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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소아 Jun 09. 2018

거슬리는 사람

50. 엄마랑 순례길 - 아스토르가의 새치기 쟁이

10월 28일

프랑스길 San Martín del Camino - Astorga 24.4km


오늘은 아스토르가로 향하는 날. 알베르게에서 제공하는 조식을 먹기 위해 일찌감치 일어나 자리를 잡는다. 아주 산더미 같은 음식들이 한쪽 테이블에 정리되어있었다. 

엄마와 나는 여유를 부리고 조금 늦게 출발하고, 다른 순례자들은 새벽부터 길을 나선다. 우리가 길을 나설 땐 아침 8시 언저리. 엄마가 다른 사람들 먼저 가 버렸다고 우리 늦은 거 아니냐고 불안해하신다. 어차피 다 길에서 만날 사람들이고, 도착지는 다 비슷비슷하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하고 말하니 봉사자님이 정말 맞는 말이라며 너털웃음을 터뜨리신다.


그렇게 알베르게를 떠나기 직전, 김남희 작가님이자 봉사자님과 함께 기념사진을 찍는다. 나와 찍은 사진은 작가님 얼굴이 보호받지 못해서 차마 올리지 못한다. 이렇게 마지막일 줄 알았던 작가님과의 인연은 정말 예상치 못한 곳에서 다시 이어진다.

아침에는 영 날씨가 우중충하다. 그러다 도착한 다음 마을에서는 거짓말처럼 하늘이 맑게 갠다. 다리를 건너기 전 엄마는 강을 내려다보며 여중생처럼 소리친다. 물고기 엄청 많아!

마을을 잠깐 둘러보며 뭔가 살까 고민했지만 그만두기로 한다. 물 한병 가득 다시 채우고 길을 다시 재촉한다. 오늘은 날씨가 심상치 않다. 아침부터 이렇게 하늘이 파랗고 맑으면 낮에는 분명히 불볕더위가 닥쳐오리라. 엄마에게 오후에 닥쳐올 더위에 대해 미리 말씀드린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어제 알베르게에서 함께 묵었던 젊은 부부도 만난다. 엄마, 내가 말했잖아 다들 길에서 만난다고. 그러니 엄마도 웃는다. 그러다 엄마가 나무 하나를 보고 외친다. 소아야 이 나무좀 봐봐 예수님 가시면류관이야! 올려다보니 가시가 사납게 뻗친 나뭇가지들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그렇게 길을 한참 걷다가 당이 떨어짐을 느낀다. 엄마랑 걸을 땐 일부러 꼭 멈춰 서서 먹는 것을 챙긴다. 나 혼자 걸을 땐 걸으면서 입에 아무거나 밀어 넣거나 아예 안 먹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당뇨가 있는 엄마는 확실히 당을 신경 써줘야 한다. 잠깐 비어있는 버스정류장에 앉아 누룽지를 먹는다. 그때 미국에서 왔다는, 브라질 태생의 아르투르 혹은 아서라고 소개한 할아버지가 우리 옆에 앉는다. 모녀가 온 것이 부럽다며, 인사를 건네고 먼저 길을 떠나신다. 간식을 먹긴 했지만 아무래도 점심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다음 마을에서는 식사를 해야겠다.

도로를 따라 올라가는 길로 아서 아저씨는 올라간다. 컨디션이 안 좋으셔서 잠깐 버스나 택시를 타시겠단다. 대충 훑어봐도 70은 훌쩍 넘어 보이는 나이에 대단했다. 엄마와 나는 오른쪽으로 꺾어 들어가 마을로 들어간다. 마을에는 알베르게 겸 바 몇 곳이 있다. 그중 아직 이른 시간인 12시에도 문을 연 곳으로 들어간다. 엄마는 보까디요를 절대 못 드시니, 또르띠야와 빵, 그리고 내가 먹을 보까디요와 음료를 주문한 뒤 화장실을 이용한다. 꽤 수더분한 느낌의 정원에서 식사를 마치고 나가며 엄마가 방명록에 글 하나를 남긴다. 김소아, 장 젬마 모녀는 다른 순례자분들의 행복을 기원했다. 엄마 덕에 나는 행복을 기원하는 착한 순례자가 된다.

저 큰길 한가운데에 개가 벌렁 누워있다. 죽은 줄 알았는데 우리가 지나가니 눈이 데굴 굴러가더라. 신경 쓰여 사진 한 장 찰칵.

나무를 보며 열렬히 뭔가를 이야기했던 엄마. 나중에는 엄마도 나도 무슨 얘기를 했는지 기억하지 못했지만.

