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전당 -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展
1년 전 이맘때쯤, 세종문화회관에서는 디에고 리베라의 전시가, 올림픽공원의 SOMA 미술관에서는 프리다 칼로의 전시회가 열린 바 있다. 난 프리다 칼로와 리베라의 작품을 동시에 구경하겠다는 욕심에 사로잡혀 하루 안에 두 전시회를 돌아다니며 다리를 혹사시켰다. 정확히 1년 후가 지난 지금, 예술의 전당에서 <프리다 칼로&디에고 리베라 展>이 열렸다. 이번엔 칼로와 리베라의 작품이 한 곳에서 전시되니, 이전과 같은 수고로움이 없어 다행이다.
이번 전시는 스케일이 꽤 크다. 예술의 전당에 작품을 대여해 준 '돌로레스 올메도 미술관'의 돌로레스 올메도는 디에고 리베라의 말년을 지킨 오랜 친구이자 사업가였기 때문에, 그의 많은 작품을 보유하고 있다. 칼로가 세상을 떠난 후, 리베라는 암 투병 회복기 동안 아카풀코에 있는 그녀의 집에서 지내기도 했다. 또한 모리요 사파의 프리다 칼로 컬렉션을 입수해 소장하고 있으므로, 올메도 미술관은 단연 '칼로와 리베라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작년 SOMA에서 열렸던 '프리다 칼로 展'에서는 리베라가 그렸던 올메도의 누드화가 전시된 바 있다. 디에고가 올메도의 누드까지 그려줄 정도로 막역한 사이였으니, 올메도 컬렉션의 스케일이 큰 것은 당연할지도.
예술은 진실일 때 자연과 하나가 된다.
이것이 원시 미술의, 나아가 대가들의 비밀이다.
내 최고작의 비밀은 그것이 멕시코산이라는 것이다.
디에고 리베라는 멕시코 예술사에 큰 획을 그은 인물임이 틀림없다. 리베라는 초기 아카데믹한 양식으로 그 천재성을 보여주었고, 장학금을 받고 프랑스로 유학한다. 1907년 파리에서는 죽은 세잔의 1주년을 기리기 위해 미술상 앙브루아즈 볼라르가 세잔 회고전을 열었고, 그곳에서 리베라는 충격에 빠진다. 조르주 브라크도 충격에 빠지기는 마찬가지였다. 충격에 빠진 디에고를 보고 볼라르는 세잔의 모든 작품을 보여준다. 리베라는 후기 인상주의를 세잔이라는 열병을 통해 터득한다. 쇠라가 개척한 점묘법에도 나름의 관심을 보였다. 그의 첫 번째 변신인 셈이다. 여기에서 멈췄다면 디에고 리베라는 인상주의자로서 미술사의 한 켠을 장식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파리의 몽파르나스에서 걸출한 인물들과 교감하며 작품세계를 확장한다.
몽파르나스에 자리 잡은 디에고 리베라는 모딜리아니와 만나 절친을 맺고(디에고 리베라는 흔히 말해 '좀 노는' 나쁜 친구였다.), 피에트 몬드리안을 이웃으로 뒀다. 그 당시 파리는 예술가들이 끓어오르는 거대한 실험실이었다. 피카소와 브라크는 그곳에서 입체파 양식(큐비즘)을 한창 실험하고 있었다. 시인 기욤 아폴리네르는 이들과 벗하며 입체파의 네 가지 구성요소를 이렇게 말한다.
과학적, 물리적, 오르피슴적, 본능적
리베라는 이러한 양식에 동참했고, 살롱 드 도톤느와 앙데팡당전에서 좋은 평가를 얻어 입체파 화가로 거듭난다. 후기 인상주의자에서 입체파로, 그의 두 번째 변신이다. 하지만 그는 피카소를 매우 싫어했는데, 그 이유는 리베라가 했던 말에 잘 드러나 있다.
피카소는 진저리가 나. 그 녀석이 나한테서 뭘 슬쩍해 가더라도 사람들은 피카소 피카소 외쳐대며 열광하겠지. 나에 대해서는 이렇게 말할 테지. 내가 피카소를 베꼈다고. 조만간 저 녀석을 내던져 버리든가 아니면 내가 여기를 떠서 멕시코로 가버리든가 해야겠어... 내가 멕시코 지팡이를 들고 대갈통을 부숴버리겠다고 겁주니까 가버리더군.
