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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상 Jul 02. 2023

부끄러움 없는 삶이 어디 있으랴,
수선사

  누가 봐도 부끄러워야 할 일인데 잘못한 일이 아니라고 합리화하고 싶을 때가 있어. 남들은 몰라도 나만 아는 부끄러움들이 마음 깊은 곳에서 꿈틀거릴 때 어쩐 일인지 수선사가 생각나. 그리 굵지 않은 나무기둥을 세우고 판자 하나하나를 덧대 만든 연못 위 나무 길을 걸을라치면 주머니 속 동전도 꺼내 놓아야만 할 것처럼 한없이 조심스러워지는데, 한 발짝 뗄 때마다 삐그덕 거리며 바닥이 살짝 내려앉을 때 부끄러움의 무게는 더 크게 느껴져서 나도 모르게 잠깐 반성을 하게 돼.      

수선사로 가는 좁은 문



  음식솜씨가 영 젬병이어서 잘 만들지 않는 내가 오랜만에 고추장 쓸 일이 있어 냉장고를 뒤지다가 구석에 있던 고추장 통을 꺼냈어. 묽지도 않고 되지도 않고 적당한 점도로 저 혼자 붉더라. 얼마나 맛있던지 맛만 남고 한 번 먹어보라며 건넸을 그 누군가는 기억에도 없어서 혼자 괜히 미안했고 고마웠단다. 순간, 철 따라 된장, 고추장, 간장, 참기름, 참깨 등등 얻어먹는 신세라는 게 확 와닿았어. 준 이는 모두 잊고 온갖 양념들이 남아 내 삶을 구수하고 매콤하게 지지고 볶고 있었던 거지. 그 순간 오래전에 다녀온 수선사가 생각났어. 그 누구와도 말고 혼자서만 걸어야만 할 것 같은 아슬아슬한 나무 길이 선명하게 떠오르더라.

      

  어느 교육시간, 모처럼 시간을 냈던 건 일본인 전문가가 와서 했던 강의를 듣기 위해서였는데 바로 뒷자리에 앉은 사람들이 속닥거리는 소리에 통역 내용을 들을 수가 없는 거야. 흘낏 뒤돌아보고야 말았는데 일순간 조용해지는 등이 왜 그리 시리던지... 내 눈빛이 얼마나 싸늘했겠니. 그 잠깐을 참지 못하고 눈짓을 해 버린 내가 오히려 더 민망하고 미안해졌는데 쉬는 시간에도 식사시간에도 불편한 마음이 가시지 않더라. 떠들었으니까 당연히 눈짓 한 번 줄 수 있다 애써 합리화했지만 그들이 미안하다고 말해버린 선방에서 오는 민망함이었다는 걸 금방 깨달았단다. 차라리 내게도 쌀쌀한 눈짓으로 갚아 줬으면 내 맘이 더 편했을 텐데 말이지. 할 일을 했음에도 미안해지는 이유는 이럴 때인 것 같아. 부끄러움이 한 겹 더 두터워지는 순간이었단다. 어디 이뿐이겠니.       


 어버이날이었는데도 다 큰 아이들이 전화 한 통 없었는데 출장 중이었다는 핑곗거리로 조금은 덜했지만 좁아터진 내 마음이 어땠겠니. 쿨한 엄마가 되어야지 굳게 마음을 먹는대도 잘 안되더라. 결국 서운함을 터트리고 말았단다. 그런데 출장을 마치고 돌아와 보니 집에 식기세척기가 설치되어 있는 거야. 아이들의 서프라이즈 이벤트였지. 순간 기쁨보다 옹졸한 나 자신이 얼마나 부끄럽던지 집을 뛰쳐나오고 싶을 정도였어.         



 가끔 내 안에 내가 없다는 생각을 해. 누군가에 의해 조정되고 있구나, 누군가 때문에 행동하고 있구나, 누군가 때문에 이리 말하고 있구나... 진짜 나를 잃어버리고 낯선 내가 낯익다고 생각하며 그렇게... 제이야 우리는 낯선 우리를 서로 낯익게 생각하고 있는 건 아닐까.


푸른날, 수선사



그때 수선사 나무다리 끝에 서서 걸어온 짧은 거리를 뒤돌아 봤을 때 나도 풍경도 어쩐지 낯설어져서 처음 본 장면 같더라. 가끔씩 마주하는 생경함은 차곡차곡 쌓인 부끄러움의 두께만큼일 거야. 살아가야 하니까 원하지 않는 일도, 말도, 행동도 해야 할 때가 있지만 나를 잃지 않기 위한 뭔가도 해야 하겠지. 그 뭔가가 뭔지 생각하는 무렵이야. 


수선사는 사찰의 고전미보다는 마치 부잣집 정원 같은 뜰을 가지고 있어. 여느 사찰에서 볼 수 없는 이색적인 풍경이 눈길을 사로 잡지. 이 풍경을 만들기 위해 30여 년을 쏟았다는데 그 나무다리의 휘청거림에 아무 느낌이 없다는 것이 부끄러울 밖에. 부끄러움의 무게가 시간이 흐를수록 가벼워지는 것이 또한 부끄러울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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