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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Nyaya Jun 09. 2016

'정글북'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기획이다.

프로불편러의 시선으로 본 영화 '정글북' 관람 후기


영화 <정글북>이 외국에서 개봉되었다는 소식을 잊을 때쯤, 드디어 한국의 스크린에도 모글리가 나타났다. 하지만 어릴 적 TV 앞에 칼각을 잡고 앉아 멍하니 디즈니사의 정글북을 봤던 소년은 과거의 순간에 남아 있을 뿐, 총기를 잃어버린 퀭한 눈의 소유자는 여전히 젊음을 유지하고 있는 모글리가 탐탁지 않다. 나는 고의적으로 프레임을 덧씌우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정글북을 즐기기 시작했다. 영화의 캐스팅과 제작에 얽힌 비하인드를 읽는 것도 즐겁긴 하지만, 좀 더 멀리 나아가보기로 하자. 그 출발점은 바로 정글북의 원작자 ‘루디야드 키플링’이다.




키플링과 백인우월주의

영화의 엔딩 즈음에 화려하게 스크린을 수놓은 이름, Rudyard Kipling은 1865년 인도에서 태어나 영국과 미국 등에서 거주하며 많은 작품을 쓴 영국의 작가이자 기자, 시인이었으며 ‘정글북’ 덕분에 노벨 문학상 수상의 영예를 안는다. 하지만 그의 작품 세계를 현대적인 관점으로 돌아보면 다소 수상한 점들이 존재한다.


정글북의 출간 이후 일약 유명세를 탄 그는 ‘제국주의적 프로파간다’를 가진 작품들을 다수 내놓는데, 그 중 유명한 것이 바로 ‘The White Man’s Burden’이었다. 그 일부는 아래와 같다.


Take up the White Man's burden—
Send forth the best ye breed—
Go, bind your sons to exile
To serve your captives' need;
To wait, in heavy harness,
On fluttered folk and wild—
Your new-caught sullen peoples,
Half devil and half child.

—The White Man's Burden


총 일곱 단락으로 구성된 시의 잠언은 명백하다. 백인은 야생과 야만으로 표상되는 ‘제 3세계’의 인종들을 세계 평화를 위해 교화시켜야 하는 의무를 가지고 있다는 것. (‘제 3세계’라는 표현은 이미 그 자체로 지역, 인종차별적 요소를 내포하고 있지만, 우린 이 단어를 아무 거리낌 없이 쓰고 있다.)


인종차별주의자이자 제국주의자임에도 키플링은 노벨상의 영예를 안았다. 하지만 가장 공포스러운 사실은 190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이런 생각이 꽤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다는 것이다. 미국에서는 남북전쟁 이후에도 흑인의 처지가 개선되기는커녕 퇴보했다. 사회진화론은 승승장구했고, 1904년에 열렸던 ‘세인트루이스 만국박람회’는 북극과 남극, 아프리카의 부족들을 유인원과 인류를 연결해주는 ‘missing link’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하지만 백인들 중 아무도 이 전시를 이상하게 여기지 않았다.


현재 우리가 존귀하게 여기는 상대주의와 문화사의 가치는 프란츠 보아스가 쓴 걸작, <The Mind of Primitive Man>이 나오고 나서야 대접받기 시작했다. 우린 인종차별의 과도기를 이제 막 지난 젖먹이나 마찬가지인 셈이다.

Rudyard Kipling / © Wikipedia




정글북 - 제국주의와 식민주의

그러니 나는 다소 미친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정글북의 주제는 다음과 같다고 떼를 써 본다.


'정글북'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기획이다.


정글로 표상된 식민지와 각종 동물로 묘사된 피지배자들 사이에서, 모글리는 이상적 인간의 화신이다. 현실의 그림자로 구현된 정글 세계는 의심의 여지 없이 문명과 야만이라는 뚜렷한 이항대립이 나타난다. 문명과 인간의 반대로 원시(정글과 동물의 세계)를 가져옴으로써 세워진 위계질서는 필연적으로 다른 한쪽에 특권을 가져다준다.

최초의 달리기 장면에서, 모글리는 아래와 같은 대사를 통해 자신이 늑대와 근본적으로 다르다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다.
"난 늑대가 아닌걸."

블랙펜서(바기라)는 모글리를 보고 이렇게 말하기도 한다.
"늑대처럼 굴 수 없니?"


