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년의 고독>의 편집광적 비평방법
난 세계문학에 많은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다. 하지만 최근 조이스의 작품과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왜 이런 책들을 진작 접하지 않았을까 반성하는 계기를 마련해주었다.
<백년의 고독>은 특별하다. 독자들은 글 속에서 마르케스가 숨겼다고 여겨지는 많은 은유들을 본다. 누군가는 백년의 고독에서 성서적 스토리를 발견하기도 하고, 남미의 역사를 연상하기도 한다. 나는 그 곳에서 '헤겔'의 흔적을 느꼈다.
헤겔 철학은 우리에게 친숙하게 다가오지는 않는다. 사실 나에게도 그랬다. 내가 헤겔을 처음으로 접한건 러셀의 <서양철학사>였던 것 같다. 러셀은 그의 책에서 헤겔의 철학을 '잘못된 가정에서 출발하여 얼마나 멀리 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라고 일컬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런 혹평에도 불구하고 헤겔의 철학은 근대 사상에 영향을 끼쳤고, 아직도 그 유산이 남아있다.
헤겔 철학의 출발점은 칸트와 표현주의 시대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철학자들은 일종의 선택을 해야 했다.
1. 주체성과 자유에 기초한 철학
2. 객체성과 실존에 기초한 철학
이 둘은 영원히 화해되지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헤겔은 그러한 '화해'가 가능하다고 보았다. 바로 '정신(Geist)’이라는 개념을 통해서 말이다.
'정신'은 인간과 완전히 독립하여 존재하는 개념의 신도, '데미우르고스'처럼 세계를 기계론적으로 창조한 신의 개념도 아니다.
반대로 그것은 인간을 통해서만 정신으로 살아가는 정신이다. 인간은 그 정신의 정신적 실존인 의식, 합리성, 의지 등의 담지자, 필수불가결한 담지자이다. 그러나 동시에 정신은 인간으로 환원될 수 없다. 그것은 전체 우주의 근저에 놓인 정신적 실재이기 때문에 인간의 정신과 등치될 수 없다. 그리고 정신적 존재로서 그 정신은 목적을 가지며, 유한한 정신에 귀속될 수 없는, 반대로 유한한 정신이 봉사하는 그런 목표를 실현한다. - 헤겔, 찰스 테일러 p.91
이러한 '정신'은 백년의 고독을 관통하는 주제이기도 하다고 나는 주장해본다.
마꼰도는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설립한 마을이자 중심 무대이다. 그는 우연한 사건으로 원래의 자리를 떠나 마꼰도를 세운다. 이처럼 무대에 서는 등장인물들은 '주체성'을 갖고 활동하며 '합리적' 인식을 점차 깨닫게 된다. 멜키아데스는 이러한 '합리적 주체성'을 일깨우는 데(특히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에게) 큰 역할을 담당한다.
물건들이란 제각각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혼을 깨우기만 하면 되는겁니다. -p.12
또한 그들을 관통하는 '정신'이 있다는 것을 암시하는 텍스트들이 존재한다.
두 사람은 사촌간이었다. 비록 그들의 결혼이 그들이 세상에 태어났을 때부터 이미 예견된 것이라 하더라도. -p.38
보아서는 안 될 것을 본 죄로 백오십 년 동안 매일 밤 이 시간이면 목이 잘리게 되는 여인의 참혹한 광경을 보여드리겠습니다. -p.57
유랑자들이 전하는 바에 따르면, 멜키아데스 족속은 인간 지혜의 한계를 초월해 버림으로써 결국 지구상에서 사라져버렸다고 했다. -p.65
백 살이 될 때까지는 그 누구도 원고의 의미를 알아서는 안 되거든. -p.274
이러한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개별자인 인간들이 '합리적 주체성'을 깨닫는 것이 필수적이다. 그리고 그것은 필연적으로 언어를 요구한다. 마르케스는 기억상실증이라는 소재를 이용해 사물이 언어를 획득하는 과정을 재치있게 풀어나간다.
