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부산행' 관람 후기
아무 생각 없이 봤다. 근데 자꾸 뭔가가 훅 들어온다. 그러니 쓸 수밖에 없다. 영화 후기인지라 스포일러가 있으니 아직 못 보신 분이라면 뒤로가기를 누르셔야 한다.
방역에 대한 불신으로 시작하는 영화의 첫 장면은 쓸데없이 친숙하다. 조류독감과 구제역, 그리고 비교적 최근의 메르스까지. 우린 이 끔찍한 사건들을 직접 목격했지만, 그 기억들을 떨쳐내려 애쓰며 살고 있다. 어쨌든 우린 생존했으니까.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방역에 근본적으로 불신이 깔리는 이유는 (심지어 아주 잘 대응한 방역일지라도) 아이러니하게도 엄청나게 발달한 현대의 교통-운송체계 덕분이다. 이제 모든 세계는 하나로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비유가 아니다. 우린 중동에서 발생한 질환이 국내에 상륙한 메르스 사태를 겪지 않았는가.
문명의 발달에 수반하는 과학의 발전은 질서와 동시에 취약함을 불러일으킨다. 1900년대에 발생했던 쿠바 미사일 위기는 인류가 '멸망과 생존 사이의 외줄타기'를 하고 있다는 걸 증명한 사건들 중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겉보기엔 최첨단을 달리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인류는 사실상 당장이라도 미친 놈들에 의해 멸망할 수 있는 통제 불능의 무력한 사회를 만들어냈다.
쿠바 미사일 위기
1962년 미소 냉전 시기, 소련이 쿠바에 핵미사일을 배치하려는 것을 미국이 포착하고 선제타격을 하려던 사건. 이 와중에 소련이 핵미사일을 미국으로 발사했다는 잘못된 정보가 발생하여, 미국이 소련을 향해 핵미사일을 발사할 뻔했다.
영화 부산행에서 정부는 좀비 바이러스를 과격 폭력시위로 규정하며 사태의 확산 방지를 약속한다. "터무니없는 유언비어에 대응하지 마시고...국민 여러분의 안전에는 이상이 없습니다"라는 상투적인 문구는 완벽하게 한국적이다. 한국전쟁 중, 대한민국의 국부라 불리는 분이 한강철교를 친히 그렇게 폭파하셨으니까.
도시에 사는 우리는 은연중 공포를 느낀다. 철저한 익명의 사회, 밀실의 공포, 지극히 내밀해진 직장 예절. 현대인은 질서에 더욱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승무원의 스카프가 45도 돌아간 것은 있어서는 안 될 일인 것이다. 그렇게 해야만 잠시간 공포를 떨쳐버리고 안정감을 느낀다.
모든 것은 잘 굴러가고 있다.
혹은 그러한 느낌을 갖는 것은 사회를 굴러가게 하는 선결 요건이다. 최고 시속 300Km로 달리는 거대한 KTX의 출발을 위해 기관사는 관제의 지시를 따르고, 승무원들은 매뉴얼대로 행동한다. 그러나 재앙은 언제나 매뉴얼의 아주 작은 균열에서 출발한다. 부산행 KTX의 재앙은 급작스럽게 들어온 하나의 좀비로 인해 발생하지 않았는가. 덕분에 스카프가 45도 돌아간 것 따위는 신경쓸 필요가 없어졌다.
목표 없는 목표의식
부산행의 기관사는 유독 강력한 목표의식을 가지고 있다. 온갖 난리에도 초연한 자세를 유지하고, 부산이라는 지리적 목표를 향해 질주하는 그의 행위는 숭고하게까지 느껴진다. 그는 관제에서 시키는 대로 대전에 정차한다. 하지만 결과는 좋지 못했다. 이런 사건을 겪으면 관제를 불신할 법도 한데, 또다시 관제에 따라 부산으로 향한다. 그의 목표는 부산에 도착하는 것이었을까, 혹은 최대한 많은 승객을 살리는 것이었을까. 아니면 부산에 가는 것이 최대한 많은 승객을 살리는 길이라고 생각했을까.
기관사가 다른 행동을 취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상상은 어리석다. 가정법 과거와 과거완료는 인간을 비참하게 만드는 문장이다. 어찌 되었든 그는 시키는 대로 일을 진행했으며, 생존객들 중 오직 두 명만이 살아남았다.
모든 것은 시키는 대로
영화의 기관사처럼 지시사항을 이행하는 것은 현대의 불문율이다. 영화 초입의 직장 씬에서 주인공은 상부의 지시사항을 잠시간 거스르지만, 곧 순응한다. 그리고서는 김 대리의 반박을 "개미 입장까지 생각하면서 일하냐"고 일축하며 상황을 역으로 재현한다. 경영진이 아니고서야 개인의 생각은 회사 차원에서 아무런 영향력을 갖지 못하며, 가져서도 안 된다. 이러한 확고한 매뉴얼에서도 균열은 여지없이 발생한다.
