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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윻윻 Feb 07. 2022

01. 스스로 선택하는 삶

보다 보니 보이는:대장금으로 읽는 내 주변 여자 이야기

대장금 덕후가 대장금으로 본 여성서사 첫 번째 이야기는 이 드라마가 시작될 수 있었던 장금이와 어머니에 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대장금에서 장금이의 어머니 박명이는 2화 밖에 출연을 안 나오는데도(!) 드라마가 끝나는 거의 마지막 순간까지 그 존재감을 드리우는 캐릭터다. 

(*장금이 어머니 이름이 나와서 알려드리는 막간 TMI: 장금이는 대씨가 아니라 서씨다.) 


드라마 대장금은 크게 1부와 2부로 나눌 수 있는데 1부와 2부를 관통하는 가장 큰 대주제는 장금이 억울하게 죽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 중에서도 어머니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수랏간 최고 상궁이 되는 것이다. 


극 초반, 자신을 헤치려는 세력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고, 삶이 얼마 남지 않은 슨간, 명이는 장금에게 그동안 숨겨왔던 자신의 과거에 대해 알려준다. 그리고 앞으로 장금이 혼자서도 살아갈 수 있도록 마지막 수업 같은 유언을 남긴다. 처음 볼 때는 몰랐는데 다시 보니 이 때 박명이 씨가 장금에게 남긴 말들이 드라마가 끝나는 순간까지 장금에게 인생의 나침반 같은 역할을 하는 대사가 많았다. 그 중에서도 인상 깊었던 대사는 이것이었다.


장금이의 고생길이 열리게 되는 메인 퀘스트 수락의 순간


하기 싫거든 언제든 버리거라 넌 네가 하고싶은 것을 해야 하니


이 대사는 명이가 장금에게 나중에 읽어보라며 남기는 편지에 덧붙이는 대사다. 이 편지에는 명이가 장금에게 숨겨왔던 자신의 과거에 대한 내용이 담겨있는데, 수랏간 최고상궁만 물려받는 책에 자신처럼 억울한 사람이 생기지 않도록 자신의 사연을 남겨 달라는 것이 유언 겸 부탁의 요지다.

이 장면은 명이의 목소리로 들으면 눈물이 찔끔 나오므로 꼭 드라마를 통해 확인해 보길 추천한다.


장금이는 저 편지를 읽고 궁으로 들어가 그 모든 일을 겪게 된다. 이렇게 한 사람의 인생을 뒤흔들 만한 내용이 담긴 편지를 유언으로 남기는 저 인물이 나였다면 어땠을 지를 생각해봤다. 언제 숨이 끊어져도 이상하지 않은 상태로 저런 중요한 편지를 남기면서, 읽어보고 언제든 내키지 않으면 이런 부탁 따위 잊어버리고 네가 하고픈 일을 하라고 쿨하게 말할 수 있을까? 아무리 상상회로를 돌려봐도 나는 조금 많이 구질구질하게 굴었을 것 같다. 


그리고 내 주 변에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해보니, 내 인생을 통틀어 쿨(cool)함으로 다섯 손가락안에 드는 엄마 생각이 났다. 만약 그녀라면 똑같지는 않더라도 제법 쿨하게 대처하는 게 가능할 것 같다. 본 투 비(Born to be) 홍대 피플로 살며 서울에서 대학을 다니다 읍내로 나가는 버스가 하루 서너번밖에 없는 시골로 시집을 온 나의 엄마 최혜경 씨는 여러모로 신기한 엄마였다. 




“엄마, 아기는 어떻게 생겨?” 라는 질문을 했던 여섯 살, 혜경 씨는 “이제 때가 됐다”며 그 즉시 옆에 있던 스케치북과 크레파스로 1시간 동안 성교육을 해줬다. 여섯 살짜리가 이해를 하면 얼마나 한다고 그렇게 자세히 알려줬는지. 그런데 아직까지도 그 날을 떠올리면, 날씨, 냄새, 어쩐지 조금은 신나 보이던 엄마의 얼굴과 목소리까지도 선명히 기억나는 걸 보면, 역시나 혜경씨가 옳았다. 


그런 혜경씨가 어린 나에게 가장 많이 한 말은 “그러게 왜 그럴까? 너는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데?”였다. 물론 모든 순간 그랬던 것만은 아니었지만(엄마도 엄마가 처음이니까) 되도록 많은 순간에 혜경씨는 내 생각을 궁금했다. 내가 점점 커가면서 질문 핑퐁이 꽤 길어지자 혜경씨는 어느 날 다 쌓으면 내 키보다 클 만큼 24권짜리 백과사전 전집을 사왔다. 그리고는 “이제부터 엄마한테 묻기 전에 그 책을 먼저 찾아보고, 그래도 모르겠으면 그때 질문하는거야. 알겠지?” 라고 백과사전과 답변 업무를 나눴다. 


빨리 답을 얻고 싶던 어릴 때는 ‘엄마는 다 아는 어른인데 그냥 바로 알려주면 안되나’라는 생각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오빠와 나는 백과사전 날개가 뜯어지도록 펼쳐보며, 뽕을 빼 엄마와 아빠의 지출을 흐뭇하게 했다. 그리고,  혜경씨가 백과사전을 보며 모르는 단어가 나올 때마다 쪼르르 달려오는 오빠와 나에게 준 해결책은 국어사전을 사주고, 사용법을 알려준 것이었다.


이런 의외투성이 혜경 씨가 내가 대학에 가기 전까지 귀에 못이 박히도록 했던 말이 두 개 있었는데 “대학은 꼭 서울로 가”와 “때 되면 결혼하고, 이런 건 하나도 중요하지 않아.”라는 말이었다. 옆 집 숟가락과 다음 끼니 메뉴까지 알고 있는 동네에 갇히지 않길 바라는 마음 반, 당신의 딸이 자신처럼 결혼으로 마음껏 날개를 펼치지 못할까 걱정하는 마음에서 했던 말이었다.

(결혼을 안한 지금도 그다지 날개를 활짝 펼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조금 후회하시는 것 같지만)




장금의 어머니인 명이의 저 대사가 나에게 스며든 이유도 어릴 때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었던 이런 혜경씨의 말들 때문이 컸다. 언제나 나의 의지와 스스로 생각하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하게 했던 말들 말이다. 혜경씨도 나이가 들고 예전 같은 쿨함은 많이 미지근해졌다. 하지만 혜경씨가 나에게 남긴 것만 것 아직도 또렷하게 남아있다. 


언젠가 “엄마, 어릴 때 내가 뭐 맨날 물어보면 질문으로 방어하다가 나중에는 백과사전 사줬잖아. 엄청난 전략이었어”라고 웃으며 말하자 돌아온 대답이 의외였다. “어릴 때 네가 말이 너무 많았는데 어느 순간 질문이 너무 많아져서 일일이 대답하기 귀찮기도 해서 사줬는데, 너는 방법만 알려주면 어떻게든 답을 찾더라고.” 


혜경씨의 그런 말과 노력들은 ‘여자’로 살아가는 나의 생에 ‘결혼’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라 나의 의지에 따라 ‘선택’이 가능한 부분이라고 생각할 수 있게 해줬다. 그리고 지금 내가 속한 세상이 나를 구성하는 전부라고만 생각하지 않게도 해줬다. 그리고 이것이 내 생애 처음으로 만난 페미니스트에게 배운 가장 큰 가르침이다.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의 ‘의지’에 따른 ‘선택’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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