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정체성에 대해
농정체성에 대한 글은 결코 가볍지 않기에 선뜻 글을 쓰기엔 마음 준비가 필요했다. 물론 모든 사람이 자기만의 가치관이 있고 그 가치관에 따라 각 인생을 살아가지만 내 가치관이 누군가에겐 상처가 될 수도 있고 힘이 될 수도 있기에 우선 내 마음부터 준비가 되어야 했다.
물론 가치관이나 신념은 향후 변할 수도 있는 거지만, 대개 쉽게 변하지 않기도 하다. 나 또한 그래왔고, 전에 가졌던 가치관이 흔들렸을 때 괴리감을 많이 느꼈지만 현재 가지고 있는 농정체성에 대한 가치관은 이러하다는 걸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다.
농정체성에 대한 가치관은 남편과 나 둘 다 비슷한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어서 이에 대한 주제로 대화를 나눌 땐 오히려 그 동안 나 혼자 속으로 쌓아둔 생각과 감정들을 정리할 수 있는 계기가 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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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대 초반까지 농사회나 수어를 몰랐고, 10대 땐 나처럼 한국어를 구사하고, 소통에 막힘이 있으면 필담으로 소통을 계속 이어나간 비슷한 상황에 처한 다른 '청각장애인'들 몇 알고 있었다. 다들 나처럼 농사회나 수어를 몰랐고 한국어와 한글을 구사했다. 그저 청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청각장애인'이었다. 각자 다르겠지만 다들 청인 사회에서, 음성사회에서 원하는 기준에 맞추기 위해 정말 누구보다도 배로 노력을 했어야 했고 고민도 많이 했었다. 입장이 비슷했기에 동료애까지 느꼈던 거 같다.
대학 입학 후 청각장애인인 A를 통해 농사회를 접했다.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농인과 청각장애인들이 많이 모였던 캠프에 발을 들인 순간 충격 받았다. 신기하면서도 충격적이었던 게 나와 비슷한 나이대인 친구들이 현란하게 수어를 구사하면서 시끄럽게(그 당시 나는 보청기를 착용했었기도 하지만 그 이상으로 시끄러웠다. 누가 수어를 하는 사람들이 조용하다고 했는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었다.
수어는 뉴스 하단에 작게 나오는 수어통역사의 수어만 봤기 때문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수어를 구사하고 있단 게, 마치 다른 세상인 줄 알고 어리둥절했다. 수어의 수자도 몰랐던 나는 A와 같이 눈치만 보다가 나처럼 입모양을 읽고, 말도 하는 몇몇과 천천히 대화 나누면서 캠프를 재미있게 즐기기 시작했다. 알찬 프로그램 덕분에 많은 이들과 금방 친해졌지만 상처 받기도 했다.
"안녕, 난 수어를 몰라. 수어할 때 입모양도 같이 움직여줄 수 있어? 나도 입모양으로 천천히 이야기할게."
"너는 농인인데 왜 수어를 몰라? 당연히 수어를 해야지."
"나는 농인이 아니라 청각장애인이야. 수어는 오늘 처음 봤어. 모르는 건 당연하지."
"청각장애인 단어는 틀린 거야. 농인 단어가 맞아."
"나는 내가 청각장애인이라고 생각해."
"아니야. 청각장애인은 청인들이 만든 단어야. 우리들은 다 농인이야."
"난 농인이란 단어를 이번에 처음 들었어. 그리고 그 단어가 어색하기도 해. 농인이나 수어는 나도 앞으로 천천히 알아가려고 해."
"아냐, 네가 틀렸어. 네 주변 사람, 부모가 너를 청인처럼 살게 하려고 세뇌한 거야. 네 부모님은 너에게 말 배우라고 강요, 억압한 거야. 네 부모님이 틀린 거야."
그 순간 너무 화나서 그 자리를 박차나왔던 거 같다. 각 입장을 존중하지 않고 자기 생각만 강요하는 게 불편한 걸 넘어서 부모님을 먹칠하는 이야기가 나오는 건 선을 넘었기에.
농사회를 접한 게 처음이었는데, 수어를 배울 마음이 싹 사라졌다. 이후 간단하게 지화(모음, 자음) 정도 배웠지만 그 이상은 별로 배우고 싶지 않았다. 한 5년 정도 안 배웠던 거 같다. 농사회는 궁금하니까 행사나 세미나가 있으면 참여하곤 했지만 수어만큼은 배우고 싶지 않았고 많은 이들이 농인, 농사회, 수어 등 강요 아닌 강요하는 걸 다 거부하고는 했다. 되려 농인은 뭐냐고, 농사회는 뭐냐고 물어봤는데 농인은 수어를 하는 사람, 농사회는 농인들이 모이는 곳이라고 했지만 논리적으로 납득이 되지 않아서 늘 시원찮았다. 수어에도 한국어대응식 수어, 자연수어(농식수어) 등 여러 종류가 있다는 거도 이해 안 되었다.
