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를 훔치다 18
모처럼 날씨가 쾌청하다. 발걸음도 가볍다. 광령리를 출발한 후 이내 무수천에 다다른다. 엊그제까지 비가 꽤 내렸는데도 천에는 물이 거의 없다. 그래서 無水川이라고도 한단다. 무수천을 따라 형성된 돌담집들이 평화롭다. 여름이 깃들고 있다. 사람 사는 곳은 다 같다고 하는데 제주 속 마을들은 어쩐지 더 고즈넉하고 깊다. 섬 전체가 유명 관광지인 탓에 자연스레 몸을 낮추고 외지인들의 발걸음에 맞춰 조심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것은 아닌가 생각해 본다. 만나는 마을 사람들에게 송구한 눈인사를 건넨다.
어느새 외도 월대에 이른다. 달빛을 구경하던 누대. 오랜 수령의 팽나무와 소나무가 물결 속에서도 자라 운치를 더하는 곳. 걸음을 멈추고 달이 떴을 법한, 유유히 이울었을 법한 물결을 따라가는데 내도의 바다가 쑥 들어온다.
내도 바당길, 이호테우 해변, 도두 추억의 거리... 사실 제주의 매력은 사람 많은 관광지보다 한적한 숲길, 마을길에 있다. 그래서 걷는 것이다. 해도 오늘은 신발을 벗고 이호테우 해변 파도에 발을 적시며 걸어본다. 바다가 찰랑찰랑 나를 채우기 시작한다.
익히 들어 익숙하지만 한 번도 올라보지 않은 도두봉. 높이 100미터도 안 되는 낮고 작은 오름. 주변의 모든 것을 시원하게 보여준다. 방금 지나온 길, 저 멀리 어영소 공원으로 향하는 바닷길, 공항, 제주시내와 한라산.... 도두봉을 중심으로 둥그렇게 자리한 풍경에 잠시 넋을 빼앗긴다.
바다에 등을 기대 공항을 마주하고 앉아 2,3분 간격으로 이륙하고 착륙하는 비행기들을 보고 있노라니 문득 내 인생은 어느 지점인가 궁금해진다. 어쩌면 한 사람의 삶은 많은 항공기를 거느리고 있는 플랫폼 같기도 하고 한 대의 비행기 같다는 생각이 든다. 나는 어떤 목적을 싣고 이 길을 운항하고 있는 것인가. 어디에서 이륙했던가. 잘 가고 있는가. 혹 난기류를 만난다면 잘 견뎌낼 수는 있을 것인가. 무사히 착륙할 수 있을까. 인생이 딱 난기류일 수 만도 없고 정상운항을 할 수 만도 없으니 내게 도달하는 것은 다 필요한 것들이라고 지금을 위로한다.
내가 조종관을 잡고 있으면서도 길을 잃었고 실패도 많았다. 그뿐인가 가지 말아야 할 옆길로 샌 적도 많았다. 후회가 파도처럼 찰싹거린다. 어떤 삶을 살아야만 후회가 없을 것인가.... 훤하게 펼쳐진 활주로를 보고 있노라니 활주로 까진 아니라도 작은 길하나 가져보지 못했던 내 인생의 오르내림을 마주하고 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축축해지고 만다.
저 멀리 가야 할 길이 두 배로 아득하게 한다. 차라리 보이지 않는다면 곧 끝날 거라는 기대감, 보이지 않는 곳에 대한 궁금함이 풍력 발전기처럼 돌아 힘이 생길 텐데... 눈이 제일 게으르다는 어른들의 말은 틀린 적이 없다. 더구나 바다를 배경으로 한 길은 계속 같은 곳을 걷고 있는 듯 환시를 일으켜 거리가 줄어들지 않는다. 어용소공원을 지나 용두암까지 어영차 마음을 밀어붙여본다. 결국 보이는 것은 움직이는 것을 이기지 못하는 법.
용연 구름다리에 주저앉아 다리의 흔들림을 온몸으로 받는다. 그네에 앉아있는 것 마냥 바다도 나무도 건물들도 흔들린다. 그래 흔들려야 할 일이 있다면 흔들려야지. 남은 것도 미련도 없이 다 흔들려 버리고 말아야지. 그런 다음에라야 단단함이 찾아오지 않던가. 흔들림을 비우고 단단함을 채운 후 자리를 턴다.
이륙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