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하루천 Jun 05. 2016

아가씨

#3

스포일러 밭 주의


박찬욱 감독의 <아가씨>를 보고 왔다. 대부분의 영화는 최대한 무지의 상태로 보려고 한다. <아가씨> 역시 예고편도 보지 않은 채 소설 원작의 존재, 박찬욱 감독의 작품, 주연 배우 4명의 이름만을 사전 지식으로 갖고 감상했다. 


아름다운, 너무나 아름다운

영화 내용에 대한 리뷰를 하기에 앞서서, 영화의 시작부터 끝까지 나를 사로잡은 부분은 미술이다. 건물, 의상, 소품 모든 것이 이국적인 느낌을 나타내는 동시에 과하지 않았다. 새로운 느낌은 필연적으로 낯섦, 겉도는 느낌을 주기 마련인데 <아가씨>는 그런 느낌을 주지 않았다. 나뭇가지 하나하나 신경 쓴듯한 미술팀의 노력이 보이고, 미장센이 무엇인지를 잘 드러낸 영화였다.   


일제강점기는 숙희와 히데코에게 어제의 연속일 뿐이다. 역사가 아닌 여성에 초점을 맞췄다.

일본군들이 조선 시내를 걸어가고, 조선인 아이들이 그 뒤를 장난스레 쫓아가며 영화는 시작된다. 일본군들이 화면 밖으로 퇴장하고, 아이들은 계속 그들을 따라간다. 뒤이어 일본군이 칼을 꺼내는 쇳소리가 들리고 아이들은 놀라며 왔던 방향으로 도망간다. 그 자리에 아기를 안은 숙희(김태리 분)가 서있다. 강한 권력을 가진 일본군과 대비되는 약자로서의 여성이 부각된다.


첫 장면과 배우들의 일본어, 건축 양식과 대화를 통해 영화는 일제강점기를 배경으로 삼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일제강점기를 다룬 대부분( 100%라고 확신하지만 못 본 영화가 있으므로 )의 영화가 갖고 있는 애국, 독립운동, 반일 투쟁이 나타나지 않는다. 어림짐작으로 후견인이 한국인이지만 불법적인 방법을 이용하여 부를 얻은 친일파라는 것을 알 뿐이다.  

 숙희의 불행은 나라를 잃은 상황과 전혀 관련이 없다. 그의 어머니는 도둑질을 하다가 잡혀 죽었고, 고아가 된 숙희가 백작의 요청을 수락한 것도 독립운동 자금이 아닌 그저 돈을 벌어 현실을 벗어나기 위함이다. 그렇기에 숙희는 히데코를 일본인이 아닌 여자로 바라본다. 숙희는 히데코를 보살피며 '자신이 씻기고 돌본 아이 중 가장 예쁜 아이'라고 생각한다. 욕실에서 뾰족하게 튀어나온 이를 갈아주는 모습에서는 모성애마저 느껴진다. 나라를 빼앗은 원수가 아닌 자신과 비슷한 가여운 여자로 바라보는 것이다. 

히데코 또한 일본인이지만 조선인을 학대하거나 그들에게서 재물을 빼앗은 인물로 표현되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에서 그녀는 무기력하고 세상 물정 모르는, 나머지 세 주연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필요한 장식품으로 나타난다. 그녀에게 조선땅은 자신의 조국이 차지한 식민지가 아니라 그저 떠나고 싶은, 자신을 속박하는 장소에 불과하다. 그렇기에 히데코는 자신을 대신해 정신병원에 가두려고 데려온 숙희에게 흔들린다. 