하지만 모글리는 자신이 늑대와 다르다는 점을 괴로워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 사실을 즐긴다. 절대 튀는 행동을 하지 말라는 늑대 우두머리 아킬라의 간곡한 당부에도 모글리는 '박'을 써서 물을 마신다. 이상하지 않은가. 아이들에게 다름은 죄악이며, 모방이야말로 학습의 제 1원리로 작동하는 데 말이다. 동물들은 그런 모글리를 묘한 눈으로 쳐다보며, 도구를 쓸 줄 아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은 극명하게 대비된다.


모글리는 이질적 존재를 예속시키기 위해선 그들과는 다른 존재임을 납득시켜야 한다는 점을 잘 알고 있는 듯하다. 모글리는 이 사건을 통해, 정글 사회에서 유일하게 도구를 쓰는 '호모 하빌리스'임을 만천하에 공표한다.


영화의 시작부터 시어 칸과의 결정적인 결투 순간까지, 모글리는 시종일관 도구를 사용함으로써 차별성을 드러낸다.

1. 물을 박으로 마시는 사건
2. 줄을 이용해 열매를 따 먹는 행위
3. 발루에게 꿀을 구해주는 행동
4. 코끼리를 밧줄로 구출하는 극적 장면
5. 시어 칸과 최후의 대립


토착민의 풍습을 부정하고 무시하는 모글리의 태도는 어떤 사고에서 기인하는가. 자기 자신만이 정상적인 인간이며, 다른 사람들은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과 동일시하는 것. 그리하여 그들의 인간성을 무력화시켜 제국주의를 정당화한 행위들은 세계사에서 반복된 주제이다.


정복과 인디언 잔혹사, 노예사는 어지간해서 서양인들의 입에 오르내리지 않는다. 미국과 호주 개척과정에서 인디언들은 단어 그대로 '학살' 당했다. 흑인은 인간이 아니었고 그저 노동력을 제공하는 대상으로 인식되었다. 오죽하면 최초의 저명한 흑인 지도자로 알려진 Booker T. Washington조차 흑인은 "정치력이 아니라 노동력이어야 한다."라고 말했을까.

흑인들을 가득 채워 운송했던 노예선의 구조


당연하게도 모글리는 정글 안에서 유일한 인간이다. 그렇기에 정글북의 플롯 안에서 타자화는 아주 자연스럽게 작동한다. 거대한 식민주의 이데올로기 장치 안에서의 연극은 현실의 그림이다. 정글은 타자화된 동물들을 계몽하려는 모글리의 투쟁이 이루어지는 장소이다. 그 투쟁의 과업은 시어 칸을 물리침으로써 완수된다.




타자화된 피지배자, 그들의 특성

인간성을 깎아내리는 가장 효율적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인간을 동물로 묘사하는 것이다. 세상에 존재하는 온갖 욕에 동물의 이름이 들어가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정글북에서 각 동물은 피지배자의 연약한 속성으로 묘사되고 타자화된다. 정글북은 그 자체의 플롯 덕분에, 피지배자는 지배자에 의한 타자화가 진행되기 이전에 본질적인 타자화가 이뤄졌다.


동물의 언어가 영어로 표현된 점은 내용의 전달을 위한 부득이한 사항이기도 했겠지만,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의 유산이 바로 지배자들의 언어였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것은 악질적이다. 동물들이 영어를 하는 것은 그들이 특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다른 인간 존재가 동물로 평가절하된 것에 가깝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아킬라
늑대의 리더인 아킬라는 무리 사회 고유의 법칙을 귀중하게 여기는 리더이며, 전통의 방식을 고수한다. 그는 모글리에게 늑대의 방식을 강요하며 도구의 사용을 금지한다. 전통은 새로운 상황에서 언제나 무기력한 모습을 보여왔기에, 구체제의 수호자는 시어 칸에게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늑대 무리는 시어 칸이 아킬라를 죽이는 장면에서도 감히 보복할 생각을 하지 못한다. 늑대들은 총체적으로 무기력한 구체제의 전형이다.


시어 칸
시어 칸은 정글에서 무력을 통해 존재감을 드러낸다. 비록 순수한 악으로 묘사되었을지라도, 그는 정글북의 동물 중에서 가장 현실적으로 행동한다. 인간이 정글에 어떤 짓을 해 왔는지를 알기 때문에, 모글리를 죽이려 하는 것은 당연하다. 식민지의 독립을 위해 적장을 죽이려 고군분투하는 투사가 떠오른다고 말한다면 과장일까. 시어 칸의 시선에서 바라보자면, 아킬라와 릭샤는 제국주의자를 숨겨주는 민족의 배신자에 가깝다. 시어 칸만이 유일하게 모글리로 표상되는 식민주의에 저항한다.

