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문화회관 - 호안 미로 展 후기
세종문화회관에서 호안 미로의 말년 작품이 전시 중이다. 꽤나 오래전에 방문했는데, 게으름으로 인해 기록하지 못하고 있었다. 묵혀놨던 생각들을 지금에서야 하나씩 풀어헤쳐 본다.
호안 미로는 초현실주의자로 불리지만, 키리코나 달리, 에른스트처럼 죽음의 암시를 뿜어내지 않는다. 예술의 전당에 전시된 달리의 작품과 놓고 보면 그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그러나 미로는 '환각상태, 혹은 최초의 불꽃이 없으면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는 점'에서 초현실주의자의 자격을 갖췄다.
제 그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 저한텐 어려운 일입니다.
항상 환각 상태에서 작품을 만들기 때문입니다.
그의 말년 작품은 기표의 흔적만이 남는 것처럼 보이는데, 이는 큐비즘이 추구하는 해체와 근본적으로 다르다. 미로의 선은 아라베스크를 연상시키는 구석이 있다. '선이야말로 평등과 겸손의 상징이며 오류가 있을 수 없다'는 생각, '서예는 그리스도교 성화와 마찬가지'라는 아랍의 관념은 그의 손에서 부활을 꾀한다.
다만 차이가 있다면, 우린 스스로 신을 죽여버린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이제 순수한 추상은 신이 죽어버린 시대에서 인간을 초월로 인도하는 안내선이다. 완전한 무방비상태, 원시의 상태에서 그의 작품과 마주한다면, 로스코적 환희와 열광에 휩싸일지도 모르겠다.
출발점은 완전히 비이성적이고, 격정적이며, 무의식적이고 야수처럼 돌진하는 것이다. 그러나 다음날, 혹은 20년 후에 이는 별 상관이 없게 되어버린다. 차분히 가라앉은 머리로 냉철하게 바라보게 된다. 지성의 시간인 것이다. - Joan Miro
그가 작품을 개시하도록 만든 최초의 열정을 장님처럼 더듬고, 말더듬이처럼 말하고, 한 번도 쓰이지 않은 언어로 끄적거림으로써, 이미 잿더미로 化한 초월 관념을 불쏘시개로 잠시간 뒤적거려본다.
너희는 불씨가 다 사그러진
벽난로 앞으로 걸어갔지
지상을 비추는 유일한 빛
시체 같은 달빛
너희는 쌓여 있는 잿더미에
창백한 손가락을 밀어넣었지
찾으며 만져보며 붙잡으며
다시 한 번 불타오르기를!
<Das Jahr der Seele - Stefan George>
선의 관념은 필연적으로 언어적 사유를 환기한다. 그의 작품을 회화적 에크리튀르라 간주한다면, 그는 표음 문자 언어의 우선권을 철저하게 짓밟고 로고스 중심주의에 사망선고를 내린 사형집행인이다.
언어는 자신의 한계가 소거된 것처럼 보이는 순간에도, 또 언어가 자신에 대해서 안주하는 것을 멈추고, 언어를 초월하는 것 같았던 무한한 기의에 의해 언어가 포함되고 억제되는 것을 멈추고, 가장자리에 테두리가 둘러지는 것을 멈추는 바로 그 순간조차, 언어는 자신의 고유한 유한성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 자크 데리다
그의 에크리튀르는 음성을 언어로 옮기는 과정을 생략하며, 한계가 없는 메시지를 담은 운반체로 기능한다. 승리에 도취한 상황에서, 관람객은 탈구성화된 기표의 지시사항을 마음껏 탐색하는 놀이에 착수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그의 저서에서 위와 같은 표현을 사용한 바 있다. 절대적 미의 이데아는 진작에 약탈당했다. 그럼에도 다양한 미의 경험은 여전히 유효하며 유익하다. 필리노스가 제시한 경험론의 세계는 아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셈이다. 이는 그의 작품에서 익숙함을 찾으려는 불안한 눈빛으로 현현한다.
미로는 다다의 원칙을 정확하게 꿰뚫었다. 우연의 호소와 천진난만함, 모든 것을 비웃는 것. 우린 그에게 배반당하지만, 곧 그의 작품에 드러난 의식적 추를 새로운 형식적 미의 세계로 재편함으로써 긴장을 해소한다. 혹은 모든 것을 향해 조소를 날리고 전시장을 빠져나오는 방법도 있다. 즉, 다다를 거부하길 원한다면 다다이스트가 되어야한다.
예술 작품은 미를 재현할 필요가 없다. 미는 죽었다. 행복도 슬픔도 빛도 어둠도 나타낼 필요가 없으며, 축복의 후광을 쓴 과자를 대접하거나 대기를 가르는 경주의 고역을 줌으로써 저마다의 성격들을 환대하거나 혹사시킬 필요도 없다. 예술 작품이란 법에 의해서 객관적으로 혹은 만장일치로 아름다운 것이 결코 아니다. - 트리스탄 차라
우린 예술가들에게 어떠한 요구도 하지 않았으며, 다다의 예술가들은 예술가 자체로 남는 것밖에 달리 방법이 없었다는 점을 상기해본다. 미로의 작품들이 놓인 공간은 전시장이라기보다 성찰과 사유의 캠프에 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