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흐와 함께 떠나는 음악 여행' 후기
한 동생이 음악회를 추천했다. 음악에 관해서는 영 무지했지만, 음악회의 타이틀이 눈에 들어왔다.
고흐와 함께 떠나는 음악 여행
마임과 미술, 그리고 음악의 어우러짐. 무법의 폭군들은 하나의 세계에서 병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양립 가능성은 세르게이 디아길레프Serge Diaghilev가 20세기 초반에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발레에 열정을 쏟았고, 그 덕분에 춤, 음악, 회화를 동시에 다루는 흥행사였다. 스트라빈스키의 <봄의 제전>은 디아길레프의 덕이 컸다. 광의의 의미에서 모든 것들을 통섭하는 관념은 작금에 이르러 다소 힘을 잃기는 했지만, 여전히 우리에게 사유의 단초를 제공해준다.
고흐가 비극적 예술가의 전형인 것은 대다수가 알고 있다. 자해를 했고 극심한 빈자의 생활로 자존감은 바닥으로 추락했으며, 결국 자살했다는 사실은 그 주체가 예술가였다는 요소 때문에 비극이 희석된다. 고흐의 삶은 지극히 서정적이고 디오니소스적이다.
그러나 서사의 형식, 사실로서의 기술은 아폴론적 요소를 내포한다. "예술의 발전이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니소스적인 것의 이중성과 결합되어 있다"고 말한 '비극의 탄생-니체'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서사의 형식상에 드러난 아폴론적 규칙 내에서 일어나는 디오니소스적 요소를 인식해야 할 것이다. 또한, 음악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표면상의 아폴론적 요소에 은폐된 디오니소스적 충동을 바라보아야 한다.
반 고흐의 일생이라는 서사적 구조의 틀 안에서 고개를 내미는 서정적 요소들은 하위징아의 표현을 빌리자면 아곤적(경쟁적)이다. 이러한 아곤적 요소들을 음악회가 어떻게 담아냈을지 궁금했다.
음악회는 반 고흐의 일대기를 다루며, 그 시기에 걸맞은 작품들(대부분은 인상주의)이 스크린에 제시된다. 작곡가는 고흐의 삶을 회화로 대체하고, 그 속에서 찾아낸 것으로 추정되는 기의를 다시금 음악으로 치환한다. 해체된 서사의 조각들은 음악에서 서정성을 획득한다.
소극장에서 이루어지는 이 음악회의 정 중앙에서는 마임이스트(이두성 씨)의 연기가 덧붙여진다. 마임 또한 유리드믹스eurhythmics라고 간주한다면, 이러한 조합은 이질적이지 않다.
결국, 나는 음성언어와 문자언어에 덧붙여진 춤, 음악, 회화의 예술적 에크리튀르의 십자포화를 맞았다. 텍스트가 제시하는 표상을 음악이 재현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진 요소들을 발견하기 위해 사유가 잠시 머무를 때, 음악과 춤은 이미 저만치 멀리 떨어져 가버렸다. 이것은 생각이 느린 내 모자람의 탓이리라. 나는 아직 음악이 익숙하지 않다.
바그너는 모든 위대한 예술이 신화를 기반으로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른바 총체예술Gesamtkunstwerk의 개념이다. 반 고흐 개인의 삶에서 신화적 요소를 발견할 수 있을까. 혹은 본질적으로 미들브로Middlebrow인 것일까. 그 발견은 관객의 몫이기도 하다.
사람들은 당대에 큰 성공을 거두어 오래오래 행복하게 잘 살았더라는 예술가의 이야기를 식상하게 느낀다. 방탕과 방종, 비극적인 결말로 점철된 모딜리아니의 삶을 우리는 어느 정도 동경하며, 살바도르 달리가 과감하게 지적했듯, 예술가들조차 예술가에게 자본의 추구는 악덕이라고 선언하는 경향이 있다.
고흐가 그랬듯, 대다수 예술가는 '생'에 대한 투쟁과 동시에 '생계'에 대한 투쟁을 영속해야 한다. 예술가의 지위는 르네상스에서 정점을 찍고 연일 추락 중이다. 산업자본과 결탁하지 못한 예술은 저편에서 파국이 손짓한다. 예술가는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거나 머지않아 인지하게 된다. 순수문학만을 추구하는 작가 지망생은 쌀이 없어 굶어 죽었다.
언젠가 사람들은 내가 다른 이들과는 달리 우리가 태어난 세기의 일부를 해석하는 타고난 사명을 완수했음을 이해할 것이다. 그 사실을 비로소 이해한 이들은, 동시대인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내가 그렇게 살았다니 유감스럽다고 글을 쓸 것이다.
그런 글을 쓰는 이들은 지금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이 나를 이해하지 못하듯이 동시대에 살고 있는 나같은 사람을 역시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그들의 증조부 세대에게만 쓸모 있는 것을 배우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로지 죽은 이들을 상대로나 바르게 사는 법을 가르칠 수 있다.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과학의 발전은 언제나 예술에 영향을 끼쳐왔으나 그 역은 성립한 적이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술가는 예술가 자체로 남는 것 이외에는 방법이 없다. '다다가 그랬듯이 페시미즘으로부터 예술형식이나 철학을 만들어낼 때조차도 결국 나중에 남는 것은 예술형식이나 철학이지 페시미즘이 아니다.' - Peter Wats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