예술의 전당의 입구에 위치한 작품에서는 후기 인상주의와 입체파의 향기가 강하게 흘러나온다. 아래에 있는 리베라의 작품은 브라크의 것이라 해도 아무도 의심하지 않을 정도다.
하지만 큐비즘에 대한 리베라의 애정은 빠르게 식어버리고, 큐비스트로서의 자신을 폐기하기에 이른다. 그는 다시 세잔의 품으로 돌아가며, 예술의 전당에 전시된 후기의 풍경화에서 이러한 사실을 목격할 수 있다. 멕시코 화가인 시케이로스는 시기적절하게 디에고 리베라를 만나 멕시코의 가치에 대해 논한다. 마치 피카소가 아프리칸 미술의 원시적 생명력에 매혹되었듯이, 리베라는 멕시코의 토착문화와 원시성에 눈을 돌리게 된다. 또한, 멕시코의 교육부 장관이었던 바르콘셀로스와 만나 멕시코를 고양할 벽화제작을 의뢰받는다. 벽화 화가로서의 전환, 그의 세 번째 변신이다.
리베라는 1920년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조토의 프레스코화에서 영감을 얻고 1922년 첫 프레스코화를 대학교에 그리기 시작한다. 그는 후기에 아방가르드와의 단절을 선언했지만, 입체파와 표현주의적 양식은 그대로 벽화에 반영되었다. 멕시코의 역사와 문화부흥을 위해 벽화를 그렸던 디에고 리베라는 알폰스 무하의 말년과 비슷한 양상을 보인다. 무하가 게르만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벽화를 그렸다면, 리베라는 멕시코의 주된 인종인 '메스티소'의 신화적 내용을 담는다. 이는 당시 '메스티소'를 제 5인종으로 규정한 바르콘셀로스의 전략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작품의 완성도와는 별개로 인종주의 냄새를 강하게 풍겨 거부감을 불러일으킨다.
'아카데믹 - 후기 인상주의 - 입체파 - 벽화'로 이어지는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여정 중에서, 벽화를 제외한 세 가지의 여정을 예술의 전당에서 경험할 수 있었다. 세 가지를 볼 수 있어서 다행인 걸까, 혹은 벽화를 볼 수 없다는 아쉬움이 더 컸을까. 돌이켜보니 벽화 전시는 작년 세종문화회관에서 열린 '디에고 리베라 展'이 훌륭하게 해냈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1922년 디에고 리베라는 공산당에 가입한다. '빨갱이'의 작품이 국내에 들어오다니, 경천동지할 일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의 자본론도 금서에서 풀린 시대이니, 한 번쯤은 눈감아주자. 디에고는 블라디미르 레닌과 함께 볼셰비키를 이끈 레온 트로츠키와의 절친이기도 했다. 트로츠키는 스탈린과 대립하며 결국 공산당에서 축출당하게 되는데, 리베라는 그런 트로츠키를 멕시코로 데려와 보호해준다.
디에고 스스로도 공산당에서 축출되고 재가입되기를 반복한다. 트로츠키주의는 스탈린 체제에서는 용납되지 않았고, 그의 작품들이 지나치게 부르주아적이라는 비난을 받기도 했기 때문이다. 밀란 쿤데라의 소설 <농담>의 주인공이 편지에 다음과 같이 장난으로 적었다가 당에서 축출되는 사건을 통해, 트로츠키주의가 그들에겐 얼마나 혐오스러운 단어였는지 우리는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농담 - 밀란 쿤데라>
디에고 리베라는 공산당에 가입하긴 했지만 무정부주의자에 가까웠으며, 당시의 거대담론이었던 이념논쟁을 작품에 담기도 했다는 점에서 무하보다 더 도발적이었다. 미국의 록펠러 센터에 의뢰받은 벽화 작품의 정 중앙에 레닌의 모습을 담기도 하는 과감성과 고집은 그의 성격을 짐작할 수 있게 한다. (록펠러 센터는 레닌을 지워 달라고 요청했으나 디에고는 반대했고, 결국 센터는 벽화를 철거한다.)
