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Nyaya Jun 24. 2016

여성, 그 차별의 역사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 관람 후기

여성의 참정권을 다룬 영화 서프러제트(Suffragette)가 개봉했다는 소식을 운 좋게 들었다. 날씨는 흐렸고, 시간은 차고 넘쳤다. 그래서 가벼운 마음으로 영화관을 향했다. 하지만 돌아오는 발걸음은 다소 무거워졌고, 날씨는 전보다 더 흐려졌다.




텍스트에 새겨진 여성 차별의 역사

텍스트로 보존된 역사는 여성의 평가절하에 전념한 것처럼 보인다. 민주주의의 꽃을 틔웠다고 여겨지는 고대 그리스 세계에서조차 여성은 공적인 영역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다. 여성은 완전한 시민권이 없었기에 정치적 참여는 물론이고 재산도 가질 수 없었다. 여성은 결혼하기 전에는 아버지의, 결혼한 후에는 남편의 소유물이었다.


로마도 사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로마의 아버지는 파테르 파밀리아스(paterfamilias), 즉 가부장의 권리를 가졌다. 그는 가족 전체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있었으며, 성인이 된 자식에게도 법적인 구속을 할 수 있었다. 파밀리아(familia)는 '국가 안의 국가'로 간주되었으며, 이는 아버지의 절대적 권력을 의미했다. 여성이 결혼하면 그 권력은 남편에게로 이전되었다.

If we allow women to vote, it will mean the loss of social structure. Women are well represented by their fathers, brothers, husbands. <서프러제트(Suffragette)>


우리가 칭송해 마지않는 3대 희곡작가인 에우리피데스, 아이스킬로스, 소포클레스조차 여성을 "남성 사회의 질서정연함을 전복시키는 메데이아적 존재"로 묘사할 뿐이었다. 에우리피데스는 특히 여성에 천착했다. 그가 묘사한 메데이아는 그리스인이 아닌 흑해 연안에 살던 여성이었기에, '야만인'의 행동을 보인다.

메데이아는 사랑의 배신자인 이아손에게 복수를 다짐하며 자신의 자식들마저 죽여버리는 여인으로 묘사된다.

여성의 아름다움은 찬양의 대상이긴 했으나, 정반대의 현상도 강화되었다. 파우사니아스는 '아프로디테 판데미아의 에로스'와 '아프로디테 우라니아의 에로스'를 구분했다. 전자는 매우 흔하디흔한 사랑이지만, 후자는 오로지 젊은 남자를 사랑하는 에로스이다. 그렇기에, 지적인 늙은 남성과 젊은 남성이 연인 관계를 맺고 일종의 철학적 동맹을 형성하는 케이스는 고대 그리스에서 흔하게 일어났다. (이 관념은 현대에 힘을 잃어버렸고 게이는 억압받는 소수자가 되었다.) 그리스 조각이 여성 조각상인 코레(Kore)뿐 아니라, 남성 누드인 코우루스(Kouros)가 많았던 이유는 이러한 사실 때문이다.


플라톤은 그나마 현대적 젠더 관념과 가까웠다. 그는 <국가>에서 글라우콘과(플라톤의 친형) 소크라테스의 대화를 통해, 국가의 수호자 육성에 있어 남녀평등 교육의 당위성에 대해 논한다. 이는 여성 지도자의 출현을 암시한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까 한 여자는 수호자의 자질도 갖추었으나, 다른 여자는 그렇지 못하다네. 우리가 선발한 수호자다운 남자들의 성향도 이런 게 아니었던가? (456a)

글라우콘 : 분명히 그런 것이었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므로 여자고 남자고 간에 나라의 수호와 관련해서는 그 성향이 같다네. 그만큼 더 약하거나, 그만큼 더 강하다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말일세. (456b)

글라우콘 : 그런 것 같습니다.

소크라테스 : 그러니까 이런 부류의 여자들은 이런 부류의 남자들과 함께 살며 함께 나라를 수호하도록 선발되어야만 하네. 그들이 능히 그럴 수 있고 성향에 있어서도 남자들과 동류이니까 말일세.

글라우콘 : 물론 그래야만 됩니다.

<국가 - 플라톤>


2400년 전의 플라톤의 성찰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평등, 자유, 정의 관념은 전방위로 추락하는 끔찍함을 겪었다. 남성과 여성, 백인과 유색인종, 식민지와 제국주의, 기업가와 노동자, 유산계급과 무산계급. 위대한 사회는 정말 도래하긴 했는가?




호도된 생물학적 본질주의

다윈은 우리를 포함한 전 지구의 생명이 하나의 뿌리에서 출발했음을 선언했다. 이는 생명에 대한 경외와 숭고함마저 느끼게 하는 구석이 있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진화론은 차별을 정당화하는 가장 강력한 도구로 활용되었다. 다윈이 조금 더 오래 살았더라면 눈물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1900년대 초, 사회진화론은 미친 듯이 그 영역을 확장해나갔다. 체사레 롬브로소와 폴 브로카는 지능은 두뇌 크기와 관련이 있고, 성격적 결함이나 범죄성은 얼굴이나 신체의 생김새와 관련이 있다고 봤다. 프랑스의 생리학자인 샤를 리셰는 그의 저서 <인간의 선택(1912)>에서 유전적 결함을 지닌 신생아는 모조리 죽여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미국 인디애나주는 강간범과 정신박약자들을 거세하는 법률을 1907년 도입했고 1931년까지 폐지하지 않았다. 결국 사회진화론은 인종 간의 우열을 잉태했고, 제노사이드의 참극은 인류의 뼈에 음각되었다.

