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갈. 달리. 뷔페 展 -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지극히 개인적인 정리
<샤갈. 달리. 뷔페 展>이 예술의 전당에서 6월 26일 열렸다. 1900년대 모더니즘의 기수였던 이들의 작품을 한 곳에서 볼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행운이다. 셋 모두 자신만의 서사를 만들어낸 예술가이기에, 내 비루한 집중력으로는 한 명을 설명하기에도 힘에 부칠 게 틀림없다. 그러니 우선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정리부터 해봐야겠다.
'살바도르 달리'라는 이름을 들으면 우리는 즉각적으로 두 가지의 이미지를 떠올린다. 우스꽝스럽게 하늘로 치솟은 수염, 동그랗게 뜬 두 눈. 달리는 한 TV Show(Merv Griffin Show, 1965)에서 호스트의 질문을 받고 재치있게 답한다. (이번 전시에서 그 TV Show를 볼 수 있다.)
Host : That's a handsome mustache, Sir. Has it always turned up?
Dali :In the night, I clean my mustache, becoming completely depressed.
이번 전시회의 티켓은 달리가 주인공인 것마냥 그의 수염을 형상화한 디자인을 채용했다. 달리는 자신을 대중에게 각인시키는 법을 알고 있었다. 수염이라니, 아무튼 달리의 시도는 성공을 거두었다. 사람들은 이런 달리의 피상적인 이미지를 기억하고 열광하고 있으니까. 하지만 그의 작품세계는 인간의 무의식에 침투하기 위해 전진한다.
자신을 유일한 초현실주의자라고 칭한 살바도르 달리. 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최초의 출발점으로 회귀해야 한다.
문명이 잿더미가 될 것을 예상이라도 한 듯, 낭만주의는 진작에 종언을 고했다. 인간 존재는 1차 세계대전으로 인해 다시금 반추를 강요당했다. 이 와중에 프로이트는 인간의 정신을 과학의 반열에 올리려 노력했고, 무의식은 예술가들의 거대한 담론으로 자리 잡는다. <꿈의 해석>은 출간 후 6년간 351부밖에 팔리지 않았지만, 그 끝은 심히 창대했다.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자면 당시 생성된 모든 문화는 프로이트적이었다. 작가 토마스 만의 <베네치아에서의 죽음>은 원시적 이드를 표현하고, D.H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은 명백한 오이디푸스적 소재를 갖고 있다. 또한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저자 프루스트는 자신의 대작을 '무의식에 관한 일련의 소설'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정신분석에 순수한 감명을 받은 사람이었다. 1차 세계 대전 당시 브르통은 정신병원에서 위생병으로 환자들을 돌보며 프로이트의 <꿈의 해석>을 처음으로 접한다. 프로이트에게 온전히 감동한 그는 훗날 <초현실주의 선언(1924)>을 통해 새로운'-ism'을 제시한다. (그는 기욤 아폴리네르의 'sur-reality' 표현을 차용했다.)
초현실주의(Sur-realism) : 말이나 글, 혹은 다른 어떤 방식으로든 정신의 실질적 작용을 표현하기 위해 사용하는 순수하고 심리적인 자동기술. 이성에 의한 어떠한 통제도 없고 일체의 심미적, 또는 도덕적 선입견을 넘어서고 초월한 상태에서 사고에 의해 기술된다.
초현실주의는 한 단계 우월한 현실이란 개념에 바탕을 두고 있으며, 꿈의 전능함, 사고의 무관심적 유희에 관하여 지금까지 간과해 왔던 특정의 연상형태와 관련되어 있다.
앙드레 브르통은 무의식과 예술을 규합해 초현실주의를 창시했다. 이 운동은 단순히 시각적인 혁명을 추구하는 것이 아닌 문화 전반에 걸친 혁명을 추구했기에, 부르주아를 비판하는 마르크스적 노선을 걸었다. (앙드레 브르통은 파리 공산당의 지원가이자 트로츠키주의자였다.)
