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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력을 바라보는 인간의 민낯. <퍼니게임>
사람들이 자주 하는 말 중에 '세상에서 가장 재밌는 건 불구경, 싸움 구경'이 있다. 이 말에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은 없을 정도로 싸움 구경은 정말이지 재밌다. 로마시대의 검투사부터 오늘날의 UFC까지, 정도와 규칙만 달라졌을 뿐 우리는 여전히 싸움을 '소비'한다. 싸움은 다른 말로 폭력인데, 폭력은 우리 사회에서 불의(不義)한 존재로 알려져있다. 그럼 폭력을 어디까지 즐기고 어디부터 말려야 하는가. 사회에서 용인할 수 있는 폭력의 정도는 어느 정도이고, 우리가 지금 폭력을 대하는 방식은 옳은 것인가. 아니 애초에 우리는 폭력을 경계하는 의식을 갖고 살아가는가? 이 영화는 이유없는 일방적인 폭력을 2시간에 가까운 런닝타임 동안 보여주며 우리가 소비하는 폭력이 결코 가볍게 다뤄져서는 안될 문제임을 전해준다.
여름휴가를 맞아 별장을 찾은 앤(나오미 왓츠)과 조지(팀 로스) 가족은 해질녘 방문한 깔끔한 차림의 청년 피터(브래디 콜벳)를 맞이한다. 이웃이 보냈다며 달걀을 빌려달라는 그는 앤의 휴대폰을 물에 빠뜨리고 달걀을 깨뜨리는 등 미묘하게 그녀의 신경을 건드린다. 이내 피터와 같은 차림의 낯선 청년 폴(마이클 피트)이 등장해 가족의 심기를 더욱 불쾌하게 만들고 두 청년은 순식간에 조지의 다리를 부러뜨린다. 마침내 본성을 드러낸 두 명의 낯선 방문자들은 12시간 안에 일가족 모두 죽이는 게임을 벌이겠다고 엄포를 놓는데…… 이들은 대체 누구이며, 조지 일가족은 살해의 위협에서 살아남을 수 있을까?
내가 본 퍼니 게임은 2007년에 개봉한 미카엘 하네케 감독의 작품으로, 1997년 나온 같은 감독의 작품을 '그대로' 리메이크한 것이다. 기존 작품과의 차이는 극 중 인물들의 언어만 오스트리아어에서 영어로 바뀌었을 뿐, 모든 내용과 대사, 장면들의 싱크로율이 100% 일치한다. 영어권 관객들에게 원작을 제대로 소개하고 싶어서 이러한 방식을 택했다는 감독의 말을 통해, 감독이 이 영화에 담은 메시지에 강한 애착을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모든 장면이 일치하기 때문에 한 편만 보면 된다)
이 영화는 그동안 봐왔던 영화에 대한 클리셰적 공식을 모두 파괴한다. 웬만해서 애완동물과 아이는 살려두는 다른 영화들과 달리 강아지-아이-남편-아내 순으로 살인이 일어나고, 살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보여주는 모든 영화적 장치들은 아무 기능도 하지 못한채 사라진다. 어떤 배경음악이나 고속촬영도 없이 무심하게 비춰주는 주인공들의 죽음은 완벽한 악의 승리를 보여준다.
나는 이 영화를 보는 내내 불쾌함을 느꼈다. 평화롭게 살고 있는 가족들을 아무런 원한 관계도 없는 악당들이 와서 시종일관 희롱하고 때리고 죽인다. 당하는 쪽은 약하고( 강아지, 어린아이, 늙은 남성, 여성 ), 괴롭히는 쪽은 강하다( 건장한 젊은 남성 둘).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앤이 죽기 전까지, 악당들이 당하는 모습을 희망했던 내 기대는 악당들이 앤을 호수에 빠트려 죽이는 순간 같이 사라져 버렸다. 대체 감독은 왜 이렇게 시작부터 끝까지 고통스러운 영화를 만들어서 나를 괴롭히는지 묻고 싶었다.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고통스러운 것, 그것이 폭력의 본질이라는 것을 전하고 싶었던 것 같다. 헐리우드에서 관객들을 소리 지르게 만드는 주인공의 화려한 액션 또한 다른 위치에서 바라보면 그저 폭력이고 불편한 일이라는 생각을 관객들에게 심어주었다. 그러한 생각을 거부하는 사람들에게 <퍼니게임>은 다시 보고 싶지 않은 역겨운 영화일 것이고, 자신의 위선을 알아챈 관객들에게는 부끄러운 영화로 남을 것이다. 이러나저러나 <퍼니게임>은 관객들에게 참 불편한 영화이다.
