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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Jun 12. 2016

플래툰

#4

13년


미국이 베트남과 평화 협정(?)을 맺으며 사실상 자신들의 패전을 인정한 1973년. 그로부터 13년 후 미국에서는 한 편의 영화가 만들어진다. 정의로운 미국, 세계의 경찰이자 민주주의의 수호자가 아닌 잔혹한 침략자로서의 미군이 나오는 영화가 미국인의 손으로 탄생하니 이것이 바로 올리버 스톤 감독의 <플래툰>이다.


  


줄거리: 대학 생활의 권태로움에서 벗어나 영웅의 모습을 꿈꾸며 월남전에 자원한 크리스(Chris: 찰리 쉰)는 도착하자마자 죽어나가는 병사들을 보며 전쟁의 참혹함을 깨닫는다.

왼쪽이 나쁜 반즈, 오른쪽이 착한 엘리아스. 저 얼굴이 착하다니 믿기지 않는다..

크리스가 배치받은 소대에는 잔혹한 직업 군인 반즈 중사(Barnes: 톰 베린저)와 인간적인 성품을 지닌 엘리아스(Elias: 윌리암 데포)가 있다. 수색작전 중에 대원들이 부비 트랩에 폭사하고, 또 한 대원이 적에게 잔인하게 살해당한 사건이 일어난다. 전 대원이 분노에 휩싸이고 근처 마을의 촌장을 잡아 심문한다. 반즈는 심문 도중 말이 많다는 이유 하나로 촌장의 아내를 사살하고, 촌장의 딸에게 총을 들이대며 월맹군과의 내통을 자백하라고 한다. 이 광경을 본 엘리아스는 반즈에게 대들고 결국 둘의 주먹싸움으로 이어진다. 이 사건으로 부대는 반즈와 엘리아스, 두 패로 갈라진다. 평소에도 사이가 좋지 않던 둘은 이 사건으로 서로에게 살의를 느끼고, 다음 전투에 나가 적과 교전하는 도중에 반즈는 엘리아스를 총으로 쏴버린다. 부대는 후퇴하고, 죽은 줄 알았던 엘리아스가 겨우 목숨을 유지한 채 함께 후퇴하려는 도중, 쫓아온 베트콩에 의해 엘리아스는 죽음에 이른다.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 with <현을 위한 아다지오>

엘리아스의 죽음이 반즈와 연관이 있다고 믿은 크리스는 부대원들과 반즈를 죽일 계획을 세우지만 반즈에게 들켜 반즈의 원한만 사고 만다. 이후 전투가 벌어지자 반즈는 엘리아스처럼 크리스도 죽이려 들지만 실패하고 크리스는 결국 반즈를 죽이는 데 성공한다. 그 과정에서 부상을 당한 크리스는 본국으로 생환하며 영화는 끝난다.



<플래툰>은 '반즈'라는 나쁜 놈과 '엘리아스'라는 착한 놈이 전장에서 벌이는 갈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지만, 그보다 주목할 점은 이 영화가 미군들을 보여주는 방식이다. 그동안의 영화가 언제나 정의로운 '캡틴 아메리카'형 미군의 모습만을 보여줬다면, 이 영화에서는 난폭, 비이성, 잔혹한 미군의 실상이 드러난다. 민간인들을 서슴없이 죽이고 강간하기까지 하는 그들의 모습은 규율도 없고 폭력적이라는 말조차 무색할 만큼 잔인하다. 정의로운 인간의 상징으로 나오는 엘리아스 또한 베트남인의 시선으로 보면 그저 '덜 나쁜 놈'에 불과하다.


미국인들이 2차 세계 대전을 통해 갖게 된 군에 대한 자긍심은 실로 대단했다. 자신들을 세계에 공산주의를 막는 민주주의의 수호자라고 여겼고, 베트남 파병 또한 공산화될 위기에 놓인 베트남을 구하러 가는 정의로운 전쟁이라고 여겼다. (베트남 참전 초기에 대부분의 미국인이 파병을 지지하였다.) 그러나 그곳에서 벌어진 일은 정의와는 거리가 멀었다. 베트콩과의 연합을 의심하여 수많은 민간인들을 학살했고, 영화에서 나온 것보다 더 심한 약탈과 강간이 벌어졌다. 하늘에서는 대상을 고려하지 않고 네이팜탄과 고엽제를 투하하여 산림이 파괴되고, 사람들은 죽거나 후유증에 시달렸다. 감독인 올리버 스톤은 직접 베트남 전쟁을 참여하여 이 모든 실상을 직접 경험했다. 미군이 감추고 싶었던 모습을 직접 베트남 전쟁에 참여한 올리버 스톤이 까발린 것이다. 감독의 경험을 미루어보아, 이 영화는 감독이 보고 느낀 베트남 전쟁의 실상을 드러낸, 일종의 양심선언 다큐멘터리이다.

