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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n 07. 2018

신기한 만남

49. 엄마랑 순례길 - 대망의 그 첫 번째 날

10월 27일

프랑스길 León - San Martín del Camino 25.8km


날이 밝았다. 엄마와의 순례길 그 첫 번째 날이다.


조식이 괜찮다는 이야기를 듣고 미리 신청을 해 놓았었다. 부지런히 준비를 다 마치고 조식 시간이 시작되자마자 1등으로 들어가 식사를 한다. 알찬 구성이 엄마 맘에 쏙 들었는지 여러 번 왔다 갔다 하신다. 물론 나도 열심히 배를 채운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엄마에게 있어서 걷기 첫날. 알차게 먹어두어야 했다. 우리 외에는 제복을 입고 있는 아저씨 두 분밖에 없다. 맘껏 먹고 카페 콘 레체도 따로 요청해서 마신다. 친절한 직원분들, 만족스러운 식사를 마친다.


가방을 컨시어지에 맡긴다. 가방의 분실을 대비해 사진도 찍어둔다. 아직은 푸른 기가 가시지 않은 시간, 걷기를 시작한다. 순례자들이 그렇게 많이 보이지는 않지만 간간히 앞뒤로 한두 명씩 보이곤 한다. 레온을 빠져나오는 길은 몹시도 길다. 도로 옆으로 난 길, 긴 벽을 따라 난 길을 걷는다.


마을을 한두 개 지났을 때였을까. 마을 끄트머리에 성당 하나가 보인다. 이 성당의 외관이 맘에 들었는지 엄마가 한번 들어갔다 나와보자며 제안하신다. 10시 미사 직전인지 사람들이 분주히 미사 준비를 하고 있었고, 신부님이 고해소에 앉아 계신 것이 보였다. 성당 외관도 내부도 굉장히 모던하고 아름다웠다. 괜찮은데? 잠깐 미사를 드릴까 하고 고민했지만 엄마와 나는 그냥 길을 계속 나서기로 한다. 걷기의 흐름을 계속 유지하고 싶었다.


엄마 가방을 내가 메고 걷는다. 불편한 점이 하나 있다면 엄마가 간식거리나 물을 먹기 위해 나를 찾아와야 한다는 점. 두어 시간쯤 지나 만난 마을에서 마침 중국인 마트를 발견한다.


중국인들은 정말 엄청나다. 어느 나라 어딜 가든 중국인 마트나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다. 덕분에 가끔 한국 음식이나 찰진 쌀밥이 그리울 때, 저렴한 물품이 필요할 때 아주 잘 이용했다. 중국인 마트의 사장님들은 다들 부지런해서 제법 늦게 문 여는 다른 스페인 상점들과는 달리 아침 일찍부터 문을 연다. 덕분에 엄마 가방을 아주 일찍 저렴한 가격에 살 수 있었다. 값을 지불하는데 엄마가 중국어로 몇몇 대화를 하신다. 수년간 중국에서 살았던 짬으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엄마. 어디에서 왔는지 등등의 이야기를 마치고 엄마의 간식을 나눈 뒤 다시 길을 나선다.


점심을 먹을 만한 마땅한 곳이 보이지 않아 곤란하던 터였다. 화장실도 가고 싶었고. 때마침 식료품점 하나가 보여 쾌재를 부른다. 생긴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아주 깨끗한 곳. 그 앞에는 간이 테이블이 여러 개 있어서 순례자들이 한숨 돌리고 가기에 적절해 보였다. 엄마와 나는 볼일을 보고 난 뒤 음료를 사와 자리를 잡는다. 어제저녁에 먹고 남은 보까디요와 엄마가 새로 한국에서 가져온 누룽지 등등을 먹는다. 엄마는 길을 걷다가 지나가던 운전자가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고, 그리고 순례자들이 지나가면서 부엔 까미노 하는 것이 꽤 흥미로우셨나 보다. 이제는 엄마도 부엔 까미노 하고 인사해야 된다 말하니 엄마가 웃는다. 아직은 부끄러우시단다. 그때 마침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던 순례자 커플도 우리 옆 테이블에 자리를 잡는다. 

식사를 마치고 텅 빈 마을을 지나는데 예사롭지 않은 숫자가 내 눈에 띈다.

298km!

산티아고까지 드디어 200km 대가 남았다니. 나는 혼자 감격에 겨워있었다. 1500대가 어저께 같은데, 시간은 빠르고 남은 길도 차근차근 줄어 여기까지 와버렸다. 이건 꼭 사진으로 남겨야 해! 하고 엄마와 나는 사진을 남겨본다.

해가 제법 많이 떠올랐다. 점심시간 뒤가 가장 걷기 더운 시간이다. 지금부터는 다 말라버린 옥수숫대가 가득한 밭만 보인다.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방향으로 난 도로 양 옆으로 순례자의 길이 나란히 나 있다. 순례자들은 아스팔트 위를 걷기도, 흙길을 걷기도 한다. 아무것도 없는 새파란 스페인의 하늘 아래, 엄마와 나는 소실점을 향해 일자로 난 길을 쭈욱 따라 걷는다.

