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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또바기 May 09. 2016

엄마의 눈빛

목구멍까지 차오르는 슬픔을 누르게 해주는 힘


일 년을 회사를 다녔다

처음 내가 이곳에 왔을 때, 그 당시 가장 좋아했던 선생님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축하한다. 돈 받고 뉴스 하는 사람 됐네?'

그땐 그 말이 참 좋았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내 가치를 인정받는 느낌이었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일이 돈이 되는 사람들은 지금 생각해도 큰 행운아다.) 그렇게 나는 기쁜 마음으로 전파 없는 방송국을 다녔다. 내 일을 사랑하면 아무런 문제도 없는 날들이었다. 선생님 말대로 돈을 받고 뉴스를 하고 있었고,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찾아가 행사 진행도 하는 일이었다. 하지만 무언가 빠지고 부족한 느낌은 채워지질 않았고, 결핍은 결핍을 부르고 난 다시 불행해졌다. 그렇게 난 이직을 준비하고 있다. 1년이 지난 지금, 애쓰지 않아도 순조로운 진행실력을 갖췄을지라도 나는 더 불행해졌고 부족했고, 더 원했다. 아마 그게 전파였던가- 내가 원한 건 돈이 아니었던가? 아, 어쩌면 더 큰 돈이었던가?



목구멍이 아플 정도의 통증


지금도 갑자기 머리에서 위에서 이야기했던 것들과 관련된 생각(어떤 생각인지 명확하게 모르는 생각들)을 하면 목구멍이 아프다. 목구멍까지 차오르는데 내리고 다시 내리고 하며 난 다시 일을 했고, 자소서를 쓰고, 연차를 내고 시험을 보러 다녔다. 보통 지방 방송국에 가기 위해 먼 길을 떠나는 기차를 타는데, 답도 없이 어떤 역을 경유하는지도 모른 채 흘러가는 내가 참 딱했다. - 하루는 역시 시험을 위해 지방으로 향하는 날이었다. 기차 예매를 생각 없이 한 탓에 역방향 좌석에 앉게 되었다.

역방향에 앉아서 흘려보내는 바람과 꽃, 푸른 나무와 하늘이 너무 아팠다.
- 꿈을 갖고 있다는 게, 그게 참 슬픈 일이다.

삶이 퍽퍽해지고 이것만 보다 보니, 정작 행복한 삶을 꿈꾸면서 이런 것 하나 느끼지 못했구나. 역방향에 앉은 내가 딱 제 자리를 찾은 것만 같았다. 누군가에게 부정당한다는 것 보다도 더 슬펐다. 목구멍이 아파올 정도로.



자리를 못 찾고 가는 서울


서울행 티켓을 끊었다. 올해만 세 번째 내려온 부산에선 나를 받아주지 않았다. 나를 봐주겠지 싶어서 갔는데 보기만 했지 알아보진 못했다. 그렇게 나는 나를 부정당하는 일을 하고, 스스로 마음을 할퀴고 기차에 올랐다. 마음 하나 몸 하나 편하지 않은 일주일이었다. 하고 싶은 일을 너무나 사랑한 나머지, 도가 지나친 걸까- 남들 말처럼 때가 안된 걸까- 아, 어쩌면 내가 해야 하는 일은 이게 아닌가- 그렇게 열차에 올랐다. 공교롭게도 이번에도 난 역방향에 앉았다. 부산역에서 서울역으로 향하는 길가에 있는 모든 나무들이 나뭇가지로 '잘 가'하고 인사를 하는 것 같았다.

소리가 들릴 일도 없는 그 나뭇가지 나뭇잎 청명한 바스락 소리가 내 귀를 스치고, 잘못 난 나뭇가지가 내 마음을 할퀴고 갔다.

자연을 보는 것조차 너무 아파 눈을 감았고, 눈물이 너무 많이 나서 눈을 뜰 수 없었다. 마치 내 눈 밑에 눈물을 1L 정도 저장해둔 것처럼.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미안한 일


내가 눈을 뜬 건 엄마의 전화 때문이었다. "어디니?" "가는 길이에요." 그 후 우리는 침묵을 가졌다.

아마 엄마는 내게 '잘 봤니', '어땠어?'라는 말을 하고 싶었겠지만 하지 못했다. 나 역시 '엄마 결과 나왔고, 안 됐어요.'라는 말을 하기까지 내 목구멍은 너무 무거웠다. '잘 봤어요.'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상처를 안고 있었다. 그 마음을 다 알았는지 엄마는 '피곤하겠다. 수고했어.'라는 말을 했다. 누군가 한 명은 꺼내야 하는 이야기, 나는 결국 내 아픔을 온전히 그녀에게 전하는 일을 했다. '잘 봤어요. 그런데 이번에도 안 됐어요.' 엄마는 수고했다는 말을 하고 서둘러 전화를 끊었다.

내가 나 하나만 아프면 되는 일인 것들로 나를 사랑한다는 이유로 내 주변 사람을 아프게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내가 안 된 시험에 우울해하면 진짜 괜찮냐는 말을 건네는 엄마, 모든지 자신이 다 해주겠다는 오빠, 언니 괜찮냐고 물어보는 동생, 웃으며 그만둬도 괜찮다고 하는 아빠, 그리고 무작정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주는 내 친구들. 나를 딱하게 여기는 그들의 태도에 사랑 받음을 느꼈지만 미안한 일이다. - 나는 왜 그들에게도 상처를 주는가,



엄마의 눈빛


세상에서 보고 싶지 않은 것들이 몇 가지 있다. 내가 채용에서 안 됐다는 문자, 그리고 엄마의 슬픈 눈빛이다.

엄마는 가끔 날 쳐다보는 딱한(?) 눈빛을 가졌다.

그 눈 속엔 나에 대한 걱정과 슬픔, 아쉬움 등등이 있어서 그 눈을 보면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난다. 엄마의 눈을 피하기 위해 나는 '안아줘'란 말을 하고 그 등 뒤에서 눈을 꼭 감는 일을 한다. 며칠 전, 엄마는 먼저 눈을 피하기 위해 나를 안았다.

집 문을 열고 들어서서 가장 먼저 본 엄마의 눈빛, 그 날의 눈빛은 조금 달랐다. 한국어로 형용할 수 없는 눈빛을 하고 날 바라보는데, 마음이 쓰라렸다. 난 그렇게 그런 눈빛을 가진 엄마가 해준 밥을 먹고, 엄마의 눈빛을 또 피했다.


"괜찮아, 엄마가 다 울었으니까. 넌, 울지 마."


떨리는 목소리로 엄마가 내게 그렇게 말했다. 나는 깜짝 놀란 눈을 하고 엄마의 눈빛을 바라보았다. 그 안에 얼마나 슬펐을지,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딱한 내가, 먼 곳에서 혼자 오는 내가 다 들어있었다. 그 안엔 어제의 내가, 그 어제의 나도, 최근의 나부터 아주 오래전 어린 꼬마의 나까지 들어있었다. 엄마는 얼마나 나를 사랑하기에 그 안에 그 아픔과 그 슬픔과 모든 추억을 안고 있을까. 그 눈으로 나를 위해 한 번 더 눈물을 흘렸다는 게, 참 슬펐다. 덕분에 난 울지 않았다.



괜찮다.

내가 이렇게 말을 할 수 있는 것과 그 모든 원동력이 어디에서 나오나 했는데, 엄마의 눈빛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내 하루는 내 일주일은, 아무렇지 않게 세상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고 흘러간 날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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