옆에 배낭을 놓고 그 위에 털썩 앉는다. 내가 초리소를 좀 줄까 하고 건네본다. 에밀은 사양하고 빵과 버터로만 식사를 한다.


에밀과 인사를 하고 왜 이 길을 걷는지 등등 '평범한 순례자 대화'를 나눈다. 에밀은 마음의 방황을 하고 있을 때 이 길을 걸은 친구가 추천해 주어서 길을 시작했단다. 에밀의 친구는 이 길을 처음 걸을 때 40일이 걸렸고, 후에 다시 걸었을 땐 25일이 걸렸단다. 그는 그렇게 두 번 이 길을 걸으며 자신의 문제를 좀 더 편하게 대할 수 있게 되었단다. 그래서 에밀 자신도 도전해보고 싶었다고. 내가 길을 걷는 이유를 말하는 건 이제 많이 익숙해져서 좀 더 편하게 말할 수 있다. 다른 사람들이 너무 심각하고 진지하게 들어줄 때, 이제 정리하고 있어 괜찮아! 하고 마무리 멘트까지 해 줄 수 있게 된다.


언제 도착하는 게 목표냐고 에밀이 묻는다. 나의 현재 목표는 단 하나. 10월 25일 레온에서 출발해 마드리드로 엄마를 데리러 가야 한다. 내가 이 얘기를 하니 자기도 얼마나 걸릴 진 모르겠지만 며칠 뒤에 부르고스에서 자기 형을 만나야 해서 중간에 잠깐 스킵해야 할 수도 있겠단다.


에밀은 한국인들 다 함께 걷는 모양이던데 너는 혼자 걷느냐고 묻는다. 가장 큰 이유는 내가 걷는 속도가 조금 빨라서. 그리고 더 솔직히 말하면 나에게 다이어트 이야기를 하는 사람을 좀 피하고 싶어서 혼자 걷는다고 했다. 그런 얘기를 한단 말이야? 에밀은 조금 놀라워한다.


나도 에밀도 식사를 마친다. 내가 먼저 길을 나선다. 에밀이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하며 한마디 덧붙인다. 굳이 다이어트 안 해도 될 것 같아. 진짜야.


과분한 칭찬이네 고마워.

그나저나 많은 성당들의 문이 굳게 잠겨있다. 들어가서 감사기도를 드리고 싶어도 수월하지 않았다.

마을 한두 개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에 도착한다. 오늘 결혼식이 있는지 성당 근처가 차려입은 사람들로 몹시 북적인다. 바로 근처에 알베르게도 있고, 그 알베르게에는 벌써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고 있었다. 성당과 알베르게를 지나 푸엔테 라 레이나 중심가로 가고 있을 때, 익숙한 형체들이 나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설마..!


역시! GR길 후반부에 길을 함께 했던 밀레 가방 부부, 쟝 미셸과 프랑소와즈이다!


내가 한참 전부터 꺅꺅 거리며 무거운 가방을 들썩이며 달려가니 활짝 웃으신다. 싸바? 익숙한 인사를 해 주신다. 너무 반가워하며 웃는 두 분에 괜히 마음이 다 울컥하다. 왠지 앞으로 자주 못 볼 수도 있으니까, 하고 사진을 찍어도 되는지 부탁드리니 활짝 웃어주신다. 쟝 미셸, 또 우스꽝스러운 얼굴을 한다.

내 얼굴이 너무 새카맣게 타서 셀카를 찍고 싶지 않았지만 이 분들을 만난 기쁨이 너무 벅차서 그런 마음조차 잊어버린 지 오래였다. 그들과 안부인사를 나눈다. 어디서 묵을 건지 이야기한다.


우리는 어디서 어떻게 만나자 인사하지 않는다. 그렇게 하지 않아도 만날 이는 만나고, 만나지 못할 이는 만나지 못하는 곳이 카미노, 슈망인 걸 알고 있으니까. 그저 '나중에 봅시다' 하고 인사한다.

푸엔테 라 레이나에 있는 산티아고 성당에서 잠깐 감사기도를 드리고 나오는데 에밀과 다시 만난다. 에밀은 알베르게를 찾고 있었다. 알베르게는 이 마을 입구에 있는지라 너 한참 지나왔는데... 내가 갖고 있는 애플리케이션을 알려주고, 위치도 알려주며 방향을 가리켜준다. 에밀이 너는 이 마을에서 머물지 않느냐고 묻는다. 음, 나는 아무래도 다음 마을에서 묵으려고. 에밀이 잠깐 말을 삼키더니 다시 인사한다. 부엔 까미노.


이 마을이 푸엔테 라 레이나인 이유. 마을을 나서는 길에 아름다운 다리가 있다. 여왕의 다리라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아름다운 이 다리를 건너 나는 다음 마을 마녜루로 향한다.

푸엔테 라 레이나를 떠나는 길.

마을을 나오면서 돌아보는 푸엔테 라 레이나. 다리가 몹시 아름답다.

마녜루로 향하는 길 양 옆의 밭들. 수확을 마치고 한번 갈아 놓은지라 붉은 속내를 전부 드러내고 있었다.