그는 정글 내에 존재하는 위협과 문제의 표상이기도 하다. (이것이 아마 키플링의 의도일 것이다.) 늑대들의 대모 릭샤는 시어 칸을 살상을 즐기는 자라고 칭하며 정글의 법칙을 운운할 자격이 없다고 비난한다. 최후의 사건에서 다른 동물들은 시어칸을 몰아내기 위해, 외부인이었던 모글리를 옹호하고 돕는다. 그들은 내부의 문제(시어 칸)를 그들이 따르는 정글의 체계 안에서 해결하지 못하는 무력한 존재임을 자인한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블랙펜서(바기라)
블랙펜서는 앞서 말했던 최초의 저명한 흑인 지도자, 부커를 떠올리게 한다. 동물들과 힘을 합쳐 시어 칸과 대적하는 대신(키플링이 시어 칸을 지나치게 강력한 존재로 묘사했기에 이는 불가능했지만), 블랙펜서는 모글리를 통해 위협요소를 제거하려 한다. 현명하고 강해 보이는 외양과는 다르게 블랙펜서는 스스로 무엇인가를 해결하려는 적극적 의지가 부족하다. 이는 백인과의 타협 노선을 취했던 부커의 행동과 완벽하게 일치한다.

시종일관 모글리가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했으나, 결국 시어 칸과의 최종 전투에서는 'fighting like a man'이라 모글리에게 말한다. 키플링의 생각대로 문제 해결에 외부 요소의 도입이 필수 불가결하다는 것을 인정한 셈이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발루
발루는 모글리가 자신에게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인간임을 인지하고, 그를 이용하려는 기회주의자라고 말할 수 있다. 발루는 정글에서 이단아에 가까운데, 그 근거는 모글리의 도구 사용을 적극 권장하는 모습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모글리가 말하는 늑대들의 맹세를 'Propaganda'로 규정한다. 전통을 부정하고 변화를 받아들이는 발루의 태도는 서구의 문물을 받아들이는 개화주의적 태도와 일치한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코끼리
'정글의 창조자'이자 경배의 대상인 코끼리조차 모글리에게 도움을 받는다. '창조자'의 자식을 구하는 장면에서, 모글리에게는 새벽의 후광이 드리워지며 웅장한 음악이 배경으로 깔린다. 모글리는 '정글의 창조자'보다도 우월한 '정글의 구원자'인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블랙펜서는 발루와의 대화에서 "I know he is special."이라 말하기도 한다. 영화에서 코끼리는 단순히 모글리를 부각하기 위한 이항대립적 장치에 지나지 않아보인다.

시어 칸과의 최종 대립에서 코끼리는 등장하지 않는다. '정글의 창조자'는 '정글의 방관자'로 전락하며, 모글리가 벌여놓은 거대한 실수를 처리할 뿐이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루이 왕
'반다르 왕국의 루이 왕'. 거대한 오랑우탄이 자기 자신을 칭할 때 하는 말이다. 그는 문명의 폐허에 거주하며, 인간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품고 있다. 그는 동물 중에서 가장 인간에 가까운 유전자를 가짐에도 문명적 특성과 가장 멀리 떨어져 있다. 거대한 체구, 더러움의 묘사 외에도, 자신의 거주지를 본연의 원시성으로 파괴하는 장면은 시어 칸의 힘보다 더 야만적으로 느껴진다. 애초에 모글리에게 바라는 것조차 파괴적인 힘의 'Red Flower'였다. 그런 면에서 루이 왕은 식민지 야만인들의 전형이기도 하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정글북을 해체하기

위와 같은 이유로, 나는 정글북을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총체적 기획'이라고 정의했다. 정글북의 모든 텍스트와 사건들은 제국주의 이데올로기를 정당화하고 강화하는 역할로서 기능한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정글북의 이야기는 제국주의자들의 주장만큼이나 모순적 관계들로 가득 차 있다. 제국주의 이데올로기의 한계는 정글북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1. 모글리의 혼종성과 파괴적 작동양상

문명과 제국주의의 대표로 작동하는 모글리는 그 스스로 혼종성을 느낀다. 우린 모글리의 늑대 울음에서 이질적인 느낌을 받는다. 태생은 인간이지만, 늑대의 손에서 자란 모글리는 늑대의 울음을 '흉내 낼'뿐, 집단과 어울릴 수 있는 특성(울음소리, 달리기, 싸움능력)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늑대의 어머니 릭샤는 모글리에게 "You will always be my son"이라 말하며, 모글리 자신도 정글을 떠날 생각이 없다.


