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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루천 May 29. 2016

아는 여자

# 1

(처음 브런치를 시작할 때 정한 주제는 '영화'였다. 하루 한 글은 평일에 쓰고 주말에는 영화 리뷰를 쓰고자 한다.) 


영화는 사람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 유용한 도구로 쓰인다. 타인의 관심사, 지적 수준, 심지어는 정치적 성향을 파악하는 데 있어서도 영화는 그 자체로 훌륭한 질문이 된다. 바꿔 말하면,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말한다는 것은 남에게 나를 드러내는 일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같은 질문을 받더라도 질문을 하는 사람의 배경이나 나와의 관계에 따라 카드 게임을 하듯 그때그때 적절한 패(대부분 그들이 원한다고 생각하는 답)를 찾아 답한다. 


그러나 누가 물어도 달라지지 않는 답이 하나 있는데,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뭐냐고 물을 때마다 나는 <아는 여자>를 말한다. 계절이 돌아오듯 삶의 어느 절기마다 다시 찾게 되는 영화. 어딘가에 영화에 관한 글을 쓴다면 늘 <아는 여자>를 먼저 써야겠다고 생각했었다. 추억을 뒤적거리며 <주말의 영화> 첫 리뷰로 <아는 여자>를 적어본다.   

영화랑 안어울리는 포스터이다.

스토리는 짧게.

실연을 당하고, 3개월 시한부 선고를 받은 동치성(정진영)에게 한이연(이나영)이라는 처음 보는 여자가 다가온다. 그 뒤로 둘은 데이트 비스무리한걸 하면서 가까워진다. 어리둥절한 남자. 여자가 왜 자신에게 다가오는지 모른다. 어차피 얼마 못가 떠날 인생,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사는 동치성 앞에 끊어진 줄 알았던 인생의 길이 다시 이어진다. 집어던졌던 모든 것을 어떻게 수습해야 할지 모르는 치성은 술을 마신채 한이연에게 찾아가 버럭버럭 소리를 지르고, '한이연'은 취한 그에게 다가가 한마디 한다. '사랑한다'고


더 짧게 말하자면, <아는 여자>는 사랑에 관한 영화이다. 인트로부터 엔딩까지, 엑스트라부터 주연에 이르기까지 영화에 나오는 모든 사람과 장면들이 저마다 가지고 있는 사랑의 정의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 많은 정의를 종합하여 사랑을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사랑은 정의될 수 없는 감정이다. 백이면 백 동의를 구할 수 있는 사랑의 정의가 존재할까. 백 명은 고사하고 자신의 정의를 듣고 고개를 끄덕여줄 사람이 하나라도 있을까.


영화는 로맨틱 코미디 영화로 분류되지만, 남자에게 있어서는 로맨틱 판타지가 더 어울리는 영화이다. 사랑이란다. 좋아하는 것도 아니고, 썸 좀 타보겠다는 것도 아니고 자그마치 사랑을 했다고 한다. 이나영=한이연이. 누군가를. 10년 동안이나. ‘변변치 않은 남자를 오랫동안 사랑해주는 여자’라는 설정만으로도 현실과의 거리가 지구와 화성만큼 멀어지는데, 그 여자가 다름 아닌 이나영이라면 아무리 CG가 발달 한들 이보다 더한 판타지를 만들 수 있을까. 스페이스 X가 내일 당장 화성으로 사람을 보내는 게 더 현실성 있을 것이다.  

영화 속 이나영은 그녀 인생 최고의 연기를 선보이며 사랑스러운 모습을 만개한다. 좋아하는 연예인이 누구냐고 물어보면 항상 이나영을 이야기하는데, 그 대상이 이나영인지 영화 속 '한이연'인지 솔직히 스스로도 모르겠다. 


<아는 여자>는 '내 영화'를 떠올릴 때마다 항상 첫 번째였다. 앞으로도 달라지지는 않을 것 같다. 그 이유는 우습게도 잊어버렸다. 영화 속에서 10년 동안 '동치성'을 사랑하면서 어느 순간 사랑하게 된 이유를 까먹은 '한이연'처럼 나도 <아는 여자>가 어쩌다 최고가 됐는지 잊어버렸다. 영화는 영화이고, 내가 까먹은걸 보면 애초에 대단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저때의 내가 좋았거나, 처음 가본 영화관이 준 느낌이 강렬했거나, 어쩌면 그저 이나영이 예쁘게 나와서일지도 모른다. (써보니 이게 가장 확실한 이유 같다...) 

확실한 것은 연기나, 작품성 때문에 좋아하지는 않았다. 그 뒤로 소름 돋는 열연이 나온 영화, 거장들의 걸작들을 많이 봤다. 온갖 산해진미를 맛 본 미식가가 어린 시절 먹었던 미역국을 가장 그리워하듯이 내게는 <아는 여자>가 그런 영화가 되었다.


계속 쓰자니 끝이 안 날듯 싶다. 그냥 영화를 다시 한 번 봐야겠다.


(장진 감독의 장점은 그가 작문에 있어서 천재적인 감각을 지녔다는 점이다. 단점은 천재적인 감각의 존재를 본인도 확실히 인지하고 있다는 점인데, 간혹 (사실 <아는 여자>를 제외한 대부분의 영화에서는) 주체 못 할 만큼 샘솟는 천재성을 꾹꾹 눌러 담아 피로감을 주는 대사와 장면들이 나타난다. <아는 여자>를 몇 번이고 다시 찾게 만드는 이유는 그러한 부담감이 없는, 장진이 힘을 빼고 만든 영화이기 때문이다. )


좋아하는 장면

#1.
 극장에서 이연(이나영)이 치성(정재형)에게 아는 여자가 많은지 묻자 치성은 그쪽 하나라고 말한다. 기쁨을 참지 못하고 이연이 웃는다. 
#2.
영화의 하이라이트. 구글에서 캡쳐된 사진만 봤는데 사진 속 대사, 목소리 톤까지 전부 기억이 난다. 진짜 몰라서 물었을까. 이후 이연의 입에서 나오는 한 마디. 몇 번을 봐도 마음이 찌릿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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