러시아의 인민위원이었던 루나차르스키가 디에고에게 붉은 군대 관저의 벽화를 의뢰하기도 했다는 사실은 꽤 재밌다. 니체적 마르크스주의자였던 아나토리 루나차르스키는 예술가의 과제를 이렇게 말한 바 있다.
예술가의 과제는 그 미래상을 묘사하여 인민들이 그런 미래를 위해 투쟁하도록 영감을 불어넣고, 비극의 감정, 투쟁과 승리의 기쁨, 프로메테우스식 야망, 단단한 자부심, 꺾이지 않는 용기를 고취하여 위버멘쉬를 향해 달려가는 공통된 감정 속에서 마음을 하나로 통일하는 것이다.
<The Age of Nothing - Peter Watson>
비록 앞서 얘기한 대로 스탈린과 트로츠키 사이가 틀어져 이 의뢰는 성사되지 못했지만, 루나차르스키의 관점은 디에고 리베라가 추구했던 벽화예술과 어느 정도 닮아있다.
나는 아픈 것이 아니라 부서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림을 그릴 수 있는 한 살아 있음이 행복하다.
소아마비, 왼쪽 다리 11곳 골절, 오른발 탈골, 왼쪽 어깨 탈골, 요추, 골발, 쇄골, 갈비뼈, 치골 골절, 버스 손잡이 쇠 봉이 허리에서 자궁까지 관통, 척추수술 7회와 총 32번의 수술, 오른쪽 발가락 절단과 무릎 절단, 그리고 세 번의 유산
이 모든 사건이 단 한 사람, 바로 프리다 칼로에게 벌어진 일이다. 그래서일까, 프리다 칼로는 역경을 이겨낸 불굴의 여인으로 표상되며, 이러한 표상은 그녀의 국적인 멕시코로 투영되어 정권의 프로파간다로 쓰이기도 했다. 디에고 리베라도 프리다 칼로를 멕시코로 형상화하여 자신의 회화에 집어넣은 바 있다. 프리다 칼로는 멕시코 전통 복식을 즐겨입었는데, 미국에서조차 멕시코 전통 의상을 입는 것을 통해 본인의 정체성을 확고히 하려 했다.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들은 어디에서 서커스가 열리냐며 칼로를 놀렸다.)
프리다 칼로는 지극히 개인적인 불행과 아픔들을 그려온 화가로 인식되기 쉽지만, 그녀의 작품들은 묘하게도 관객으로부터 보편적인 감정들을 끌어낸다. 이번 예술의 전당에는 우리가 익숙하게 여기는 칼로의 작품들(그로테스크하게 보이는 작품들) 대부분이 전시되어 있기에 그 감정의 격류는 더욱 두드러진다. 지난 SOMA에서 열린 '프리다 칼로 展'의 작품들은 주로 초상화였기에 그런 감정들을 느끼기 어려웠다. (물론 칼로의 초상화도 그 나름의 의미를 가진다. 비록 충격은 덜하지만.) '단독성=보편성'이라는 역설적인 도식은 우리를 그녀의 작품 앞에 머물도록 강제하며, 사색의 단초를 제공한다.
특수자의 일반성이라는 의미의 일반성은 단독자의 보편성이라는 의미의 반복에 대립한다. 우리는 예술 작품을 개념 없는 단독성으로서 반복한다. 그리고 시를 마음으로 새겨야만 하는 건 결코 우연이 아니다. 머리는 신체 기관이지만 심장은 반복을 사랑하는 기관이다.
<차이와 반복 - 들뢰즈>
그녀는 <Henry Ford Hospital. 1932>에서 유산의 경험을, <The Broken Column. 1944>를 통해 척추수술로 인한 통증을 말한다. 그리고 프리다 칼로의 동생 크리스티나와 디에고가 불륜을 저지르고 있음을 알고 난 뒤에 그린 <A Few Small Nips. 1935> 까지, 프리다 칼로는 내면의 고통을 작품세계로 표현하는 것으로 보인다. (디에고 리베라는 프리다 칼로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라지만, 디에고 리베라의 인간성은 구역질이 날 정도로 최악이다.)