결국 수어를 배우게 된 계기가 있었는데, 나를 농사회에 데리고 가 준 A가 중간에서 늘 통역을 하는 모습을 보니 A는 내 친구지, 통역사가 아니라는 걸 깨달으니 뭔가 잘못된 거 같았고 미안했다. A도 나와 비슷한 처지였지만 그 캠프 이후에 열심히 수어를 배워서 빠르게 농사회의 일원이 되었다.
진지하게 수어를 배우기로 마음 먹으니 그 이후는 어렵지 않았다. 여러 수어 수업에도 나가고, 여러 농사회 행사에도 참여하고, 농인 친구들도 많이 만나고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몰라도 열심히 손이 오가는 걸 봤다. 피곤하면 먼저 집에 가도 되는 걸 괜찮다고 하고 계속 무슨 대화가 오가는지 눈과 고개가 아플 정도 봤다. 몇 년 지나자 수어가 전에 비해 좀 더 편해졌다. 그 때 농인, 청각장애인 단어를 혼용하면서 사용했는데 주변에선 '너는 농인이지'라고 해도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불편했다. 뭔가 마음 속 깊이 그 단어를 인정 못 하는 거 같았다.
어느 날, Frontrunners 학교를 알게 되었고, 고민하다가 일 그만두고 덴마크로 날아가서 9개월 커리큘럼을 수료한 뒤, 터키에서 열린 WFD 컨퍼런스에도 참석하고 한국으로 돌아왔을 무렵 내 정체성, 가치관이 좀 다르다는 걸 온몸으로 느꼈다. (Frontrunners, WFD에 대한 건 다른 글에서 풀 예정이다)
그 동안 나를 청각장애인으로 규정해왔다가 Frontrunners 수료 후 비로소 농인으로 규정하게 되었다. 24시간 동안 수업, 기숙사 등 부대끼고 살았던 이들은 세계 각국에서 온 농친구들과 선생님들인데 대화를 나누려면 '국제수화'를 구사해야 했고 음성언어를 사용할 일은 없었다. 물론 한국 친구들, 가족들과 연락할 때 가끔 한국수어나 한국어를 구사하곤 했지만 매일 매순간 사용한 건 국제수화였기 때문에 자연스레 몸에 스며들었고 그제야 수어가 정말 편해지기 시작했다. 그 무렵 청각장애인 단어가 불편해지기 시작하고, 농인 단어가 나를 정의하는 거 같단 느낌을 받았다. 가만 생각해보니 한국에선 행사가 있거나 농친구들을 만날 때만 잠깐 수어를 쓰고 그 외엔 아니었으니 온전히 몸에 익히기엔 역부족이었던 거 같다.
그리고 한국 귀국 후 만나는 사람들마다 내가 한국수어를 할 때보다 국제수화를 하는 모습이 더 자연스럽고 편해보인다고 했는데 그 말은 굳이 내가 머릿 속으로 이건 이렇게 표현해야지 이런 생각을 할 필요 없어서 그랬던 게 아닐까 싶다. 언어는 자연스럽게 스며들어야 자연스럽게 표현이 되는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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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스스로 자문자답해왔지만, 뭔가 부족하단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이는 남편과 대화하면서 어느 정도 자락이 잡혔다. 남편과 다양한 주제로 여러 이야기를 하지만 자주 튀어나오는 주제는 농 관련된 건데, 최근에 그 주제가 또 나왔다.
농인, 청각장애인, 난청인, 청인
Deaf person, deaf person, Hard of hearing person, Hearing person
본인이 수어를 자연스럽게, 편안하게 구사하지 않는 이는 농인이라고 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남편에게 본인이 스스로 농인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도 존중해줘야 하지 않느냐고 물어봤다.
정체성은 그에 대한 문화와 언어를 지니고 있고 소속감이 있어야 하는 건데 그 사람이 표면상으로만 수어를 조금 알고 있고 농사회에 소속된 거도 아니라면 농인이란 단어를 통해 얻는 이득을 위해 사용하는 거 아닐까 싶단다. 물론 이후 본인이 수어를 정말 편안하게 구사하고 농사회 구성원으로 될 경우 그땐 농인이란 단어를 쓰는 건 그때의 일이란다.
그럼 수어가 모국어고 농사회의 일원인데 본인을 청각장애인이라고 하는 이는 뭔지 물어보니 그 사람이 속해 있는 곳을 한 번 살펴봐야 한단다. 주로 청사회에서 숨쉬고 있고, 청인과 주로 어울린다면 그럴 수도 있단다. 그런 환경도 아니라면, 본인이 청인이 되고 싶으니까 그런 거 같단다.
자긴 두 사회 모두 편하게 오간다는 이 혹은 농인, 청각장애인 두 단어를 혼용해서 사용하는 이들은 어떠냐고 물어보자, 사람이 두 사회를 공평하게, 완벽하게 반씩 나누는 건 불가능하단다. 몇 % 정도 좀 더 가까이 소속감을 느끼거나 자주 만나서 어울리는 친구들을 보면 어느 정도 답이 나온단다. 청사회에서 일하더라도 주로 만나는 친구들이 농인들이라면 결국 본인은 농인이고, 반대 경우도 마찬가지로 농사회에서 일하고 지내더라도 본인이 자주 만나거나 친구들이 청인들이라면 청각장애인인 거 같단다.
