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 서 포구에서 남흘리로 이어지는 길로 들어섰다. 오늘은 역행이다. 낮은 집들, 정갈하게 자리하고 있다. 잠이 덜 깬 걸음걸이로 골목을 서성이는 사람들은 낯선 나에게 그저 무심하다. 덩치 큰 개들도 순한 눈으로 바라볼 뿐이다. 생각지 않았던 고요한 마을 하나가 내게로 왔다.
이어지는 김녕 농노, 끝이 없다. 마을도 사람도 자취를 찾아볼 수가 없다. 이 세상에 나 혼자뿐인 듯 적막한 길이 계속된다. 고즈넉함은 쓸쓸함 쪽으로, 쓸쓸함은 두려움 쪽으로 서서히 이운다. 시간마저 두려움을 향해 가고 있는 것 같다. 어차피 인생은 혼자이므로 외롭고 두려운 것들을 스카프처럼 목에 둘러야 할 때가 있으니 지금이 그때인가 보다. 혼자일 때 외롭지만 사람들 속에서 더 외롭지 않은가. 그러니 오늘은 조금 덜 외롭자, 맘먹는다.
늘 번외 지역 같은 제주에서 머물고 외곽만 돌다가 이번에는 시내에 숙소를 잡았다. 머무는 동안 틈틈이 제주시내를 둘러보자는 생각이었다. 덩달아 버스를 타러 가는 이른 시간에는 화려한 저녁을 보낸 퀭한 제주 아침을 발견하기도 했다. 제주가 아닌 다른 도시에 와 있는 듯한 착각이 일었다. 유난히 많은 중국인들, 중국말들... 버스에서도, 식당에서도 앞에 앉아있는 저 사람이 중국인인지 한국인인지 자동으로 탐색기가 돌 정도였다. 도시 하나를 유영하고 채워가는 다양한 사람들과 삶의 형태들, 그 다양성을 어디까지 허용해야 할까. 문득 각이 선 노파심에 제주가 걱정스러운 건 오지랖일까.
초대합니다.
어쨌거나 나는 지금 김녕농노를 걷고 있는 중이다. 제주스럽다. 마늘을 잘라낸 줄기들이 가지런하게 누워있는 이랑이 끝이 없다. 수확 전인 희디흰 양파는 허리까지 도드라져 있고 열매를 맺기 위한 밤호박꽃들은 노랗게 사투 중이다. 마늘-양파-밤호박 순서로 우주가 돌고 밭의 일은 순조롭다.
농노 끝에서 이어지는 숲도 제 할 일을 다 했나 보다. 빽빽하다. 꽃을 버려야만 울창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덩달아 두려움도 팽팽해져서 뒷목이, 다리가 경직된다. 무언가 뛰쳐나올 것 같은, 누군가 뒤에서 머리채를 낚아챌 것만 같은, 발소리가 들리는 것만 같은... 그러나 나도 이미 알고 있다. 온전히 혼자 겪은 두려움 끝에 찾아오는 그것이 내게 무엇을 줄지! 경직이 풀리는 가벼움, 두려움이 느슨해지는 공간에 차오르는 뿌듯함 같은 것들이다. 그렇게 환각 같은 긴 숲을 지나 만난 동복리가 어찌나 반갑던지 당이 툭 떨어지고 다리가 꺾이는 증상이 먼저 찾아왔다.
바다로 가는 길은 빨간불,
인심은 초록불이다.
바다로 향하는 길은 아직 빨간 불이다. 6차선 도로를 따라가다 다시 숲으로 들어간다. 보이지 않지만 바다가 저 옆에 있다는 생각만으로 안심이 된다. 바다 한 자락 이끌어 북촌포구 식당 구석에 마주 앉는다. 인심 좋은 사장님이 막 잡았다며 자리돔회 한 접시를 서비스로 내주는데 이 순간 딱 소주 한 잔 했으면 다른 소원 같은 건 빌지 않을 것만 같다. 한껏 한량이 되어 걸게 차린 밥 한상 뚝딱 해 치운 후 걷는 길은 요샛말로 껌이다. 조천에서 출발해 정방향으로 걷는 낯선 이들에게도 흔쾌히 인사를 건넨다. 이 모든 것이 전작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
'사진 말고는 가지고 오지 말 것, 발걸음 말고는 가지고 오지 말 것' 시에라 클럽의 권고에도 나는 사진과 더불어 두려움과 외로움을 가지고 왔다. 가벼움과 뿌듯함도 챙겼다. 그리고 그녀가 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