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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Mar 21. 2023

두 여자

  누군가 아궁이에 불을 넣고 있었다. 잘 마른 솔잎이었다. 벌겋게 타오르는 아궁이, 검은 솥 안에는 물이 데워지고 있었다. 서른아홉의 엄마가 동생을 낳은 날이었다. 불을 지폈던 그 누군가는 기억에 없다. 아마 언니였을 것이고 그것이 나의 첫 기억이자 언니가 맞다면 언니에 대한 첫 기억이기도 하다. (가끔, 아니 자주 그날 스무 살의 언니를 생각한다. 열 살, 여섯 살, 세 살, 갓난쟁이 막내까지... 동생들이 그녀에게 어떤 의미였을까. 동생들이 한 명 한 명 태어날 때마다 언니의 삶은 조금씩 닳아 없어진 것은 아니었을까. 하고.)    

  다음 기억은 그로부터 3년 후 스물세 살의 언니가 첫선을 보던 날로 점프한다. 두 번의 이사 후 갖게 된 기와지붕의 우리 집이었고 여름이었다. 아랫목 장판이 거무스름한 ‘웃방’이라 불렀던 직사각형의 방, 둥근 교자상을 사이에 두고 낯선 남자와 마주 앉아 있던 언니. 그해 늦가을 마당 가득 잔치가 열렸다. 연지곤지 찍고 반짝반짝 족두리를 인 채 수줍게 큰절을 주고받던 언니의 혼례식. 이윽고 아직은 낯설기만 한 덩치 큰 남자를 따라 언니가 떠나고 후회와 절망이 반반 섞인 표정으로 눈물을 훔치던 엄마가 처음으로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날 엄마는 친구와 또는 자매와 헤어진 심정이었을까. 아마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두 여자가 내 삶으로 들어온 것은.


  이후 나는 읍내에 살던 언니네 집에 몇 번인가 갔었다. 한 번은 집에서 빚은 산자(유과)가 가득 든 석작을 들고 읍내 행 버스에 올랐다. 버스에서 내린 후 한참을 걸어 언니 집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에야 버스 선반에 올려둔 석작이 생각났다. 시집살이를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해 없는 살림에 공들여 만든 산자를 잃어버렸으니 선뜻 언니집으로 들어갈 수 없었던 나는 오래도록 대문 밖을 서성였다. 어둠이 내려서야 겨우 언니집으로 들어 울음을 터트렸다. 그날 밤늦도록 형부는 들어오지 않았고 새벽녘에 언뜻 잠을 깬 나는 어린 조카를 안은 채  들썩이는 언니의 등을 볼 수 있었다. 오래 시간 밖으로 돈 형부에 대한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그 석작이 떠오르곤 했다.


  드디어 스무 살이 넘은 나에게 언니는 엄마에 대한 불만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마치 그동안 엄마에게 받은 것을 내게 들려주기 위해 어딘가에 차곡차곡 쌓아 둔 것만 같았다. 어떤 때는 언니를 이해했고 어떤 때는 엄마를 이해했다. 열아홉 살 차 모녀지간, 열일곱 살 차의 자매지간의 삶이 시공을 넘나들며 뒤섞이곤 했는데 나이가 들수록 언니는 선명하게 엄마가 생각나는 듯 했다.      



  열여덟에 시집온 엄마는 열아홉에 언니를 낳고 10년 후 큰오빠를 얻었다. 언니와 오빠 사이 딸 둘을 잃고 낳은 아들은 언니의 존재를 살림밑천으로 살게 했다. 엄마와 언니는 자주 싸웠다. 아니 일방적으로 언니가 당했다고 해야 맞겠다. 엄마의 그 욕들은 다 어디서 왔을까. 어린 엄마는 무뚝뚝한 아버지의 무게, 구박하는 시어머니의 무게, 가난의 무게, 그 굵직한 무게들을 합쳐 언니에게 퍼부음으로써 조금은 가벼워졌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엄마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지도. 그러니까 언니는 엄마의 숨구멍이었고 애증은 사랑보다도 진한 것이었다.

 어느 날 아버지는 독백하듯 고백했다. 느그 언니 국민학교라도 지대로 보냈어야 했는디....졸업은 시켰어야 했는디... 언니에 대한 물컹한 첫 고백에 아버지의 속마음이 오롯이 담겼다는 것을 나는 알 수 있었다. 엄마와 언니, 두 여자로부터 두어 걸음 떨어져 있었던 아버지는 관대할 수 있었고 그 관대함은 때때로 언니에게 위로였을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고 서너 달쯤 지났을 때였던가. 퇴근길이었다. 엄마 보고 싶어 죽겄다, 언니 목소리는 퉁퉁 불어 있었다. 더 이상 싸울 수도 원망할 수도 없는 존재에 대한 애증,  절대 끼어들 수 없는 그녀들 사이에서 나는 그저 동생이었고 둘째 딸이었을 뿐, 늘 이방인이었다.    


  여전히 언니는 문득문득 엄마를 원망한다. 그때 엄마가 그랬다고. 얼마나 그랬는 줄 아느냐고... 그 끝에는 된장 가져가라고, 참기름 짜 놨다고 자기 말만 하고 끊는다. 어쩌면 언니는 엄마와 나 사이 그 어디쯤에서 삶을 유영하고 있는 것만 같다. 그 유영에서 언뜻 엄마의 생이 비치기도 한다.

  두 무릎을 수술하고 소위 안 아픈 데가 없는 종합병원 같은 언니는 이제 팔순을 바라보고 있다. 엄마와 똑같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살림밑천’이었던 그녀, 지금은 형제들, 특히 내 살림밑천으로 살고 있는 그녀.     



  비닐로 몇 겹 입구를 돌려 막은 참기름 잎새주를 한 병 넣어준다. 오빠들한테는 말하지 말라며 입단속도 잊지 않는다. 작년에 준 잎새주도 그대로 있는데... 내 마음은 무거워지는데 환한 얼굴로 받아오는 것이 언니 생을 뿌듯하게 해 준다는 것을 안다. 그녀의 삶을 잠깐 지탱해준다는 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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