카리스마를 발산하는 앙드레 브르통을 중심으로 수많은 예술가들이 그의 운동에 동참한다. 초현실주의는 앙드레 브르통, 폴 엘뤼아르, 루이 아라공 같은 시인들의 주도로 시작되었지만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떨치게 된 것은 화가들에 힘입은 바가 크다(Modern Mind, Peter Watson). 피카소 또한 그러했으며, 브르통은 피카소를 두고 '입체주의 속의 초현실주의자'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운동에 자연스럽게 합류한다. 그의 동료이자 조언자인 호안 미로는 진작에 초현실주의 운동에 합류했고, 달리를 파리로 이끌었다. 달리는 1929년 폴 엘뤼아르(초현실주의의 아버지격)와 르네 마그리트 등을 만나는데, 폴 엘뤼아르를 따라온 그의 부인-갈라를 보고 첫눈에 반하게 된다. 갈라도 달리가 맘에 든 모양이었는지 엘뤼아르와 이혼하고 달리와 재혼한다. 그렇게 달리는 초현실주의의 아내를 거칠게 빼앗고, 그녀를 자양분 삼아 초현실주의자가 된다. 그 자양분이 너무나도 달콤한 모양이었던지, 달리의 스펙트럼은 회화사의 위아래를 탐색할 뿐만 아니라 범제적이기까지 하다.
1930년대 초반 달리는 '편집광적 비평 방법'을 창안한다. 그는 편집증으로 인해 생겨나는 수많은 이미지의 연쇄를 통해 하나의 오브제에 다양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음을 강조한다. 특히 그가 프랑수아 밀레의 작품인 <만종(1857-1859)>에 집착했다는 점은 대중에게도 널리 알려져 있다.
나에게는 밀레의 <만종>이 돌연 존재했던 어떤 그림보다도 가장 불안하고 가장 수수께끼 같고, 가장 밀도 높으며, 무의식적 사고를 가장 많이 담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처럼 보였다.
- Salvador Dali
고귀하게 여겨졌던 밀레의 만종이 달리에겐 다르게 보였다. 교미를 기다리는 사마귀 같은 자세를 하고 있는 여인, 모자로 발기한 성기를 감추고 있는 남자, 자신들 앞에 묻혀 있는 죽은 아들을 향해 있는 자세. 실제로 루브르 박물관에서 시행된 엑스레이 촬영에서는 밀레가 그렸다가 지운 것으로 추정된 아이의 관 형태가 보였다고 한다.
달리는 '편집광'답게 그의 작품에 <만종>을 우악스럽게 구겨 넣는다. 그의 작품 <페르피냥 역(1965)>(가장 오른쪽 아래의 그림)의 가장 가운데에는 면류관을 쓴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지만, <만종>의 남자와 여인은 거칠게 성교를 하고 있다.
나는 페르피냥 역에서 일종의 우주적인 황홀감을 경험했다. 그것은 우주의 생성과 똑같은 환영이었다.
- Salvador Dali
달리의 캐비닛은 이번 예술의 전당에 전시된 작품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주제이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에게 큰 빚을 지고 있으며, 달리 또한 마찬가지였다. 달리의 캐비닛은 프로이트에게 바치는 일종의 헌사인 셈이다.
불멸의 그리스와 우리 시대의 유일한 차이점은 지그문트 프로이트다. 그는, 그리스인들의 시대에는 전적으로 신플라톤주의적이었던 인간의 신체가 오늘날에는 정신분석만이 열 수 있는 비밀로 가득한 서랍이 되어 버렸다는 것을 발견했다.
- Salvador Dali
초현실주의자들은 꿈과 무의식, 욕망과 충동을 강조함으로써 이성을 거부했다. 하지만 이것은 프로이트의 의도가 전혀 아니었다. 오히려 그것과 정반대로 프로이트는 무의식을 과학적, 객관적으로 설명하려 노력했던 학자였다(비록 성공하진 못했지만). 따라서 프로이트가 초현실주의에 대해 다소 부정적인 견해를 취했다는 사실은 놀랍지 않다.
초현실주의는 프로이트가 실제로 쓴 내용보다는 초현실주의자들이 프로이트의 의도라고 생각한 것에 힘입은 바가 크다. 꿈이나 영원한 꿈꾸기의 '화석화된 형식'으로서의 노이로제 같은 브르통의 관념이나 노이로제를 '흥미로운' 신비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상태로 보는 초현실주의자들의 관점은 프로이트에게 호응받기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노이로제가 정신의 어두운 측면이고 우리 자신에 관한 위험한 진실이 숨어 있는 장소라는 주장은 결국 20세기적 형태의 낭만주의에 불과했다.
