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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사찰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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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Apr 13. 2023

벚꽃 십리길, 그 끝 대원사

 십리 길에는 벚꽃들이 아직 망울져 있었어. 불그스름한 그것들은 흡사 겨울 상처가 아문 듯 간지러움을 한껏 참고 있는 것만 같더라. 왜 상처가 나으려고 할 때 간지러운 것처럼 말이야. 오늘에야 알았어. 기다림은 망울망울 온다는 것을. 나도 이때가 좋아. 너도 만개를 지나 겨자색 잎들이 움을 틔운 후 연두로 지나는 그때를 좋아하지. 마치 만개의 시기가 명절 같다면 비로소 평화로운 나무의 때가 시작되는 것 같다며 우리는 입을 모았잖아


 애기손톱 같은 분홍빛 망울들이 일제히 필 준비를 하는 벚나무 터널을 지나다 보니 그 곁으로 나란하게 만들어져 있는 나뭇길을 따라 걷는 사람들이 있네. 꽃이 피어나는 소리에 맞춘 듯 발걸음이, 팔짱이 보기 좋다.


 수년 전, 비 오는 대원사에  적 있었어. 혼자 사찰을 찾은 중년 여자가 이상하게 보였던 것일까? 오두막에서 스님이 나오시더니 차 한 잔 하고 가라고 하시더라. 내 종교가 불교도 아니고 스님을 마주해 차 한 잔 나눈 적 없지만 왠지 거절하기 싫었단다. 속없이 마루로 올라앉았지. 손수 커피를 갈아 종이 필터에 넣고 물을 부으시는 동그란 팔의 움직임, 그 선이 산새만큼이나 유려했어. 참 고요하더라. 네가 그 자리에 있었다면 우린 마주 보며 미소 지었겠지, 또르르 떨어지다가 똑, 똑, 또오똑, 또오오똑 커피 고이는 속도가 자연스럽게 산 풍경에 잦아들었는데, 고운 컵에 적당히 고인 커피향은 그저 좋았달 수밖에 없는 것 같아. 뭐랄까, 평범한 시간 위에 그 시간을 얹어 두 겹의 시공을 경험한 듯 한 그런 거. 그마저 거저 받았으니 더할 나위 없었지. 그런데 커피를 다 마시고 일어서야지 싶은데 머뭇거려지는 그 순간에 스님이 한 말씀하시더라. ‘이방 저방 해도 서방이 젤이요’   



봄날엔 다방커피


  봄이 당도한 지 일주일쯤 됐을까. 꽃잎들이 바람결에 날리다가 땅에 내려앉는 모양이 더없이 곱다. 저렇게 질 수 있다면, 저리 나풀나풀 사라질 수 있다면. 어느 시인의 말처럼 태어나기도, 죽기도 좋은 날 잠시 소망해 보았는데 이런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던 것일까 좁은 길 그 끝에 수관정이 있는데 그곳에 놓여있는 관에 누워 죽음을 체험해 보는 거야. 컴컴한 관에 누우니 그 잠깐 동안에 마음이 글쎄 한없이 착해지더라. 이리 갈텐데 왜 그렇게 아웅다웅 살고 있는지... 다시 아웅다웅으로 돌아가 버리고 말겠지만 잘 살아야지 다짐도 했단다.


  뽀송뽀송해진 마음으로 내려오는데 삼삼오오 사람들이 모여 있더라. 스님께 오늘 무슨 날이냐고 여쭈었지. 세상에 그처럼 환한 웃음이 또 있을까. 보름달처럼 동그랗고 밝은 얼굴로 ‘오늘 행사가 있었는데 보살님까지는 밥을 먹을 수 있을 것 같다’며 손을 이끄시더라. 제이야, 나 아무래도 개종이라도 해야 할까 봐. 가톨릭 신자인 내가 성당에서 얻어먹는 것보다 사찰에서 얻어먹는 게 더 많으니 말이야. 부처님께 감사하며 산 풍경 한 자락 넣어 비빈 비빔밥을 한 그릇 뚝딱 해치웠지 뭐니.

  식사 후 큼지막한 과일이 그려진 찻잔에 구수한 다방커피 한잔 들고 나와 햇살 좋은 평상에 앉아 있으저 혼자 고즈넉해져서 이런 게 행복이지, 속말이 절로 중얼거려지더라. 코로나 백신이라고 걸어 놓은 백신 좀 보렴. 스님들의 재치에 웃음까지 한 바탕 챙겼단다.  

코로나 백신, 백신



  무슨 연유인지 대원사는 오래전부터 다니곤 했었어. 마음이 소란스러울 때 혼자서 훌쩍 떠나오기 좋은 거리이기도 하고 분위기도 편안해서일 거야. 극락전으로 들기 위해서는 연못을 가로지르는 좁은 나무다리를 건너야 했는데 커다란 버드나무 줄기 늘어 있어 허리를 굽혀야만 했지. 지금은 나무다리 왼편 연못을 매웠더라. 항아리들도 사라지고. 옛것 그대로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은 아쉽지만 아쉬움은  또 다른 그리움을 낳으니 그 편도 아주 나쁘지 않은 것 같아. 그리고 키 작은 내가 더 작아져야만 지나갈 수 있는 연지문을 통과할 때 어쩐지 겸손해 진 것 같은 그 느낌은 내가 조금 괜찮은 사람이라도 된 듯 뿌듯해지지.

 비 오는 날 극락전 앞마당 고요에 깊이 빠져들 때, 극락전과 스님들이 거하는 숙소 사이 흙벽을 타고 오르는 능소화에 한 없이 반할 때  항아리에서는 솜사탕처럼 연꽃들이 피어났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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