그는 시어 칸을 죽임으로써 최종적으로 정글 집단에 동화되길 원하지만, 인간적인 특성은 결코 그를 동화시켜주지 못한다. 영화 마지막에 등장하는 바기라의 독백("역사상 처음으로 정글을 하나로 만들었죠.")은 모글리를 정글에 완벽하게 동화된 사람처럼 묘사한다. 하지만 모글리는 시스템의 외재적 특성인 도구를 이용해서 구체제의 문제를 해결했기에, 해당 체제를 대변할 수 없다. 토착문화는 필연적으로 붕괴하며, 새로운 문화의 출현은 또 다른 대립구도를 내포한다.


게다가 모글리의 행동은 야만적이고 폭력적인 양상으로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는 천진난만하게 도구를 사용하지만, 도구의 파괴적 성격은 피해자에겐 재앙이다. 특히 발루에게 벌집을 대량으로 따다 준 사건은 자연의 균형을 무너뜨렸음을 암시한다. 여기서 도구로 대표되는 문명은 불완전하고 야만적인 특성을 획득한다. 영화에서 가장 야만적으로 묘사되는 루이 왕조차 모글리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모글리는 정글 자체를 불로 파괴해버린다. 정글의 관점에서 볼 때 모글리는 질서라기보단 파괴 그 자체이다.

<정글북> 스틸컷 / © CGV


2. 루이 왕의 폐허

루이 왕도 주목할 만하다. 영화에서 루이 왕은 폐허에서 인간이 되길 바라며 살고 있다. 하지만 최초의 문명은 누가 파괴했기에 루이 왕이 그곳에 살 수 있었던 것인가? 오랑우탄인 루이 왕이 자신의 왕국을 파괴하기 이전에, 서구세계는 비서구권의 세계를 처참하게 박살 낸 바 있다.


탐험은 탐욕과 피로 얼룩진 제노사이드로 마무리되는 일이 빈번했다. 1532년 잉카 원정이 그랬고, 신대륙의 아메리카 원주민 강제이주, 오스트레일리아 정착 과정에서 학살당한 태즈메이니아인 또한 그랬다.

특히, 잉카를 상대로 한 피사로 형제의 만행은 그 과정이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스페인의 곤살로 피사로는 1532년 11월 6일, 보병 106명, 기병 62명을 이끌고 4만의 군대가 주둔해 있던 잉카의 황제 아타우알파를 급습했다. 그 결과, 피사로는 7000~8000명의 잉카 군인을 학살했고 아타우알파를 볼모로 삼아 막대한 황금을 요구해 부를 축적했다. 이러한 사실은 서구권이 비서구권보다 우월하며, 그들을 서구권 아래에 굴복시켜야 한다는 제국주의와 인종 간 우열이론을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러한 행위들은 키플링이 말하는 세계 평화와 교화를 위한 노력과는 거리가 멀다. 서구권이 비서구권을 평화적으로 '접수'한 역사적 사례는 매우 드물다.




정글북은 해피엔딩이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말년의 막장 정글북 이야기는 제외하는 것으로 하자.) 인종 간의 우월성 개념은 정복을 정당화하는 도구로 사용되었고, 제국주의는 그 개념 안에서 몬스터처럼 자라났다. 21세기의 우리는 이 사실을 까맣게 잊고 산다.


위의 주장이 사실이라고 가정한다면, 정글북의 상영은 온당한가?

신 나게 까놓고 이렇게 말하긴 부끄럽지만, 당연히 그렇다. 정글북은 훌륭한 영화이다. 자연과 인간의 교감, CG로 만들어진 사실적인 묘사는 분명히 매력적이다. 정글북을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총체로 해석하고자 하는 것은 이 영화가 좋지 못한 영화임을 말하기 위함이 아니다. 정글북 상영관 입구야말로 제국주의의 선봉으로 향하는 개선문이라고 주장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우리는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제국주의와 식민주의적 이데올로기를 들춰내고 그것들을 해체하는 작업을 통해 오히려 정 반대의 결론에 도달할 수 있다.


우린 더 나아질 수 있다고.




[참고자료]

1. 옛날에 썼던 내 기사

2. 생각의 역사2 - 20세기 지성사, 피터 왓슨

3. 비평이론의 모든 것, 로이스 타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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