- Modern Mind, Peter Watson
하지만 프로이트도 달리에게만큼은 지대한 관심을 가졌던 듯하다. 결국 달리와 프로이트는 1938년 런던에서 마주한다. 달리는 자신의 편집광적 비평 방법을 적용한 <나르시스의 변형(1937)>을 프로이트에게 보여줬다. 프로이트와의 만남 이후 달리는 그의 그림을 여러 차례 그린다. 그리고 1년 후, 프로이트는 사망한다.
달리는 초현실주의 그룹에 합류한 이후 성공 가도를 달렸다. 그러나 곧 초현실주의자들과 극적인 갈등이 생긴다. 1934년 그가 출품한 <빌헬름 텔의 수수께끼(1933)>의 인물이 레닌과 닮았다고 브르통이 주장했기 때문이다. 달리는 일종의 신성모독을 한 셈이었다. 브르통은 결국 1936년 달리를 초현실주의 그룹에서 축출했다.
달리가 말한 '미치광이' 문장은 그를 설명할 때 자주 인용되지만, 사실 이 말은 초현실주의 그룹과 결별한 시기에 그들을 겨냥해 한 말이다.
미치광이와 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초현실주의자들과 나의 유일한 차이점은 내가 초현실주의자라는 것이다.
- Salvador Dali
1940년 달리의 화해 시도가 있었지만 브르통은 화해를 받아들이지 않으며, 달리의 철자를 교묘하게 바꿔 그에게 Avida Dollars라는 별명을 안겨준다.
나는 달러를 좋아한다. 그게 뭐가 나쁜가?
브르통의 쪼잔한 행동에 달리는 이렇게 응수했다. 심지어 라이프 매거진에 아래와 같은 사진도 촬영한다.
아비다 돌라스(Avida Dollars), 그것은 위대한 시인의 작품이라고 하기에는 어려웠다. 그렇지만 당시 나의 야망을 표현하기에는 충분했다.
- Salvador Dali
두 천재의 만남은 진작에 이루어진 바 있다. 어린 시절의 달리는 파리에 있는 피카소의 집을 방문하고 이렇게 대화를 시작했다.
Dali : 루브르보다 먼저 선생님을 뵈러 왔습니다.
Picasso : 잘하셨소.
달리는 <피게라스의 소녀> 한 점을 피카소에게 보여줬고, 피카소는 15분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달리를 위층으로 데려가 그림을 여러 개 보여주었다. 달리는 그 그림들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피카소의 집을 나왔다. 그리고 현존하는 최고의 화가로 피카소를 꼽았다(나중에는 자신으로 바꾸지만). 피카소와 달리는 초현실주의에 몸담았으며, 동시대인으로서 같은 문제적 상황을 마주했다.
조르주 바타유는 <애처로운 게임(1929)>에서 이렇게 말한다.
피카소가 그린 그림들은 소름이 끼치고 달리의 그림들은 무섭도록 추하다. (...) 만약 폭력적인 움직임이 한 존재를 뿌리 깊은 권태에서 해방시키게 된다면, 그것은 그 움직임의 모호한 오류가 뭔지 아는 사람의 손을 거치면서 만족스러운 끔찍한 추를 낳기 때문이다.
- George Mathieu
달리는 피카소와 자신을 언급하기도 했다.
피카소의 작품에는 낭만적인 마술이 존재한다. 다시 말해, 근본적인 변화에 근거하고 있다. 반면 나의 경우는 전통에 토대를 두어야만 만들어질 수 있다. 나와 피카소는 전혀 다르다. 그는 아름다움보다 추함을 추구하지만 나는 반대로 항상 아름다움을 추구한다. 하지만 피카소나 나와 같은 천재들에게 추한 아름다움과 아름다운 추함은 모두 천사와 같은 것이 될 수 있다.