 

숙희와 히데코는 서로를 찾은 목적이 똑같았다. 상대방을 이용하여 자신의 자유를 되찾는 것. 그를 위해 이중 스파이처럼 백작에게 의지했다. 그러나 서로의 빈 곳을 채워줄 수 있는 존재는 서로뿐임을 깨닫고 힘을 합쳐 백작을 속인다. 엔딩에서 둘은 조선도 일본도 아닌 누구도 자신들을 모르는 제3 국으로 떠난다. 히데코는 자신을 구속했던 장갑과 반지를 바다에 던지고, 자신을 학대하는 데 사용된 방울을 숙희와의 사랑을 나누는 도구로 사용한다. 과거 모든 것들과의 결별을 이뤄냈다.


나라를 되찾으려는 의지는 곧 자유와 힘을 되찾겠다는 뜻이다. 숙희와 히데코에게는 애초에 자유와 힘이 존재하지 않았다. 밤하늘에 구름이 한 겹 덧씌워진들 애초에 어두운 그들의 삶에 무슨 변화가 있을까. 


백작과 후견인, 홍상수 영화에서 소환된 남자들

영화에 나오는 남자들은 하나같이 찌질하다. 히데코의 낭독을 들으면서 저마다 흥분하며 상상하는 귀족들뿐만 아니라 주연인 후견인과 백작 또한 마찬가지이다. 두 캐릭터의 공통점은 히데코를 수동적인, 자신의 의지에 따라 조종할 수 있는 인물로 봤다는 것이다.


후견인인 코즈키는 히데코의 성격을 만들어주고, 숙희와 다른 캐릭터들을 행동하게 만드는 장치로 사용된다. 판을 짜기 위해 존재하는 캐릭터이다. 영화에서 그의 행동으로 인해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가 관심을 갖고 수집하는 책은 전부 춘화이다. 여성의 성기를 박제하고, 직접적인 성행위가 아닌 가학행위를 즐기는 성도착증 환자이다. 그는 자신에게서 히데코를 빼앗아 간 백작에게 히데코와의 성행위를 자세히 묘사해달라고 요구한다. 요구가 아니라 거의 애원 수준이다. 악랄한 외형에 비해 너무나 찌질하다.


백작은 후견인에 비해서는 상황을 통제하고, 똑똑한 인물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 역시 숙희와 히데코를 주체적인 의지를 가진 인물로 생각하지 않았다. 백작은 마지막 부분에서 그의 남성성을 지킨 것을 다행으로 여기고 자살한다. 그의 마지막 대사는 어리석은 동시에 많은 공감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A매치 경험이 없는 선수가 월드컵에서 골을 터트리다

주연 4명의 연기에 대한 짧은 감상평. 

하정우와 조진웅의 연기는 여기서도, 앞으로도 논할 일이 없을 것 같다. 당기면 과녁에 꽂히는 총처럼 그들은 항상 감독의 의도를 100% 만족시킨다. 

<화차>에서 소름 끼치는 연기를 보였던 김민희는 이번에도 순진무구한 부잣집 따님과 자유를 찾기 위해 주변을 속이는 이중적인 모습을 훌륭히 연기했다. <화차> 때는 '이 배우가 이렇게 연기를 잘했었나' 생각이 들었는데 이번에는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깜짝 주연으로 발탁된 '숙희'역의 김태리였다. 잠시 축덕인 나로 돌아가 밝히자면, 이번 시즌 앤써니 마샬이 맨유 데뷔전에서 골을 넣었을 때 받았던 충격과 같은 신선함이었다. 이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를 많은 분들을 위해 다시 말하자면, 김태리님 연기 잘해요. 훌륭하게.


단조로운, 조금은 단조로운

박찬욱 감독의 영화 중 플롯이 가장 단순하다. 변주는 존재하지만, 모두가 이해할 수 있는 친절한 변주이다. 반전에 모두가 놀라고, 결말에 모두가 기뻐할 수 있다. 엔딩 역시 그동안의 박찬욱식 비극이 아니라 디즈니식 해피엔딩으로 끝난다. 물론 이 부분은 단점이 아닌 변화로 볼 수도 있지만, 여전히 어색하다. 

매거진의 이전글 호우시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