비극의 요소는 그녀의 작품을 '드라마로서의 회화'로 거듭나게 했다. 일찍이 니체는 "비극적인 것의 의미는 관능성과 더불어 증가하거나 감소한다."고 말한 바 있다. 칼로의 작품은 마크 로스코의 '예술 작품 조리법'을 떠올리게 하는 구석이 있다.
[예술 작품 조리법 - 그것의 성분들 - 예술 작품을 만드는 법 - 공식]
1. 죽음에 대한 명료한 이해 - '죽어야 할 숙명'에 대한 암시들 - 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 비극적 예술, 낭만적 예술 등은 죽음에 대한 인식을 다룬다.
2. 관능성. 세계를 향해 구체적일 수 있는 우리의 기초. 그것은 존재하는 사물들에 대한 탐욕스러운 관계다.
3. 긴장. 갈등이나 억압된 욕망
4. 아이러니. 이것은 현대의 성분이다. 인간이 순간적으로나마 다른 무언가로 나아갈 수 있도록 해 주는 수단이라고 말할 수 있는 자기 소거와 자기 검토.
5. 위트와 유희. 인간적 성분
6. 덧없음과 우연. 인간적 성분
7. 희망. 10% 정도의 희망은 비극적 개념을 더 견딜만하게 만들 수 있다.
프리다 칼로의 일기 공개는 이번 전시의 특별한 관전 포인트이다. 사건들을 프리다 칼로의 시선으로 봄으로써 그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는 것은 중요하다. 프리다 칼로의 작품은 기법과 묘사에 그 가치가 부여되는 것이 아니라, 맥락을 통해 가치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디에고 리베라가 일종의 바람직한 사회상의 답을 제시한 반면, 프리다 칼로는(주로) 내면세계에서 일어나는 질문을 그렸다. 그렇기에 그녀의 작품은 지극히 개인적이며, 작품을 그릴 당시 디에고 리베라와의 관계가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물론 프리다 칼로가 개인적인 고통만을 그린 화가는 아니다. 그녀는 <버스>를 통해 멕시코 사회를 풍자하기도 했으며, 산업의 중심지였던 디트로이트(유산한 장소이기도 하다.)를 부정적으로 묘사하려는 의도가 명백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혹자는 작품에 관찰되는 이항대립들(여성 대 남성, 과거 대 미래, 성장 대 착취)을 파악함으로써 문화에 대한 경계심을 발견할 수 있다고 말한다.
예술의 전당에서 볼 수 있는 작품을 통해 다음과 같은 생각을 해볼 수도 있겠다.
같은 현실 속에 존재하면서도, 칼로와 리베라는 시간의 방향성을 달리했다. 프리다 칼로는 과거의 반추를 통해 현재를 이해했다. 반면 디에고 리베라는 문자 그대로 아방가르드의 화신이었기에, 삶에 대한 전진으로서 현재를 파악했다. 자아와 세계인식도 마찬가지다. 프리다 칼로는 자아의 개념에서 출발해 그것을 외연 확장하여 세계를 인식했다. 그러나 디에고 리베라의 작품 세계에서 그러한 자아 개념들은 발견될 가능성이 없어 보인다. (또한 인상주의 이후에 작업한 벽화작품에서도 전진하는 세계관이 주요하며, 그곳에서 개인화된 자아의 개념은 희석되고 집산주의의 느낌만이 강하게 남는다.)
둘의 세계인식은 첨예하게 달랐기에 잘 어울리기도 했지만, 근본적으로 불안의 요소가 내포되어 있었기에 관계의 파국을 맞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그냥 디에고 리베라가 쓰레기였거나...
[참고자료]
- 옛날에 쓴 내 기사
-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도록(2016. 05. 28)
- Frida Kahlo 도록(2015. 05. 20)
- Diego Rivera : 멕시코의 자랑 展 도록(2015. 05. 23)
- The Age of Nothing, Peter Watson
- The People and Ideas that Shaped the Modern Mind, Peter Watson
- Mark Rothko, 강신주
[전시정보]
제목 : 프리다 칼로 & 디에고 리베라
기간 : 2016.05.28(토) - 2016.08.28(일)
시간 : 11:00-20:00
장소 : 한가람디자인미술관 제1전시실,제2전시실,제3전시실
가격 : 성인 15,000원
문의 : 02)580-1300
※ 매월 마지막 월요일 '휴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