셋째 딸이 성남에 독립해서 살고 있는 언니랑 지내고 있는데 서울에 숙소를 구하고 싶다고 했고 몇일 동안 발품을 팔아 구한 오피스텔을 보러 가는 길이다. 예전부터 딸내미들의 숙소를 구할 때는 좁은 골목은 지나지 않을 것, 지하철 역에서 가까울 것, 엘리베이터에나 계단에서 너무 멀지 않을 것 등등의 조건을 갖춘 집이어야 한다고 누누히 강조해서인지 그런 조건에 부합하는 집을 찾느라 좀 힘들어했다. 겨우겨우 비슷한 곳을 찾아 놓으면 내가 직접 봐야 안심이 되겠다 싶어 전주에서 서울까지 보러 가는 일정을 조율하다보면 어느새 다른 사람이 계약해버려 또 찾아다녀야했다.
이런 상황이 반복되니 보다 못한 남편이 딸들을 믿고 좀 맡겨보라해서 처음으로 지가 맘에 드는 집을 구했다고해서 보고 내친김에 계약도 할려고 가는 길이다.
전주에서 서울에 갈 때는 보통 고속버스를 이용했는데 얼마전에 전주역에서 수서역까지 가는 SRT 노선이 생겼다. 1시간 45분이면 서울에 도착하고 무엇보다 차가 밀려서 늦어지는 불편함이 없어서 자주 애용한다.
하루에 8시 11분, 3시 56분 겨우 두 번만 있는 것이 좀 불편하긴 하다. 특별한 경우 아니면 무조건 8시 11분 표를 예매한다. 일을 보고 당일로 내려와야 하기 때문이다.
오늘도 당연히 8시 11분 표를 예매했다. 아니 예매한줄 알았다. 하도 매진이 빨리 되어서 표부터 예매하고 나니 계약을 하려면 집주인과 저녁에 만나야하고 토요일에 매복 사랑니를 수술로 뺀 딸아이 치아 상태가 좋지 않아 3시 56분 기차를 예매했다면 참 좋았을 상황이었다. 바꾸려고 했지만 이미 매진이어서 그럴 수도 없었다.
아침 일찍 서둘러 아침 준비를 해서 먹고 남편의 점심 저녁까지 준비해놓고 여유있게 기차역에 도착했고 커피까지 마셨다. 열차편 호수와 자리를 확인하기위해 스마트폰으로 예매한 승차권도 확인했다. 모든 것이 완벽한게 이상하긴 했다. 예전 같으면 뭔가 서두르기도 하고 좀 부산스럽기도 했을 거였는데 말이다.
기차를 타고 18호차에 가서 자리를 확인하는데 누군가 앉아 있다. 승차권을 확인하니 분명히 우리 자리인데 말이다. 당연히 8시 11분 차라고 철썩같이 믿어서그런지 시간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보지 않았고 봤어도 811로 보였을지도 모르겠다.
우리 자리 라고 말할려다가 다시 한번 승차권을 보려고 하는데 큰 딸이 '엄마, 시간이 다르잖아' 라고 한다. 그때서야 시간을 보니 15:56분으로 되어 있다. 어쩜 그렇게 안보였을까? 타기 직전에라도 알았으면 우릴 데려다주고 가고 있을 남편을 불러 되돌아갔을텐데. 그럼 새벽부터 일어나서 분주할 필요도 없고 딸내미 치과에도 가고, 월요일 오전 둘레길 모임도 갔다 올 수 있었을텐데.
치매가 오기 위한 전조 증상인가 싶어 심각한 생각이 듵 정도로 어이 없다. 나날이 건망증이 심해져도 이 정도 까진 아니었는데. 노선 시간이 많이 있는 것도 이리고 겨우 두 칸 중에 하나 선택하는 건데 실수하고 지금까지 몇번을 확인했으면서도 시간 확인을 안했다니 기가 막힌다.
내 얘기는 전혀 듣지 않고 당신 하고 싶은 얘기만 하시고 듣고 싶은 것만 들으시는 91세 친정 엄마를 탓하더 니 쌤통이다. 엄마 못지않게 보고 싶은 것만 본 것 아닌가? 나이가 들어가는 증거라고 치부하고 웃어 넘기고 싶은데 그러긴 너무 심각하다. 진짜 검사라도 해봐야 하나? 올 1 월에 뇌 검사 했을 때는 괜찮다고 했는데 그새 변화가 생긴건가?
참 심각하고 심각한 일이다.
직원분을 찾아 설명하고 도움을 구했더니 익산->수서 표를 끊어 주고 3시 56분 표는 취소하라고 한다. 17호차, 15호차, 14호차 각각이다. 이렇게라도 좌석이 있어 다행이지. 서울까지 서서 갈 뻔 했다.
젊은 직원분이 다음 부터는 이런 일 없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챙피하기도 하고 무엇보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없을 거라는 보장이 없어 슬프다.
참 전에도 비슷한 실수를 했다. 이제보니. 고속터미널에서 8시 45분 표를 끊었다고 생각하고 32분쯤 버스 타는 곳으로 갔는데 8시 35분 차 앞에서 직원분이 35분 손님 없으신가요? 라고 하는데 순간 스마트 폰 표를 보니 내 표가 35분 표였다. 어머, 전데요. 45치 문이 열렸는지 확인하러 간거였는데 말이다. 차에 타서 티켓을 확인하고 자리에 앉았는데 벨트도 하기전에 차가 출발했다. 간발의 차이로 차를 탔는데 그때는 충분히 있을 수 있는 헤프닝으로 생각하고 넘어 갔다.
오늘 같은 일을 겪고 잊고 잊던 지난 일까지 떠오르니 마음이 더 무겁다. 그냥 지나갈일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