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이 중요한지, 내가 가진 시야가 한정적인 것은 아닌지 살펴보자
문제는 항상 있다. 문제를 풀어내는 답도 항상 있다. 그러나 문제를 잘못 짚으면, 답이 나와도 풀리지 않는다. 왜냐하면 무엇이 중요한지 놓쳤기 때문이다.
매장에 나간 장비가 비정기적으로 고장난 적이 있다. 프린터가 인쇄를 하기 위해 용지를 빨아들이는데, 이때 멈추지 못하고 용지를 밖으로 쭉 뱉어버렸다. 용지가 쭉 내밀어진 모양이 마치 프린터가 메롱하는 모습 같아서, 우리는 이를 '메롱 현상'이라고 불렀다.
문제가 발생하면, 먼저 전체적으로 어떻게 동작하는지 짚어본다. (재미없는 설명을 잠시 하자면) 프린터 API를 통해 명령을 주면, API는 프린터에게 통신을 보낼 준비를 하고, USB를 타고 메세지가 보내지고, 프린터의 USB 인터페이스를 통해 통신을 받고 MCU의 통신 IO 핀에 명령이 들어갈 것이다. MCU는 모터 드라이버를 on 시키고, 모터 드라이버에 의해 모터가 돌기 시작하고, 용지와 잉크가 서로 마찰하며 용지에 잉크가 남겨지고, 마지막에 코팅작업을 거쳐 인쇄가 마무리된다. 이 타이밍 어딘가에서, 문제가 발생하지 않을까 했다.
나는 프린터 내의 정전기 문제로 추측된다고 이야기했다. 마침 정전기가 많은 겨울철에 문제가 발생하기 했으니까 말이다. 그러나 영업팀에서는 계속 다른 곳을 원인으로 짚으며 계속 테스트 해달라고 요청했다. 코드가 문제가 아니냐. API를 잘못쓴게 아니냐. 여러 엉뚱한 곳을 문제라고 주장했다. 그렇게 보기 어려운 점을 설명했지만, 납득이 되지 않았다. 아무것도 안한체 서로 토론만 하다가 지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확인을 시켜주기 위해 말한대로 다 수정해주었다. 당연하지만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어느날은 너무 짜증이나서, 프린터를 열고 용지를 꺼내 머리카락에 비볐다. 빗으로 머리를 빗으면 정전기가 생기는게 떠올라서, 직접 보여줘야 겠다고 생각했다. 정전기를 잔뜩 품은 용지를 넣었더니, 용지가 움직일 때 프린터기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오작동 하였다. 문제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다시 설명했다.
여러 좌충우돌을 겪다가, 영업팀과 같이 프린터 납품 업체를 만났다. 나는 그제서야 진짜 문제를 파악했다. 납품 업체는 프린터를 만든 업체가 아니라 OEM을 받아 납품한 업체였다. 그러니 납품 업체는 우리 문제를 듣고 바로 해결해줄 수 없었다. 중간 입장에서 설명하다보니 기술적인 설명을 제대로 못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제조 업체랑 커뮤니케이션하겠다고 하니, 계약상 그럴 수가 없다고 했다.
이때의 계기로 영업팀이 기술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이 어떤 것인지 알았다. '우리가 생각해볼 수 있는 모든 경우의 수를 다 시도하여 최선을 다했으니, 이제 당신들의 차례다'라는 메세지를 설득적으로 전달하는 방법이었다. 기술 지원을 제대로 받을 수 없는 상황에서는 그럴 수 밖에 없었다.
매년 연례행사마냥 문제를 겪는다. 아예 우리가 다 분해하고 뜯어보고. 협력 업체한테 소스코드 받아내서 직접 버그 밝혀내고. 매번 만나는 문제를 어떻게든 해결해왔다. 비효율적인 것 같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어떻게든 문제는 해결해나가니까 전진은 하였다. 그러다 올해는 정말 역대급 이슈를 겪었다. 우리가 시도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였지만, 해결되지 않았다. 제조사에게 공을 넘겼고, 제조사는 문제 파악에 들어갔다. 그렇게 5개월의 시간이 지났다.
엊그제 제조사의 영업팀이 와서 지금까지 원인 분석 과정을 이야기 해주었다. 직접 임베디드 업체에 분석을 의뢰하였다는데, 블루투스와 LAN과 통신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하는 걸로 보인다고 한다. 들어보니 우리가 해결할 수 있는 영역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 뒤의 이야기는 영업팀에게 공을 넘겼다.
3개월 동안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큰 전진이 없었다. 우리 팀은 제조사에서 원인이 밝혀주기만 기다렸다. 그러는 동안 우리는 우리 서비스를 더 확대하지 않고 기다렸다. 코로나도 있고 주춤한 점도 있긴 했다.
하지만 진짜 문제는 우리가 만든 서비스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 문제였다. 다 같이 붕 떠버린 마음으로 일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문제가 발생안하는 다른 장비로 빨리 교체해서 나갈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것만 해결되면'이라는 핑계로 멈쳐있었다. 시야가 좁혀진 탓에, 우리의 방향을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를 잘 짚으려면, 넓게 보는 시야가 정말 중요하구나 싶다. 그리고 우리가 어느 방향으로 나가고 있는지 계속 돌아볼 필요가 있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