그가 암소의 목에 걸어놓은 표찰은 마꼰도 주민들이 어떤 식으로 기억상실증에 대항해 싸울 준비를 하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하나의 예시였다. <이것은 암소인데, 암소가 젖을 생산하게 하려면 매일 아침마다 암소의 젖을 짜주어야 하고, 그 젖을 커피와 섞거나 밀크 커피를 만들기 위해서는 젖을 끓여야 한다.> -p.78
언어적 사고, 즉 지성을 획득하기 위해서는 기억의 상실이라는 퇴보가 필요했고, 그들이 문자를 통해 지성을 획득하자 멜키아데스가 출현해 마꼰도의 주민들은 기억상실증을 극복하게 된다. 또한 문자가 힘을 얻자 역사의 기록관인 프란시스꼬도 등장한다. 이로써 마꼰도의 역사는 선형적인 특성을 획득한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이와 더불어 자연을 객관적으로 바라보는 합리성을 인식하기 시작한다. 그는 사진을 통해 신의 존재를 입증해보려 노력하며, '신의 형상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자동 피아노의 마술을 이해하기 위해 피아노 장치를 분해한다.(p.98)
언어적 사고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게 되는 사건들은 모두 '합리적 주체성'을 획득하는 과정의 일부로 해석할 수 있다.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와 멜키아데스는 이런 식으로 우주의 '정신'을 이해하기 위해 발전해나간다. 우리는 정신의 운반자이며, 역사의 정신은 우리를 숙주로 삼아 자기 인식에 도달한다.
우주의 근본 구조는 따라서 '우주는 정신의 구현과 표현'이라는 사실에 의해 규정된다. 그것은 가장 낮은 무생물의 형식으로부터 다양한 종류의 생명체를 관통하여 인간에 이르는 존재들의 위계를 포함한다. 물론 그런 다음 정신의 실현을 위해 인간은 발전해 가야 한다. 따라서 시간 속에서 계승되고 이를 통해 역사를 형성하는 문화적 양식들과 의식의 양식들에도 위계가 있다. 공간과 시간 속에서의 우주의 분화는 우주 속에서 표현되고 체현되어야 하는 우주적 정신의 요청으로부터 연역될 수 있다. 인간 역사의 상이한 단계들조차 필연적인 것으로서 계발되지 않은 원시적 실존으로 존재했던 인간의 출발점과 그가 도달한 완성의 지점으로부터 추론될 수 있다. -헤겔, 찰스 테일러 p177
소설의 중반부에 이르면, 마꼰도는 정치적,사회적,문화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다. 또한 아우렐리아노 부엔디아는 반란군에 합류하여 정부군과 전쟁을 치르며 극적 긴장감을 고조시킨다. 비록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이 그것을 처음부터 원한 것은 아닐지라도 말이다.
돈 아뽈리나르 모스꼬떼의 뻔뻔스러운 태도 앞에서 시종일관 목소리를 높이지 않은 채 자기들이 마을을 어떻게 세웠으며, 땅을 어떻게 분배했으며, 그 어떤 정부도 귀찮게 하지 않고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서, 어떻게 길을 닦았고, 필요한 것이 있을 때마다 어떻게 개선해 왔는지 모든 것을 소상하게 들려주었다. -p. 91
그러나 인간은 '정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서 그것을 의식하고 원할 필요는 없다. 오히려 운명은 우리가 그것의 목적을 완벽하게 의식하지 않고서도 일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부엔디아 가문의 사람들은 정부와 사상 따위에는 관심을 갖고 있지 않았으나, 매우 자연스럽게 역사와 운명이라는 격류에 휘말린다. 역사의 주체는 단순히 인간이 아니라 정신이다.