아무 생각 없이 걷다 보니 오늘 목표로 했던 산 마르틴 델 까미노의 알베르게에 도착한다. 이 곳에는 공립 알베도 있긴 하지만 아무래도 마을이 보이자마자 알베르게에 들어가고 싶어 지는 게 순례자의 마음. 그런 마음을 고려해서 마을에 닿자마자 보이는 알베르게로 골랐다.

알베르게에 도착하자 친절한 주인과 봉사자 분이 반겨주신다. 놀랍게도 봉사자분이 한국분이셔서 반갑게 한국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봉사자분은 엄마와 나를 부러워하며, 당신 어머니도 좀 더 젊었더라면 함께 걸었을 텐데 하며 아쉬워하셨다. 난 봉사자분의 얼굴이 너무 낯익어서 기분이 이상했지만, 그냥 기분 탓으로 넘기기로 한다.


알베르게에 도착해 엄마와 나는 샤워와 짐 정리를 우선 한다. 그 뒤 알베르게 봉사자분께 빨래도 요청드린다. 빨래가 끝나기를 기다리는 동안 엄마와 나는 맥주 한잔 하며 뭉친 몸의 긴장을 녹인다.

오늘은 대체 무슨 날일까. 이 알베르게에는 우리 말고도 한국인 청년, 또 한국인 젊은 부부가 왔다. 이렇게 많은 한국인을 한꺼번에 만나는 것은 생장드피에포흐 이후로 처음인 듯했다. 우리는 다 함께 저녁시간을 기다렸다.


저녁식사는 그야말로 차고 넘치는 메뉴로 많은 음식들을 즐길 수 있었다. 한국인 봉사자분이 이 알베르게 사장님께 말씀드려준 덕분에, 덜 짜고 많이 익혀진 그야말로 한국인 입맛에 알맞은 빠에야를 필두로 많은 메뉴를 맛볼 수 있었다. 백미는 한국인 봉사자분이 가져오신 소스로 만든 불고기! 거기다가 엄마가 한가득 사 오신 김치도 나누었다. 나누어야 내 허리가 사니까 ;-)

식사자리가 무르익고 모두 같이 각자의 길을 이야기하는 시간.

엄마는 오늘 순례길이 첫날인데도 25km 넘게 걸었다고, 몹시 대단하시다고 젊은 부부가 몹시 놀란다. 젊은 부부는 걷기 첫날 너무 힘들어서 정말 조금만 걸은 뒤 계획을 다 바꾸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엄마 허리 통증을 전혀 호소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허리 삐끗한 나만 아프다고 징징거렸지. 더군다나 나보다 오히려 엄마가 더 잘 걸었다. 엄마는 그야말로 물 만난 물고기처럼 신나게 길을 타셨다. 신기한 노릇이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신경 쓰이던 봉사자분. 나는 묘하게 확신하고 있지 못하고 있었는데, 알베르게 사장님 따님이 봉사자분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듣고 확신이 들었다. 계속 나미~ 나미~ 이렇게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약간 저어하며 봉사자분께, 혹시 여행작가님 김남희 씨 아니신가요? 하고 여쭈니 고개를 끄덕이신다. 역시!


걷기 여행을 꿈꾸고 특히 순례길을 꿈꾸는 사람들이라면 김남희 작가의 책을 스치듯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나도 산티아고 길을 알아볼 때 여자 혼자 떠나는 걷기 여행 시리즈를 읽어보았다. 그리고 김남희 작가님이 연재하시는 글들을 통해 전 세계 트래킹 코스를 알게 되고 꿈꾸게 되었다. 그런 분을 이 스페인 시골 알베르게에서 그것도 봉사자의 모습으로 만나게 되다니. 내가 너무 놀라서 몸 둘 바를 몰라 하자 다른 한국인 분들도 네이버에 얼른 검색해보시고 다 함께 놀란다.


봉사자님이자 작가님은 이 길에서 너무 많은 것을 받아 가서 꼭 봉사를 하고 싶으셨단다. 그래서 여러 알베르게들에 메일을 보내서 이렇게 며칠씩 봉사를 하고 있다신다. 나도 이 길에서 많은 것을 얻고 받고 있지만 이렇게 봉사의 형태로 바꾸어 베푼다니 왠지 감동이었다. 내가 걸었던 르퓌 길에 대해서도 말씀드린다. 그렇게 이 한국인 테이블은 시끌벅적하게 수다를 떨었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순례자들은 잠이 들 시간. 묘하게 들뜬 기분으로 잠자리에 든다. 삐걱거리는 침대 소리를 배경음악 삼아 잠에 빠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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