외양간 하나도 지나가고.

조금 괴이한 공간이 하나 나온다. 돌탑이 있길래 엄마는 돌 하나를 올려놓고 기도를 한다. 시멘트 덩어리에 박혀있는 마네킹과 알 수 없는 조형물들. 날은 점점 더워지고 하늘은 점점 더 파래진다. 이 이상한 공간을 잠깐 구경한 뒤 길을 재촉한다.

하 오늘 인간적으로 너무 덥다. 땅은 끓어오르는데 하늘은 정말 구름 한 점 없다. 미세먼지와 황사 때문에 파란 하늘을 한동안 보지 못했다는 엄마. 하늘이 파란 건 좋은데 더워 죽겠다며 소리 지르시고는 성큼성큼 앞으로 질러가신다.

길을 걷다 가끔 만나는 돌무더기 화살표.

날씨는 정말 덥지만, 엄마가 걷는 모습은 그림 같다.

그렇게 길을 걷다가 이 근처 명물이라는 기부제 바를 발견했다. 잠깐 이곳에서 숨을 돌리기로 한다.

이 기부제 공간은 (조금 걱정되긴 하지만) 음료수들과 각종 과일들이 있고, 자신이 기부할 수 있는 만큼 기부하고 먹고 마실 수 있다. 엄마와 나는 적당한 금액을 내고 주스와 과일 몇 가지를 골라 먹고 그늘에 앉아 쉰다. 그네도 타고. 이 곳을 만드신 분으로 추정되는 분은 저 안쪽에서 또 다른 잘 만한 곳을 만드느라 바빠 보였다. 

그네 타느라 신난 나.


그때 눈에 띈 한 일행. 신부님 순례자로 보이는 분이 음료를 마시고 있는 게 보였고, 엄마는 아주 들뜨기 시작했다. 나를 앞세워서 사진 한 장 찍기를 부탁하는 엄마. 덕분에 신난 엄마와 신부님의 사진 한 컷을 얻을 수 있었다. 신부님은 미국에서 오셨다고. 행복한 순례를 기원해주는 신부님 덕에 엄마와 나는 기분이 좋아진다.

그렇게 아스토르가에 가까워질 무렵.

우리들의 모습을 박제해놓은 것 같은 동상 옆의 식수대에서 물을 보충하고.

아스토르가로 들어가는 길을 한참 걸어간다.

아스토르가로 도착하기 바로 전에는 정말 더웠다. 맥반석 오징어의 고충을 생각하며 철제 육교를 걸어 올라가 내려온다. 이글이글 끓어오르는 땅.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고 난리가 난, 몹시 시끄러운 순례자 무리를 지나쳐 아스토르가로 재빨리 입성한다. 이 시끄러운 인간들과 비슷하게 도착했다간 비슷한 방에 묵게 될 거야..!! 엄마와 나는 기운차게 언덕길을 오른다.

무사히 입성!


아스토르가 공립 알베르게를 들어가 보니 몇몇 순례자들이 체크인을 진행하고 있었다. 그 뒤에 작고 땡땡한 여자 하나가 다리를 떡 벌리고 앉아 서 있다. 영 거슬리는 사람이다. 체크인을 하려면 순서를 기다려야 한다길래 가방을 일렬로 놓은 곳에 나도 같이 놓고 기다리고 있는다. 어찌 된 일인지 숙소 체크인이 진행되지 않는다. 다리를 떡 벌리고 서서 허리에 손을 올리고 있던 그 여자가 봉사자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내가 왜 숙소 체크인을 진행하지 않느냐고 물으니 봉사자 왈, "이 사람, 친구들, 기다려. 당신 조금만 더 기다려." 응 무슨 소리야?


그 작고 땡땡한 여자(지금부터 HP이라 하자)는 스페인어로 봉사자에게 고맙다 등등의 뉘앙스가 느껴지는 대화를 하며 농담 따먹기를 하고 서 있었다. 미국에서 왔다는 HP. 나 이외에 다른 순례자들 네댓 팀도 그 여자가 버티고 서 있어서 체크인을 하지 못한 채 기다려야만 했다. 


분노 게이지 상승. "아니, 이게 무슨 일입니까? 온 순서대로 들어가야 하는 것 아닙니까? 그 아주 '소중하다는 친구들'이 금방 온다고 한 지 벌써 20분이 넘었지 않습니까?" 하고 봉사자에게 항의하니, 봉사자는 미안한 기색을 띄운다. 아차.. 영어가 그렇게 수월하게 통하는 것 같지는 않다. 봉사자가 뭔가 말하려는 참에 또 다른 순례자들이 급한 일로 부르는 바람에 이 분은 정신없이 다른 볼일을 보러 간다. 봉사자 수가 턱없이 부족해서 정신없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이미 온 순례자들은 체크인 해 주지 않고 HP의 아직 오지 않은 친구들을 기다려 함께 체크인을 허용하는 모양새가 아주 탐탁지 않았다. HP은 살금살금 내 눈치를 보고 있었다. 


