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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Jun 19. 2016

워크래프트

#5

영화에 있어서 작은 발걸음이지만 게임에 있어서 커다란 첫 도약입니다. - 록타르 오가르(Lok'tar ogar)- 


주말에 친구 세명과 같이 영화 <워크래프트>를 보러 갔다. 게임 워크래프트 2와 워크래프트 3을 즐겨했고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도 잠깐 해봤기 때문에 영화에 흥미가 생겼다. 가볍게 게임만 즐겼던 나와 달리 함께 갔던 친구들은 3명 모두 성골 수준의 워크래프트 덕후들이었다. 워크래프트 2,3의 캠페인( 스토리를 진행하면서 미션을 깨는 게임 플레이 )뿐만 아니라 WOW를 몇 년간 하며 게임 속 세계관을 우리나라 근현대사보다 훨씬 자세히 알고 있는 친구들에게 영화 <워크래프트>와 게임이 얼마나 연관이 있는지 물으니 영화는 게임 워크래프트 1의 역사(?)를 보여준다고 했다. 친구들에게 워크래프트 1은 너희도 모르지 않냐고 묻자 자신들은 나무위키와 각종 커뮤니티를 통해서 워크의 역사를 통달했다고 말하며, 이는 팬으로서 당연한 일이라고 했다.

94년에 발매된 워크래프트1


영화 스토리 & 감상평


영화의 내용은 워크래프트를 아예 모르고 봐도 될 정도로 간단하다. 서로 다른 종족인 호드(오크)와 얼라이언스(휴먼)의 대결이다. 자신들의 땅이 황폐화되어 다른 땅을 찾아야 했던 호드는 자신들의 지도자이자 어둠의 마법을 사용하는 마법사 '굴단'이 만든 포탈(다른 세계로 이동하는 문)을 통해 풍요로운 얼라이언스의 터전을 침범한다. 땅을 차지하려는 호드와 지키려는 얼라이언스는 종족의 존망을 걸고 전쟁에 들어간다. 그 사이에서 두 종족의 공존을 꾀하는 '가로나'와, 자신들의 땅을 오염시킨 게 '굴단'이라는 것을 깨달은 호드의 지도자 '듀로탄'이 얼라이언스의 지도자들과 연합하여 '굴단'을 치려는 계획을 세운다.

 

영화는 요즘 만들어지는 판타지 영화와 비교했을 때 스토리와 편집 부문에서 미숙함이 많이 보였다. 평면적인 선악구조와 뻔히 보이는 반전을 참고 보다가, 막판 '로서'와 '블랙 핸드'의  어처구니없을 만큼 싱거운 1대1 대결을 보고는 남아있던 영화에 대한 애정을 내팽개쳤다. '굴단'을 따르는 다른 호드들의 반응도 일관성이 없어서 극의 이해를 떨어뜨린다. 아니 왜 '굴단'이 '듀로탄' 죽일 때는 '굴단' 말을 잘만 따르더니, '굴단'이 '로서'를 죽이라고 할 때는 왜 반항하냐... 니들 동지가 '듀로탄'이지 '로서'냐 이 나쁜 놈들아!!

전쟁 씬의 웅장함은 10년 전 나왔던 반지의 제왕이 훨씬 압도적이고 다른 분야를 따져봐도 특별히 뛰어난 부분은 찾기 힘들었다. 내게는 두 번 보고 싶지는 않은, 그저 그런 킬링타임용 영화로 남을 것이다.   


산업별 역할의 구분이 사라지는 시대


위와 같은 수많은 흠결에도 불구하고, 올해 개봉했던 영화 중에 가장 큰 의미를 지닌 영화를 꼽으라면 주저 없이 <워크래프트>를 꼽을 것이다. 그 이유는 영화 내부가 아닌 외부에서 찾을 수 있는데, 게임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첫 번째 영화이기 때문이다. 물론 레지던트 이블, 히트맨 등 선례가 있지만 모티브만을 차용한 수준에 불과했고, 이처럼 게임에서 세계관을 통째로 가져온 적은 없었다. 캡틴 아메리카3을 만들었던 루소 형제는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의 영화가 갈수록 많아져서 기존 영화를 안 봤던 관객들은 어떻게 영화를 관람할 수 있냐고 묻자 "우리 영화는 오리지널 팬들을 위한 영화이다. 새로운 팬들을 위해 영화 앞에 20분 분량의 '지난 이야기'를 집어넣는다면 사람들이 지루함을 느낄 것이다."라고 말하며 더 많은 관객을 불러 모으는데 애쓰지 않고 기존 관객을 위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밝혔다.


MCU 영화가 기존의 코믹스 독자들 덕분에 탄생한 영화들이라면, <워크래프트>는 기존의 게임 유저들을 위해 만들어진 영화이다. 블리자드가 만든 워크래프트 1-2-3와 WOW의 세계관을 모르더라도 볼 수는 있지만, 이를 모르는 사람들에게 <워크래프트>는 그저 편집이 잘 안되고 일차원적인 스토리의 영화일 뿐이다. 속편을 기대하는 이유도 나와 같은 일반 팬들이 '영화의 내용이 무엇일지' 궁금해한다면 게임 팬들은 '영화의 세계관이 얼마나 원작과 일치할지'에 맞춰져 있다.


1억 6천만 vs 1억


<워크래프트>의 제작비는 1억 6천만 달러. 한화로 약 2000억 원에 달한다. 누군가는 이러한 거금을 들여 고작 게임 팬들을 위한 영화를 만든다고 비웃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 '고작' 게임 팬의 숫자가 1억이라면 어떨까? 영화는 중국에서 개봉 5일 만에 1억 5600만 달러를 벌어들였다. 미국에서의 흥행 부진을 만회하고도 남을 수치이다. 작품성에 대한 질타가 무색할만치 손익분기점을 우습게 뛰어넘었고, 원작 팬들이 속편에 대해 기대감을 갖게 만드는 데에도 성공했다.  

영화가 원작을 기반으로 만들어지는 것은 흔한 일이지만, 오랜 세월 영화가 자양분으로 삼은 원작의 종류는 소설이었다. 히어로 무비가 등장하면서 코믹스도 장르 간 협업에 합류했지만, 게임은 초대받지 못했었다. 게임은 오히려 영화의 2차 가공물을 생산하는 위치에 머물러왔다. 영화가 흥행하면 그와 관련한 게임을 만드는 '패스트 팔로워' 전략이 게임의 성공법칙이었다. 좋게 말하면 안전 추구이고, 나쁘게 비꼬자면 하이에나 같은 전략이다.

EA의 해리포터 시리즈. 영화가 흥행하자 게임으로 만들어졌다.

오랜 시절 이어졌던 영화-게임 간 선후관계가 <워크래프트>에서는 반대로 나타났고, 많은 관객들(대부분 게임 팬)이 영화를 관람하면서 <워크래프트>의 역 콜라보는 성공을 거두었다. 과연 <워크래프트>의 성공이 게임이 예술 산업군에서 차지하던 위상을 다르게 만들어줄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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