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 가을
가을다운 가을날이었다. 하늘은 시리게 파랗고 볕은 쨍쨍했으나 바람은 시원했다. 한적한 평일 아침, 청량리역에서 2시간반을 달려 도착한 풍기역앞은 낯설면서도 낯설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크고 번쩍번쩍한 기차역이 아니라 동네 버스터미널만큼이나 정다운 기차역이었다. 작은 광장 너머에는 오래된 식당과 좌판이 열려있었다. 아침부터 부지런히 나오신 할머니들이 드문드문 계셨다.
그곳에서 다시 버스를 타고 덜커덩 거리며 약 40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부석사였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금강산 앞에두고 요기부터 하기로 했다. 산채비빔밥을 하는 한 식당에 들어가 곧 몰려올 단체 손님 예약 테이블 건너편에서 혼자 밥을 먹었다.
이렇게 자뭇 쓸쓸한 여행을 하고 있는 까닭은 시험 후 버킷리스트를 지우기 위해서이다. 부석사 가보기. 그것을 맘속에서 지워내기 위해서다. 이것은 버킷리스트기도 하고 숙제이기도 하며, 혹은 의식같은 것이기도 했다.
불과 몇 개월전만해도 나는 공무원 시험 준비생이었다. 책상과 나와 책만이 씨름을 해대던 무료하고 지루하던 수험생활이었다. 하루 종일 누구와도 이야기를 나누지 못해 내 목소리가 낯설어져 버리곤 했다.
그날, 한국사 인터넷 강의를 듣고 있었다. 고려시대 건축양식을 설명하던 강사는 시험이 끝나면 꼭 부석사에 가보라고 신신당부했다. 가는 길과 주변경관도 아름다운 절이지만, 우선은 절대 뒤를 돌아보지 말고 무량수전까지 가야하노라고. 그리고 이름도 유명한 무량수전 앞에서 뒤를 돌아보면 소백산이 눈앞에 펼쳐지는 장관에 마음이 시원해질것이라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설명하는 강사의 말에 맘이 뺏겨버렸고, 그날부터 시험이 끝나고 해야 할 일 1순위는 부석사를 찾아가는 일이 되었다.
시간은 흘러서 힘겹게나마 시험은 끝이 났고, 결과는 나오지 않았지만 나는 부석사 입구에서 밥을 먹고 있었다. 이제 오를 차례였다.
절 입구에 자리잡은 일주문부터 이어지는 흙길의 양 옆으로 노란 은행나무가 줄지어 있었다. 은행 나무 너머는 사과밭이 천지였다. 사과는 붉게 익어가고 있었고 길가에는 사과즙을 바구니에 쌓아놓고 파는 노점들도 있었다. 과실을 맺고 있는 가을 밭을 지나 천왕문에 들어섰다. 경내에도 오르막이 이어졌다. 층층이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었고 가장 위쪽에 위치한 무량수전까지 나는 계속 계단을 올랐다. 마침내 '봉황산부석사'라고 적힌 현판을 지나 무량수전 앞에 도착했다. 가파른 계단에 숨이 가빠서였는지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수험시절부터, 오늘 아침부터 한참의 기다림 끝에 맞이한 모습은 그야말로 장관이었다. 부드러운 산줄기가 앞서거니 뒷서거니 굽이굽이 이어져 끝이 없었다. 그리고 그위로 펼쳐진 구름 한 점없는 파란 하늘. 가슴이 시원해지는 장쾌한 광경이었다.
감탄을 그치고 등뒤에 자리잡은 무량수전으로 들었다. 한적함을 즐기고 있자니 왜 이곳에 가야 한다고 말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쾌청하고 시원하게 마음이 빗질되는 느낌이었다. 좁은 집안에서 매일 반복되었던 공부와 불안함, 외로움이 먼지 털리듯 날아가는 것 같았다. 금세 평안함과 안정을 주는 절이었다. 과연 천년고찰이라!
아쉽지만 당일에 서울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는 걸음이 빠듯했다. 다시금 눈 앞에 펼쳐진 공중정원을 감상했다. 산줄기들이 내 발밑에서 딴 세상을 말하듯 태연하게 있었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절에서 내려와 기차역으로 가는 버스를 기다렸다. 종점인 버스정류장에는 영주 관광안내 지도와 함께 느린 우체통이 있었다. 엽서를 써서 우체통에 넣으면 1년후에 배달을 해준다고 했다. 잠깐 고민하다가 버스 시간도 좀 남았고해서 나는 엽서를 한 장 챙겼다. 근처 벤치로 가서 펜을 들었다. 그리고 1년후의 나에게 짧은 편지를 썼다. 엽서에 집주소를 쓰고 우체통에 넣은 후, 부석사 출발 버스를 탔다.
이렇게 첫번째 '시험이 끝나고 해야할 일' 리스트를 지워냈다. 어느덧 가을, 겨울이 지나고 이제 봄도 지나가려 한다. 나는 지나간 계절만큼이나 달라진 곳에서 달라진 생활을 하고 있다. 곧 봄도 지나고 여름이 지나면 가을이 오리라. 그럼 그때 부석사 밑에서 쓴 그 엽서도 오겠지. 자고로 이런 편지는 잊고 있어야 반가움이 커질 것이나, 어째서인지 나는 가끔 그 엽서를 생각하고 몰래 기다리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