40분쯤 지났을까. 이미 땀은 다 식고 기다리다 지쳤을 때, 그 HP의 소중한 친구들이 도착한다. 보아하니 엄마와 내가 마을 어귀에서 지나쳐온 시끄러운 무리들이다. HP는 봉사자에게 아주 유창한 스페인어로 우리 모두 함께 같은 방을 쓸 수 있게 해 달라고 했다. 빨리 들어가길 바랐는데 그놈의 소중한 친구들이 줄줄이 들어온다. 총 8명쯤으로 추정되었다. 많은 순례자들이 기다리고 있는 걸 그 소중한 친구들은 흘끔흘끔 보며 방으로 잇달아 들어간다. 참 나.


그 소중한 친구들이 들어갔는데도 HP이 다시 나온다. 아직 친구 하나가 덜 온 모양이다. 내 표정이 심상치 않았는지 HP이 봉사자에게 체크인을 하라고 말한다. 누가 보면 HP이 이 곳 사장인 줄 알겠다. 내가 언짢은 표정으로, 정말 소중한 친구들이 체크인을 끝내서 드디어 우리가 체크인을 할 수 있는 거로군요! 정말 멋진데요?라고 말하니 봉사자가 미안해한다. HP은 딴 곳만 보고 있다. 


그때 레온의 작은 성당에서 만났던 일본인 청년이 들어왔다. 그 친구도 HC의 소중한 친구들 무리인 모양이다. 솔직히 말하면 이땐 정말 싸울 작정이었다. "너도 '소중한 친구'여서 우리보다 먼저 체크인을 하니?'라고 말하니 그 청년은 펄쩍 뛴다. 아니니까 부디 먼저 하란다. 그러면서 그 일본인 청년은 기다리고 있던 순례자들 줄 맨 뒤에 가서 가방을 놓고 빈 대기석에 앉는다.


영 감정이 가라앉지 않는다. 봉사자에게 저 친구들이 없는 방으로 꼭 부탁드린다고 말한다. 봉사자는 영어가 거의 불가능한 분이었다. 봉사자는 대답 대신 엄마와 나를 한 방을 직접 보여주며 안내한다. 마침 침대 하나가 비어있던 그 방은 공립 알베르게답게 수많은 침대로 가득했지만 그 HP과 소중한 친구들은 없었다. 만족한다. 감사합니다 인사를 하고 침대 시트를 끼워 자리를 잡는다. 오늘의 이 분쟁은 며칠 동안 나, 엄마, 그리고 HP와 소중한 친구들 간의 작은 전쟁의 서막이 된다.


기분 나쁘면 맛있는 걸 먹어야 한다. 엄마와 나는 휴일에도 문을 연 가게를 구글로 찾아내 겨우겨우 디아를 찾아내고 길을 나선다. 그때 내가 잠깐 두고 온 것이 생각나서 알베르게로 다녀온다. 공원에서 기다리고 있던 엄마는 나에게 저기 휠체어에 앉아있는 사람이 입에 거품을 물고 난리가 아니다 하며 엄청 걱정한다. 결국 엄마는 근처 기념품 가게의 직원에게도 말해 직원은 그분에게 괜찮냐고 물어본다. 보아하니 그분에게는 일상적인 것 같았지만, 엄마와 나는 몹시도 놀라 안절부절못했다. 직원은 우리를 향해 안심하라며 씩 미소를 지어주었다.


엄마와 나는 장을 보러 간다. 맛있는 걸 먹어야 하는 나. 얇게 잘라져 있는 삼겹살을 발견한다. 오늘 저녁은 삼겹살과 고추장과 김치다! 

그 뒤 마을을 한 바퀴 돌며 구경한다. 초콜릿으로 유명한 아스토르가답게 사방에 초콜릿 가게가 있다. 살까 말까 고민한다. 살까 말까 할 땐 말자, 할까 말까 할 땐 하자가 내 모토. 결국 구매욕을 내려놓고 알베르게로 돌아가 저녁식사를 한다.

저녁식사를 하는 동안 이 순례길에 아주 능통한 순례자들의 이야기도 듣고, 편하게 저녁시간을 누리다 방으로 돌아간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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