팀장님 이거 유선바이오에서 시작됐대요. 이 난리가 난 거랑 우리랑 상관 없는 거죠? 이거 제 책임 아닌 거죠? 우린 시키는 대로 한 거잖아요.
김 대리의 전화는 주인공의 증권회사에서 작전을 걸어 살린 유선바이오가 이 모든 재앙의 시작이었음을 관객에게 알린다. 김 대리는 자신의 잘못이 아니란 말을 듣고 싶어 했지만, 그의 떨리는 목소리는 이미 스스로가 사건의 주체 중 일부임을 눈치채고 있다. 사측은 사원에게 책임이 없지만, 개인은 사회에 도덕적 무한책임을 가지게 되는 불균형. 이것은 사회에서 성공적으로 은폐한, 절대로 피할 수 없는 개인의 불행이다.
그럼에도 우린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다. 회사에서 잘리거나, 왕따를 당하거나, 라인에서 밀려나 반강제로 퇴사를 하고 싶지 않으면 말이다. 개인의 사고와 윤리는 희석되고 오직 기업집단의 사고만이 남는다. 말초적 감각에만 반응하는 좀비는, 거대한 플라스크에 불가항력으로 중화된 현대인의 무언가에 관한 알레고리이다.
개인의 도덕률
좀비물에는 좀비가 핵심 주제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우스갯소리가 있다. 좀비물에서 일어나는 긴장은 극한상황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이기심과 이타심의 팽팽한 대립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더는 좀비를 인간으로 보지 않는다면) 인간과의 대립구도는 AMC에서 방영하는 유명한 좀비 드라마인 '워킹데드'의 스토리를 이끌어나가는 주 요소다.
'남에게 해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개인의 이익을 추구한다'는 말은, 굳이 철학을 들먹이지 않고서도 학생 시절 도덕 수업 때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이다. 부산행의 주인공은 善도, 惡도 아닌 전형적인 사회상을 갖고 있다. 그러나 그가 세웠던 도덕의 원칙은 딸에 의해 반박당한다.
주 - 그냥 각자 알아서 하는 거야.
딸 - 아빠는 자기밖에 몰라. 그러니까 엄마도 떠난 거잖아요.
마동석과 함께 딸을 구출하러 가는 장면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연출된다. 마동석은 공유의 직업(펀드매니저)을 언급하며 이렇게 말한다.
마 - 그럼 잘 알겠네. 쓸모없어지면 그냥 버리고 가는 거.
대립의 정점은 소위 상무인 남자가 속한 앞칸 그룹과(이하 상무 일행) 공유 일행의 대치상황이다. 한나 아렌트의 '악의 평범성'을 들먹거리기는 어려워 보인다. 상무의 판단은 사실 이성적으로 문제가 없어 보이기 때문이다. (이후 좀비에게 먹이를 던지는 식의 행동을 제외한다면)
구해? 상처 하나 없이? 감염 안된 거 확실하냐고!
그의 말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상무 일행은 그에게 동조의 눈빛을, 공유 일행에게는 경멸을 눈빛을 보낼 수밖에 없다. 상무 일행이 죽임을 당한 것은 권선징악이 아닌 비극적 결말이다.
모든 것이 파괴되고 원시로 회귀한 사람만이 '사랑'을 재발견하는 역설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왜 인류는 아포칼립스가 와야만 가족의 소중함을 깨우치는 것인가. 세계가 멸망해야만 '사랑'과 '가족애'를 찾을 수 있을 만큼 그것이 심오하고 어려운 주제인지는 개인마다 차이가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자신이 사랑하는 약자의(임신부, 여자아이, 썸녀) 수호자를 자처하며, 이들을 보호하다 여지없이 모두 죽어버린다. 어쩌면 인류가 빚어낸 '좀비로 인한 비현실적 아포칼립스'를 현실적으로 만드는 요소는 이런 진부함일지도 모르겠다.
좀비 영화에서 소재로 삼을 수 있을 만한 것들은 제한되어 있다. 부산행은 그 제한된 것들을 잘 버무려서 내놓은 기본에 충실한 좀비 영화처럼 느껴졌다. (좀비와 사랑에 빠진다는 소재 하나가 누락되어 있지만...) 이 정도면 좀비라는 불가항력이 만들어내는 장송곡을 상영시간 동안 잘 연주해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니까 한 줄로 요약하자면, '참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