문제적 장면 1
이 영화를 본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 리모콘의 되감기 버튼을 눌러봤을 것이다. 앤(부인)을 제외한 모두를 죽인 뒤 엽총을 앤 앞에 두고 자신들끼리 설전을 벌이며 방심하는 사이, 앤이 총을 잡아서 한 명을 쏴버린다. 맞은 놈은 그 자리에서 즉사하고 살아남은 놈은 앤에게서 총을 빼앗은 뒤 욕을 하며 뜬금없이 리모콘을 집어 든다. 악당이 되감기 버튼을 누르니 모든 상황이 총을 쏘기 이전으로 돌아가서 죽었던 악당은 살아나고, 그들은 웃으며 앤에게서 총을 빼앗는다.
희망을 가졌던 관객들을 조롱하는 감독의 웃음소리가 들리는 듯한 장면이었다. 그 장면을 영화가 끝난 뒤 곱씹어 보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악당이 죽는 장면에서 나는 왜 좋아했을까?'라고.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는 장면에서 엄청난 불쾌감을 느끼고, 죄 있는 사람이 죽는 것을 보고 통쾌함을 느끼는 것은 아무런 문제가 없는 것인가. 감독은 내가 오랫동안 옳은 일이라고 믿어왔던 무조건적인 권선징악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만들었다.
문제적 장면 2
두 악당은 종종 카메라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조롱 섞인 대사를 날린다. 마치 스크린 너머에서 우리가 지켜보는 것을 안다는 듯이, 이 살육은 자신들의 재미가 아닌 우리들을 위해 마련했다는 듯이. 저 때의 시선과 대사는 영화 속 폴과 피터가 아닌 감독이 관객을 향해 보내는 것이다. 미카엘 하네케 감독은 1997년에 오리지널 판을 만든 이유에 대해 헐리우드에서 폭력을 멋있게 묘사하는 방식을 비판하기 위해서라고 밝혔다. ( 같은 해에 개봉한 영화 중에 <펄프 픽션>이 있다) 또한 그러한 영화를 무분별하게 소비하는 관객들을 향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당신도 저들 편이죠.아니에요? 누구에게 걸 거죠. 저희한테? (영화 초반, 가족을 죽이는 게임을 시작하기 전 폴이 카메라를 바라보며 남긴 대사)
우리는 한결같이 선과 히어로의 편이었고, 그들이 악을 제압하는 폭력을 보며 환호해왔다. 히어로들이 총에 스치는 장면은 클로즈업해서 보여주면서, 수십 명의 악당 똘마니들이 죽는 것은 하찮게 처리한다. 우린 그걸 당연스럽게 여겨왔다.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 가족 세명과 강아지의 죽음을 그처럼 처리한다. 어떠한 배경음악이나 고속촬영 없이, 그저 인부가 쓰레기를 처리하듯 담담하게 살인 장면을 보여준다. 행위를 행위 자체로 판단하지 않고 행위자의 선악에 따라 판단하는 사람들에게 감독은 악당들의 몸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살인은 살인이야.
감독이 제목을 '퍼니'게임으로 정한 이유
감독은 관객들에게 웃지 말라고 말한다. 퍼니란 단순히 반어법이고 이 영화를 본 누구도 폭력을 '퍼니'하게, 게임처럼 생각하지 말아달라고 외친다.
그런데 요즘의 세상을 보면 언젠가 이 작품의 '퍼니'를 반어법으로 읽지 않는, 사자에게 잡아먹히는 검투사를 보고 즐거워했던 과거 로마 시민들의 모습이 미래에 나타날 것 같다. 두렵게도 그 날이 그리 멀게 느껴지지 않는다. 인간은 다 악한 면을 갖고 있다는 것. 자신이 얼마나 선한 본성을 갖고 있는지, 도덕책에서 배운 대로 자신이 진실로 폭력을 혐오하는지, 혹시 조금이라도 '퍼니'를 느끼지는 않았는지 알아보고 싶다면 이 영화를 통해 자신을 시험해보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