인간이 자신의 운명을 성취하기 위해 실현해야 하는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제도들의 변혁은 더 이상 사람들이 의식적으로 이루어야 하는 임무로 간주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 임무들이 사람들에 의해 완수된다 하더라도, 이 임무들이 완전히 실현된 이후에야 사람들의 역할이 완벽하게 이해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성숙한 헤겔의 '이성의 간지'라는 사상이며 역사에 대한 회고적 이해의 사상이다. - 헤겔, 찰스 테일러 p.143
소설 속에서 부엔디아 가문에 일어나는 비극적 죽음들은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가 일으킨 뿌르덴시오의 '살해'의 반작용으로도 이해된다. 그리고 뿌르덴시오는 그에게 유령으로 나타나 복수의 여신을 풀어놓는다.
역사에서 우리에게 우연히 일어난 일 등은 우리가 삶을 위반함으로써 우리에게 가해진 반작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삶의 파괴는 삶을 적으로 돌려놓는다. 왜냐하면 삶은 불멸이며 삶이 살해될 경우 삶은 자신의 모든 부분을 관통하는 유령으로 나타나 자기의 복수의 여신을 풀어놓기 때문이다. - 헤겔, 찰스 테일러
호세 아르까디오 부엔디아는 이러한 맥락에서 운명의 자기실현자로 볼 수 있다. 그는 지구가 둥글다는 것을 깨달으며, 신의 형상이 존재하지 않는 것을 알고 있으며, 라틴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합리적 인간으로 도약한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그를 미치도록 만들어버리기도 한다.
백년의 고독의 마지막은 아우렐리아노 바빌로니아가 멜키아데스의 예언서를 해석하는 것으로 끝난다. 이는 백년 넘게 걸친 부엔디아 가문의 마지막이기도 하다. 부엔디아 가문의 역사는 모두 사라져버릴 것이라는 책의 마지막 장의 극단적 부조리함은 정말로 모든 것의 끝을 의미하는 것일까.
헤겔에 따르면 인간은 사건이 일어나는 시간 동안 자신이 행하고 있는 것을 분명하게 인식할 수 없다. 왜냐하면 행위 주체가 단순히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우리는 모두 우리 스스로는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는 드라마의 행위자들로 붙잡혀 있다. 우리가 이 드라마를 완전히 연기했을 때에만 우리는 무엇을 행위했는지를 이해한다. 그 드라마의 결말이 어떤 것이었든 간에, 부엔디아 가문은 '정신'이 이끌어내는 드라마를 성공적으로 해냈다. 결국 죽음은 주체성의 외적 부정이 아니라 존재하기 위한 주체성, 즉 '정신'에 의해 정립된 것의 일부로 이해되어야 한다.
무의미하고 궁극적으로 정당하지 않아 보이는 것, 가장 정교한 과거의 문명들의 파괴와 소멸 등은 정신이 법에 근거한 국가와 이성으로 실현되어 가는 도정에서 필연적인 단계로 드러난다. 즉, 죽음 그 자체뿐 아니라 역사에서 일어나는 특별한 운명의 사건도 의미 있는 계획의 일부로 드러난다. 왜냐하면 인간은 이성으로서 그 계획과 완전히 화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헤겔, 찰스 테일러 p.229
살바도르 달리는 밀레의 '만종'에 매우 집착했다. 그는 소위 '편집광적 비평 방법'을 만종에 적용하여 그의 작품에 만종을 구겨넣었다. 사실 마르케스의 백년의 고독은 헤겔과 맞지 않는 구석이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의 작품이 헤겔적이라고 본다면, 헤겔 사상을 소설로 풀어냈을 때 나올 수 있는 소설이 바로 이 책이라는 생각도 든다.
또한 내게 이 책이 특별한 이유는, 그저 읽는 '재미'가 있다는 것이다. 마치 고등학생 때 읽었던 판타지 소설마냥 한 장을 넘길때마다 읽기의 즐거움을 주었고, 결국 해묵은 글쓰기를 다시 시도하여 기록으로 남았다.
#피터캣책모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