 

자신들의 치부를 드러낸 사람을 미국은 어떻게 대했을까? <플래툰>은 보수적으로 유명한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작품상과 감독상을 비롯하여 그 해 4관왕을 달성했다. 많은 시민들이 영화를 사랑해줬고, 그의 용기 있는 결단에 박수를 보냈다. 미국의 첫 번째 패전과 그 속에 담겨 있던 추악한 모습을 낱낱이 드러낸 영화를 미국은 너무나 '미국'스러운 방식으로 감싸 안았다.

물론 <플래툰>은 미국 정부의 입장이 아닌 '올리버 스톤'이라는 개인의 반성이지만, 자신들의 잘못을 자정하는 미국을 보며 미국이 왜 '그럼에도' 훌륭한 국가로 존재할 수 있는지를 엿볼 수 있었다.


우리는 우리의 <플래툰>을 만들 수 있을까


베트남 전쟁은 '대한민국'이라는 이름 아래 처음으로 전투부대가 투입된 전쟁이었고, 우리 에게도 뼈아픈 기억으로 남아있다. 30만 군인이 참전, 그중 5천여 명이 아까운 목숨을 잃었고 10만이 넘는 군인들이 부상을 당했다. 또한 미군이 뿌린 고엽제로 2차 피해를 받은 군인들 또한 부지기수이다. 그렇기 때문에 젊은 군인들이 청춘과 목숨을 바쳤던 베트남 전쟁은 우리에게도 상처이고, 그렇기에 더욱 잘못된 전쟁이라고 인정하는 것이 힘들지 모른다. 그러나 베트남에서 당시 우리 군이 베트남 국민들에게 자행한 많은 만행들이 반박할 수 없는 증거로 남아있다. 우리 군의 학살로 인해 한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고, 그 슬픔을 위로하는 추모식이 매년 베트남에서 열린다고 한다. 3만 명이 넘는다고 알려진 '라이따이한'들은 양국 모두에게 부끄러운 존재로 손가락질받는다. '어쩔 수 없었다, 힘의 논리에 의한 것'이라고 둘러대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우리의 피해는, 스스로 적기에도 두렵지만 '가해자'가 받은 피해에 불과하다.


전쟁이 끝나고 20년이 지난 뒤 한국과 베트남의 외교가 재개되었다. 그러나 재개될 당시에도 우리는 베트남에게 전쟁의 결과에 대해 사과하지 않았다. 당시 외교부 장관은 그저 "냉전시대에 일어났던 두 나라의 가슴 아픈 과거를 잊고, 앞으로는 미래지향적인 시각을 갖고 협력관계를 발전시키자"는 말을 남기며 과거를 무마하려고 했다. 과거를 잊고 미래로 나아가자는 말은 우리에게 낯설지 않다. 독도 문제, 소녀상 철거 등을 내세우며 자신들의 전범을 인정하지 않는 일본 정부가 우리에게 철마다 내세우는 논리가 바로 '미래지향적 관계'이다. 사과하지 않는 일본을 욕하는 우리들을 보며 베트남 국민들은 무슨 생각을 할지, 차마 알기가 두려워진다.

미국은 스스로의 민낯을 드러내는 데에 13년이 걸렸다. 과연 우리는 그럴 수 있을까. 우리를 먼저 괴롭힌 놈들이 사과를 안 하기 때문에 우리도 할 수 없다는 입장은, 우리가 늘 비난하는 그들과 같은 위치에 스스로를 놓이게 만든다.


<플래툰>은 미국인들뿐만 아니라 지금의 한국인들에게도 많은 질문을 남기는 작품이다. 꼭두각시 인형에 불과한 개인 혹은 국가에게 잘못된 전쟁에 뛰어드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주인공의 독백을 마지막으로 글을 끝내려 한다.

"이제 다시금 돌이켜보면 우린 적군과 싸우고 있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끼리 싸우고 있었습니다. 결국 적은 자신의 내부에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이제 나에게 전쟁은 끝이 났으나 남은 평생 동안 내 속에 남아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엘리어스도 반즈와 싸우며 평생 동안 내 영혼을 사로잡을 것입니다. 가끔씩 내가 그 둘을 아버지로 하여 태어난 아이 같은 느낌도 듭니다. 그러나 그야 어찌 됐든 거기서 살아남은 자는 그 전쟁을 다시금 상기해야 할 의무가 있으며 우리가 배운 것을 남들에게 가르쳐주고 우리들의 남은 생명을 다 바쳐서 생명의 존귀함과 참의미를 발견해야 할 의무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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