© CGV 스틸컷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는 여성의 타고난 열등성으로 오용되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히스테리(hysteria)'라는 악질적 표현이다. 히스테리는 여성에게서만 나타나는 심리적인 불안증세를 일컫는데, 그리스어로 자궁을 뜻하는 'hystera'가 어원이다. 그러므로 남성에게는 히스테리가 존재하지 않으며, 여성만이 히스테리를 가진다고 주장된다. 이렇듯 생물학적 본질주의는 차별의 근거를 문화적 신념의 산물이 아닌 자연의 본질이라고 강변하며 차별을 정당화한다.

Women do not have the calmness of temperament or the balance of mind to exercise judgment in political affairs. <서프러제트(Suffragette)>


여성주의는 이러한 주장에 대항하여 생물학적 구성물로서 남성과 여성을 가리키는 '성'과 문화적 산물로서 남성적인 것과 여성적인 것을 가리키는 '젠더'를 구별하고자 노력해왔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지금의 우리는 표면적으로나마 양성평등을 지향하는 사회의 프레임에 친숙하다. 그렇기에 주인공의 태도에 공감하는 한편, 그녀를 배척하는 주변 여자들의 태도를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 여성의 권리를 위한 투쟁이 동류의 사람들에게 옹호가 아닌 조롱과 비난을 사는가?


역설적으로, 주인공을 비난하는 여성들의 행동은 그녀들이 이미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굴복당한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반증한다. 그녀들은 전통적 성 역할 속에서 억압되는 방식을 보지 못하도록 사회적으로 길들여진 지 오래인 것이다. 바람직하지 않은 이데올로기는 억압적인 정치 의제들을 부추기면서, 스스로를 이데올로기로 인정하기는커녕 오히려 세계를 이해하는 자연스러운 방식이라고 자인함으로써 그러한 의제들에 대한 사람들의 동의를 끌어낸다.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는 이데올로기로서 여겨지지 않으므로, 그에 동조하는 사람들에 의해 자연스러운 세계 인식으로 전복을 꾀한다. 그렇게 수천 년간 작동해 왔던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가 바로 가부장 중심주의이다. 가부장 중심주의는 전통적 성 역할을 받아들이면 좋은 여자, 그 테제에 저항하면 나쁜 여자로 낙인을 찍어왔다.

© CGV 스틸컷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여성뿐 아니라 남성을 억압하는 개념도 생성하는 데 성공했다. 호튼 부인이 남편에게 모든 여성의 보석금을 내달라고 하는 장면에서, 남편은 부인의 말을 일축한다.

W : No. You must bail all of the women. I cannot be the only one to go free.
M : I will not.
W: It's my money. It's my money.
M : You are my wife. Act like wife. This is an outrage.

자연스럽게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좀 내줄 것이지...' 그러나 곧 소름이 끼쳤다. 이 생각 또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가 아닌가. 12파운드를 화끈하게 내지 못하는 그는 즉각 쪼잔한 남자로 인식된다. 나는 아직도 온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는 전통적 남성의 개념도 우리의 머릿속에 각인시켜왔다.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하에서 가족에게 경제적 풍요로움을 가져다주지 못하는 남성은 가장 굴욕적으로 묘사될 수밖에 없다. 주인공의 남편은 경제적인 시달림을 겪고 있기에 총체적으로 무능하게 그려진다. 혼자서 아이를 부양하지 못해 부잣집에 입양을 보내야 하는 그를 향해 관객과 주인공은 분노를 터뜨린다. 하지만 그는 마땅히 공분을 살 짓을 했는가? 양육은 남녀가 공동으로 하는 것이라는 현대의 관념으로 볼 때, 이러한 생각 또한 가부장적 이데올로기에 사로잡힌 것이라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CGV 스틸컷

영화는 이야기의 핵심인 서프러제트 운동의 전개과정을 역사적 사실을 잘 모르는 사람도 잘 이해할 수 있도록 구성했다. 번외로, 주인공의 집에 걸린 왕의 초상화와 이디스의 집에 있는 팽크허스트의 초상화를 대조하는 카메라 움직임은 인상적인 느낌을 줬다. 생각보다 주인공의 말을 고분고분 잘 듣는 공장의 사장도 우스꽝스러운 요소였다.




여성의 참정권을 얻기 위한 서프러제트 활동은 그 평가가 다소 엇갈리는 측면이 있다. 영화는 지나치게 백인 중심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으며, 팽크허스트의 연설 중 나오는 'slave' 표현이 적합하지 않다는 주장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이 영화에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차별'이라는 키워드를 다시금 상기시켜 준다는 점에서.




[참고문헌]

1. 추의 역사 - 움베르토 에코

2. 생각의 역사 - 피터 왓슨

3. 비평이론의 모든 것 - 로이스 타이슨

4. 국가 - 플라톤

5. 서양철학사 - 버트런드 러셀

매거진의 이전글 '정글북'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기획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