생각보다 금방 마녜루가 나온다. 정말 조용한 마을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머무는지, 푸엔테 라 레이나에서 마녜루로 가는 길은 정말 무서우리만치 사람이 없었다. 햇빛은 정말 이글이글 끓어오르고 더워 죽겠는데 저 뒤에서 순례자 하나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오고 있었다. 순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아예 걸음을 멈추고 쉬면서 그가 지나가길 바랐다. 그는 금방 나를 따라잡았고, 나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잠시 멈추어선다. 그러면서 어디까지 가냐 묻는다. 아직 정하지는 않았다고 답한다. 그는 부엔 까미노, 하고 먼저 길을 갔다.


아무 생각 없는 사람을 혼자 무서워하고 혼자 안심하다니. 후에 혼자 피식하고 웃었지만 그래도 경계는 늦추지 말자고 다짐한다.


마녜루에 도착한다. 애플리케이션에는 마녜루에 알베르게 두 개가 있다고 되어있는데, 마을 주민에게 물어보니 하나는 닫았단다. 그래서 하나밖에 없는 알베르게에 묵는다. 레스토랑을 겸하는 알베르게. 마을에 있다는 슈퍼마켓도 닫은 것 같다. 저녁도 신청한다.


마을을 한 바퀴 돌아 구경한 뒤 알베르게의 바에서 맥주를 한잔 산다. 프랑스인 부자가 바에 앉아 있길래 옆에 앉아도 되냐 묻고 합석을 한다. 그들은 팜플로나에서 길을 시작해 오늘이 첫날이라고. 확실히 그들은 아직 반짝반짝 깨끗한 새(?) 순례자였다. 내가 출발한 르퓌앙벨레를 알려주니 몹시도 놀라며 그 도시에서 한 시간 거리에서 자신들이 살고 있단다. 프랑스 아버지는 자신이 좀 더 젊었을 때 르퓌 길을 걸었다며, 그 길 예쁘지 하고 회상한다. 한 달 프랑스 안을 걸으며 귀동냥으로 배운 프랑스어로 자기소개도 하고 인사도 해주니 엄청 반가워한다. 그때 뉴질랜드에 사는 독일 아저씨와 뉴질랜드 아주머니가 합석을 해 온다. 독일 아저씨는 한국에 굉장히 심이 많은 엔지니어. 한국의 근무환경과 노동강도도 그에게는 꽤나 큰 관심거리였다. 프랑스 부자, 독일 아저씨의 질문공세에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한다.


금방 저녁시간이 되어 식당으로 가 보니 뉴질랜드 독일 커플, 프랑스 부자, 또 다른 프랑스 아저씨, 나, 서로 몰랐지만 길을 걸으며 연이 이어진 캐내디언 커플이 모였다. 생각보다 많은 인원. 식사는 그냥저냥 무난했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요리를 어떻게 만들었는지 와인의 맛은 어떤지 등등 자기들끼리 수다 떠느라 여념이 없다. 프랑스인들은 음식만 있으면 정말 하루 종일 충분하게 수다를 떨 수 있을 거다...


독일 아저씨는 정말 낙천적인 아저씨. 세상만사가 신나 보인다. 얼마나 이 길을 걷고 싶었는지 이야기한다. 그에 비해 뉴질랜드 아주머니는 세상만사가 다 맘에 들지 않아 보인다. 그녀는 길가의 화장실 휴지들을 얘기하며 이 길이 순례길인지 화장실 길인지 도저히 모르겠다며, 여기 끌고 온 독일 아저씨를 조금 원망하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사람들이 제발 화장실 '시설'을 이용했으면 좋겠다고 공감해주니 뉴질랜드 아주머니의 얼굴에서 처음 밝은 미소를 보았다.


이 저녁식사의 백미는 캐나디안 커플, 특히 캐나다 아주머니의 경험담이었다. 이 아주머니는 일평생 국립공원 관리자의 딸로 지냈고 나이 들어서도 관련된 일을 해 오셨단다. 그래서 곰의 종류별 도피 방법, 야생에서 살아남는 법 등등을 빠삭하게 알고 계셨고 또 그걸 아주 감칠맛 나게 이야기해주셨다. 곰 피하는 법을 신나게 듣다 보니 벌써 밤 9시 반. 뉴질랜드 아주머니가 눈썹을 시옷 모양으로 만들고 먼저 자리를 뜨자, 다들 눈알을 데구륵 굴리다 잠자리에 들자며 일어난다.


위층에 올라가 보니 식사자리에 올 수 없을 만큼 심한 감기몸살 + 엄청나게 큰 대왕 물집에 고생하시던 에스파냐 아주머니가 주무시고 계셨다. 모두 까치발하고 살금살금 잠자리에 든다. 부에나스 노체스, 본 뉴이, 굿 나잇. 잘 자라는 인사들이 오간다.


조용한 마을.

가끔 아이가 웃는 소리, 개가 짖는 소리만 들려오는 마을에서 잠이 든다.

C언니, H, Y, L의 소식이 궁금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그런 말씀은 저에게 하지 마세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