물론 두 사회 모두 편안할 수는 있지만 어느 한 쪽이 좀 더 본인에게 가깝게 느껴지는 게 반드시 있다고 생각한단다. 예를 들면 누군가가 본인이 선호하는 소통방식이 음성언어라고 하면 그 사람이 더 가깝게 느끼는 사회는 청사회인 건 당연하단다. 그리고 농인이 아무리 노력해도 청인만큼 말하고 듣는 건 불가능하단다. 늘 한계가 있기 때문에 배로 노력하거나 늘 불편함을 느낄 수 밖에 없단다. 수어와 음성언어 둘 다 잘 구사할 줄 아는 농인이더라도 농인이든 청인이든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 어느 한 언어가 분명히 본인에게 훨씬 더 편한 언어가 있다고 한다. 어떤 지점에 한 쪽에 살짝 치우쳐 있는 부분이 있다고 한다.
음성언어를 구사할 줄 아니까 청인들에게 음성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 걸 보여준 순간, 공을 쥐여준 거나 마찬가지란다. 본인이 공을 쥐고 싶으면 필담으로 하거나 수어를 하면서 나는 당신의 언어를 구사할 줄 아는데(필담), 당신은 왜 내 언어를 구사할 줄 모르냐고 그게 슬프다고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단다. 실제로 많은 청인들이 메모장에 요구사항을 명확하게 적었음에도 불구하고 놓치는 부분이 많다고 한다. 과연 농인이 제대로 못 읽는다고 말할 수 있을까? 자기들도 글을 제대로 안 읽는데 혹은 못 읽거나. 앞서 말한대로 농인은 문법체계가 다른 수어도 하고 글도 쓰고 배로 노력하고 배우는데 청인은 쉽게 '언어'를 얻음에도 불구하고 농인들이 자기들 기준에 맞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슬프단다.
그리고 늦게 청력손실 통해 청각장애인이 된 경우, 난청인이니 농인, 청각장애인이 아니라 그냥 안경을 낀 사람처럼 보청기나 와우라는 보조기를 낀 사람일 뿐이란다. 즉, 그 사람은 청인이나 마찬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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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일화 중 하나.
남편이 직장 면접을 볼 때 면접관이 남편에게 말할 수 있냐고 물어보자, 남편이 아니라고 왜 물어보는지 물어봤단다. 그러자 전에 다른 농인이 여기서 일한 적 있다고 했다. 그 농인은 말할 수 있다고 하자 남편이 그 사람은 미국수어를 할 줄 아냐고 물어보자 모른단다.
그래서 남편은 그 사람은 농인이 아니라 청각장애인이라고 했단다. 그 사람 같은 사람들이 청인들의 생각을 복잡하게 만든다고 대답했다고 한다.
청인이 처음으로 만난 청각장애인이 수어를 모르는데 그 사람이 본인을 농인으로 지칭하면 자연스럽게 농인은 다 그 사람처럼 말할 줄 알겠구나 생각한단다. 많은 청각장애인, 농인들이 단어를 너무 쉽게, 함부로 쓰는 거 같단다.
그래서 '정체성1'에 쓴 글에서는 본인이 정체성을 정의내리는 거지만 반대로 '정체성2'에서는 정말 농사회의 일원인 누군가가 상대방이 농인인 척 코스프레한다고 생각한다면 그 사람은 농인이 아니라 청각장애인인 거란다.
또 다른 일화.
현 직장 면접관이 청인인 고객들과 어떻게 소통할 건지 물어봤단다. 되려 이렇게 물어봤다고 하자 아무 말 못 했다고 한다.
"당신은 농인 고객을 만나면 어떻게 소통할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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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과 여러 이야기를 주고 받다 보니 문득 덴마크 다녀오고 난 후의 내 삶이나 만나는 주변 사람들이 크게 변했다는 걸 느꼈다. 그 속에서 나는 점점 음성언어보다 수어가 더 편해졌고 청인들과 만나더라도 친구로서 만나는 이들은 거의 없고, 친구들 대부분이 농인이었다.
긴 여정 속에서 천천히 나 나름대로 체계적으로 스스로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었던 게 아닐까 싶다. 스스로 납득이 될 때까지는 '농인' 단어를 함부로 쓰고 싶지 않았기에, 조심스러웠기에 고민을 많이 했던 거 같다.
예전의 나라면 남편과 이야기가 절대 안 통했을 거고 말싸움까지 했었을 거다.
지금의 나는 수많은 고민, 경험을 통해 전에 가졌던 가치관을 지금의 가치관으로 바꾸는데에 결코 쉽지 않았기 때문에 오히려 나와 비슷한 경험 혹은 예전의 나와 비슷한 사람들을 보면 그저 기다려주게 된다. 바뀔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만 모든 사람의 속도가 다 똑같을 순 없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