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과의 소통
내 모국어는 한국어와 한글이지만 한글이 한국어보다 더 편한 이유가 글로 소통하는 게 더 정확하기 때문이다. 한국어는 정말 두 눈 크게 떠도 상대방의 입모양이 익숙하지 않거나 거의 움직이지 않는다면 정말 입모양을 읽으려고 해도 힘들기 때문이다. 상대방도 내 목소리와 발음이 익숙치 않으니 평생 내 목소리를 들은 가족 외엔 바로 알아듣기 힘들다.
20대 중반 때 한국수어를 배우기 시작하면서(한국수어 존재를 인식한 건 20대 초반이었지만 abc 알아두는 거처럼 ㄱㄴㄷ 지화 정도만 알아두는 정도) 한국어 사용 비중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한글은 지금도 편안하게 느끼는 언어다. 한국수어를 배운 후에도 나는 가족들과 직접 대화를 나눌 땐 한국어였고, 엄마께서 한국수어를 배우고 난 후에도 여전히 한국어가 1순위였다. 물론 카카오톡으로 메시지를 주고 받는 건 당연히 한글.
남편하고 결혼하면서 미국 부모님이 생겼다. 한국 부모님과 미국 부모님.
(*자연스레 미국 부모님께도 엄마아빠라고 부르는 중이라 심리적으로 부모님, 시부모님 단어보단 한국 부모님, 미국 부모님 단어가 더 편해서 이렇게 썼다.)
미국 부모님과는 한글로 소통을 한다. 그 말인즉 필담.
결혼하기 전에 미국 부모님 뵈었을 때 탁자 위에 종이뭉치와 펜들이 놓여져 있는 모습이나 같이 외출할 때 가방 속에 작은 메모지와 펜을 들고 다니시는 모습을 보면서 자연스레 남편은 가족들과 필담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걸 굳이 설명 안 들어도 알 수 있었다. 남편과 미국 부모님께선 평생 영어로 필담 주고 받았다. 한국어, 한글, 한국수어를 모르는 남편은 영어와 미국수어를 먼저 배웠기 때문에 뒤늦게 영어를 배우신 부모님께선 남편과 대화를 나눌 땐 영어로 필담을 나누신다. 미국 엄마께선 간단한 abc 지화 정도 아셔서 미국수어로 대화를 나누는 건 어렵다.
나와 미국 부모님은 서로 입모양, 목소리, 발음 등 모든 게 익숙치 않은 거도 있지만 대화에 오해가 없기 위해 한글로 필담을 나눈다. 두 분 모두 별로 불편해하지 않으신다. 남편과 평생 필담으로 이야기 나누는 거에 익숙해져선지. 넷이서 다 같이 탁자에 앉아서 이야기를 나눌 땐 흰 종이는 한글로 빼곡 차 있지만 공간 속의 언어는 미국수어다. 모든 언어가 각 언어만의 뉘앙스, 단어가 있는 듯이 가끔 각 언어 속의 미묘한 간격을 메꾸는 건 양쪽의 언어를 알아야 가능한 일인 거 같다. (늘 생각하지만 통역사, 번역가 대단하다. A 언어를 B 언어로 옮기는 건 맞든 틀리든 참 어려운 일이기 때문에) 아직 미국수어를 배우고 있는 중이라서 가끔 어떻게 해석하는 게 좋을까 싶은 순간도 있지만 공간에 슥슥 그림 그리다 보면 남편이 알아채곤 한다.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 어떤 그림을 그리는지, 어떤 영상을 띄우는지 알려면 그 또한 서로의 삶 속으로 스며 들어야 가능한 거 같다. 아직도 우린 진행형.
물론 미국 부모님과 남편이 직접 나눌 이야기가 있다 싶으면 종이 위의 언어는 한글에서 영어로 옮겨지는데 그땐 가만히 있는다. 내가 대답해야 하는 부분이 있으면 나 또한 같이 이야기 나누지만.
남편 누나네도 최근 만났는데(코로나 때문에 계속 만날 날을 잡지 못 하다가) 누나는 미국수어 단어 몇 개 정도 알고 누나 남편 분도 abc 지화 정도 알고 있었다. 조카는 미국수어 잘 모르지만 부모님이 하라는대로 따라하는 정도.
다 모인 자리에서 abc 미국지화가 계속 오갔다. 사실 대화 절반이 미국수어반이나 마찬가지였다. 미국수어 지화로 어떤 단어를 미국수어로 어떻게 하냐는 질문 뒤에 대화가 오가는 식. 중간에 몇 번 폰 메모장 통해 대화를 나누기도 하고. 천천히 오가는 대화였지만 어느 누가 소외되지 않는다는 점이 좋았다.
반대로 남편이 우리 가족하고 대화를 나눌 땐 엄마께서 영어 가능하셔서(원래 영어 잘 하셨는데 안 쓴 지 30여년 넘어서 기억이 잘 안 나신다고 하심) 카카오톡으로 대화를 나누든 필담이든 대화 나눈다. 그러면서도 남편이 한국수어를 알면 그래도 수어로 좀 더 대화를 나눌 수 있을텐데 그러신다.
그래도 수어의 기본이 비언어적인 표현이나 공간적인 개념은 비슷해서 남편은 엄마께서 하는 이야기는 대충 알아맞춘다.
내 동생은 영어를 아주 잘 해서 남편과 톡 주고 받는데엔 별어려움이 없다. 아빠 닮아선지 과묵하기도 해서 아빠나 동생이나 둘 다 말을 아끼는 편이라 거의 엄마께서 가족 간의 대화 중심을 잡고 있는 거 같다.
많은 부부가 결혼하고 나면 상대방 가족과 어떻게 지낼 지 고민하겠지만 농부부가 더 그럴 거 같다. 대부분의 농부부의 부모님은 청인이기에 각 가족간의 소통방식은 다를 거니 거기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는 점이 어려운 건 사실이다.
나는 결혼해서 미국에 왔지만 다행히도 미국 가족들도 좋으신 분들이고 딸처럼 예뻐해주셔서 한국 부모님, 미국 부모님 모두에게 자주 연락하고 대화 나누곤 한다. 모두 다 다른 점을 본인한테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고 다른 점은 인정하고 그걸 어떻게 서로 맞춰야할 지 생각하면서 소통을 하려는 열린 마음을 가진 분들이셔서 늘 감사하게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