- Salvador Dali
1900년대 초 피카소, 기욤 아폴리네르 등을 위시한 아방가르드는 조화를 창조하는 데는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제도화된 질서의 파괴를 추구했고, 잠재의식의 깊은 곳을 탐구했다. 1917년 장 콕토, 피카소, 에릭 사티, 레오니드 마신은 공동으로 <퍼레이드>를 만들었고, 장 콕토는 이 작품을 '일종의 초현실주의'라고 평가한다.
살바도르 달리 또한 바쿠스제, 트리스탄과 이졸데, 미궁 등의 공연 의상과 무대를 맡은 바 있다. 특히 1941년 초연한 '미궁'의 안무를 피카소와 함께 작업했던 레오니드 마신이 담당했다는 사실이 흥미롭다.(레오니드 마신은 발레 루스의 대표이자 최고의 흥행사였던 디아길레프의 안무가였으니 이것은 당연한지도 모르겠다. 디아길레프는 스트라빈스키의 걸작 <봄의 제전> 덕에 일약 스타가 됐다.)
스페인은 1936년부터 3년 동안, 좌파 기반의 민주정부와 프란시스코 프랑코를 중심으로 결집한 우파 반란군 사이의 지독한 내전을 겪었다. 그 와중 파괴되어버린 바스크의 작은 마을인 게르니카는 피카소의 소재가 된다.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 내전이 시작되기 6개월 전, 아래의 그림을 그렸다. 분리된 팔과 발, 그리고 서로를 짓밟고 으스러뜨리는 모양새, 그리고 '내란의 예감'은 적중했다.
살바도르 달리는 세계대전과 스페인 내전 등 거대한 사건을 경험했지만, 평생동안 기회주의자로 보일 정도로 정치와 혁명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앙드레 브르통과의 결별은 이러한 요인도 작용했으리라. 피카소가 "나는 공산주의자며, 나의 그림은 공산주의자의 그림이다."라고 했던 것과는 크게 비교된다.
한스 제들마이어는 <중심의 상실(1948)>에서 초현실주의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초현실주의는 가면을 완전히 벗어 던졌다. 부끄럼 없이 신과 사람을, 죽은 자와 산 자를, 아름다움과 도덕을, 구조와 형상을, 이성과 예술을 모두 비방하기에 이르렀다. 겉보기에 학문적으로 보이는 정의는 사실은 혼돈의 정의에 지나지 않는다. 초현실주의도 이 점을 부정하지 않으며, 실제로 <혼란의 체계화(살바도르 달리)>를 찾고 있다고, 즉 파괴를 추구해 가는 것이라고 공언한다. 초현실주의는 인간이나 예술의 추락에서 그저 최후의 촉진 현상에 불과하다.
제들마이어가 주장하는 바대로 초현실주의자들은 下를 의미하는 'sur'를 上으로 착각한 것일 뿐일까? 그렇다고 하기엔 초현실주의 미술이 가졌던 파급력이 너무나 컸다. 전쟁 앞에 미쳐버린 사람들은 이성의 종말을 선언하고, 편집증과 불길함만이 그들에게 남았던 세계. 그런 세계를 표현하는 데 초현실주의만큼 적절한 대안이 또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이번 예술의 전당의 <샤갈, 달리, 뷔페 展>에서 달리 전시장은 훌륭했다. 다만 도록은 역대 최악으로 형편없이 제작되었고(전시된 살바도르 달리에 대한 작품이 대부분 빠져있으며 조악한 스크립트로 아까운 종이를 낭비한다.), 2014년 <르누아르에서 데미안 허스트까지>에서 전시됐던 살바도르 달리의 작품 설명을 토씨 하나 빠뜨리지 않고 그대로 적은 건 2년 전의 전시를 기억하고 있는 내게는 성의 없어 보였다.
참고자료
1. 달리, 무의식의 혁명, 피오렐라 니코시아
2. 르누아르부터 데미안 허스트까지, 2014년 전시 도록
3. The People and Ideas that shaped the Modern Mind, Peter Watson
4. 추의 역사, 움베르토 에코
시간에 대한 관념, 말년의 원자주의와 신비주의는 나중으로 미뤄야겠다. 한 글에 모든 걸 다루기에는 그가 너무 오래 산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