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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Jun 04. 2016

호우시절

#2

서로 애틋한 감정을 품고 있는 모든 관계가 반드시 사랑의 결실로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상대방을 원하는 마음이 강함에도 삶의 방식이 달라 주저하거나, 다른 사람과 묶여있는 상대방을 위해 마음을 드러낼 수 없는 경우도 있다. 이럴 때는 사랑의 감정이 사라지거나 다른 이를 찾아 옮겨가기를 기다려야 한다. 소수의 인연들만이 연인이 되어 짧은 행복을 느끼고, 많은 이들이 때를 놓친 사랑 때문에 오랜 고통을 겪는다.


건설사 팀장인 박동하(정우성)는 중국 청두로 떠난 출장길에서 유학시절 짝사랑했던 메이(고원원)를 만난다. 이틀간에 짧은 만남 동안 지난날을 추억하던 두 사람은 예전에 이루지 못했던 사랑을 아쉬워하며 서로에 대한 연정을 드러내지만 이번에도 고백을 하지 못한 채 각자의 자리를 지킨다. 일을 마치고 돌아가려던 동하를 만나기 위해 메이는 공항으로 찾아가고, 동하는 그런 메이를 보고 귀국을 하루 미룬다. 다시 주어진 하루의 시간, 그들은 청두 곳곳에서 둘만의 추억을 만들며 행복해하지만 동하가 마음을 밝히려는 순간 메이가 숨겨왔던 비밀을 드러내며 둘의 관계는 다시금 균열이 일게 된다.


<8월의 크리스마스>, <봄날은 간다>등 정통 멜로 영화만을 만들어 온 허진호 감독의 5번째 영화인 <호우시절>은 사랑과 시간, 사랑과 기억에 대한 이야기이다. 전작들이 첫 만남에서부터 시작해 오랜 시간에 걸쳐 변해가는 사랑을 보여줬다면, 이번 영화는 과거에 좋아하는 마음만 지닌 채 연인이 되지 못했던 남녀의 재회를 3박 4일이라는 시간 동안 압축하여, 서로가 부재했던 시절과 현재의 사랑을 보여준다. 오랜만에 만나서 과거를 추억하던 둘은 각자의 기억 속에 다르게 남아있는 서로를 발견하고는 황당해하고 화를 낸다. 섣부른 오해와 의도된 왜곡들로 재해석한 과거를 통해 사랑을 못한 책임이 다른 사람에게 있다고 믿어왔다. 둘은 서로가 없던 시간을 그렇게 견뎌냈다. 다시 만날 날까지 견디는 동안 서로는 젊음의 빛을 잃었다. 동하는 시인의 꿈을 포기하고 고작 출장비 3만 원을 속이며 사는 소시민이 되었고, 메이 역시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아픔을 겪었다. 이제는 오래 신어 닳아빠진 운동화처럼, 누구의 시선도 받지 못하는 존재가 되었지만 이 역시 사랑이기에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간다.


암담한 두 사람의 현실에 비해, 감독은 비가 그친 하늘처럼 맑고 따뜻한 분위기를 연출하여 이들을 담아낸다. 봄에 촬영한 화면 때문만이 아니라 출연했던 배우들의 호연 또한 영화의 분위기를 만드는데 일조했다. 정우성은 꿈을 잃은 중년의 모습과 장난기 넘치는 소년의 이중적인 모습을 편안히 보여줬고, 고원원은 씩씩한 외면 속에 감춰진 아픔을 담담히 연기했다. 유일한 조연이기도 한 눈치 없는 지사장 역을 맡은 김상호는 위트 있는 연기를 맛깔나게 소화하여 영화에 유머러스한 분위기를 심어줬다. 첫 만남의 장소였던 두보초당의 대나무 숲부터 마지막 하루를 보내며 만난 동물원의 판다와, 시장의 밤거리는 촬영 장소가 대지진의 아픔을 간직한 장소라는 것을 잊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 전작에서라면 관계의 종언을 나타냈을 메이의 마지막 고백도 <호우시절>에서는 서로가 부재했던 시간을 설명하고 감싸 안는 매개체가 되었다.


20대를 시작하는 시기에 이 영화를 처음 봤었다. 7년이 지나 나는 20대 후반이 되었고, 다시 본 영화는 보다 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점점 영화 속 그들의 나이와 상황에 가까워지고 있다. 다시 또 7년이 지난 후 이 영화를 본다면 그때는 어떤 기분일지, 지금 짐작하는 그때의 기분을 실제로 느낀다면 많이 슬퍼질 것 같다. 


갑작스러운 비를 피하기 위해 도착한 처마 밑, 애틋한 분위기 속에서 메이는 동하에게 묻는다. ‘꽃이 피기 때문에 봄이 오는 것일까? 봄이 오기 때문에 꽃이 피는 것일까?’ 좋은 비는 때를 알고 내리지만, 사랑은 때를 가리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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