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은 누가 정의하는 걸까?
네이버 국어 사전에 나오는 정체성 정의는 이와 같다. 그러면 정체성은 본인이 정하는 걸까, 타인이 정하는 걸까? 이에 대해 고민해본 사람들도 많을 거다. 그 중 본인이 다른 사람과 조금이라도 다르다고 생각이 되는 이들이 더욱 더 정체성에 대해 고민할 거고. 나 또한 '소리'라는 존재를 온전히 느껴보지 못했기에 중학교 때부턴가 내 정체성에 의구심을 많이 가졌다. 대학교 전공이 조소학과라서 늘 무언가를 작품으로 승화시켜야 했었다. 특히 졸업작품은 본인을 버려야할 정도로 적나라하게 작품을 만들어야 했었다. 그렇지만 그 과정에서 몇 번 무너진 나는 온전히 나를 세상에 드러낼 준비도 안 되었고 원치 않았다. 그런 척 하려고 했지만 몇 교수님들은 그냥 넘어가지 않으셨다.
결국 내 의지가 이겼고 적당한 작품으로 졸업했고 그 후로 예술계에서 떠났다. 어릴 때부터 항상 미술 세계에서 뛰놀았던 내가 졸업작품으로 인해 그 세계에서 나올 줄 누가 알았을까.
가장 결정적인 계기는 조기졸업을 하게 된 나에게 장학금 지원 및 대학원 진학 제안이 들어왔을 때였다. 부모님께선 아까운 기회니까 수락했으면 하는 눈치였지만 정작 제안을 받은 나는 기쁘지도 않았고 오히려 두려웠다. 고민하다가 연륜이 많은 한 교수님을 뵈었다. 이미 내 고민을 눈치채신 교수님께선 단 한 마디만 하셨다.
'너를 그대로 솔직하게 보여주는 작품을 만들 수 있느냐?'
그 순간 이미 답이 나왔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전혀 준비가 안 되었다.
억지로 그 길을 걸어가게 되면 돈도 시간도 나 자신 모두를 잃어버리게 될 거니까.
이 선택은 지금도 후회하지 않고, 진정으로 제자를 위해주신 교수님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다. 대학교 졸업 후에도 정체성 찾기 여정은 계속되었는데 좀 더 뚜렷해지게 된 계기가 덴마크에 있는 Frontrunners 학교 덕분이었다. 이에 대한 이야기는 나중에 풀 예정이다.
이후 남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남편의 정체성 및 농정체성 두 가지에 대한 남편 관점을 알고 나니 어느 정도 일리 있었다.
요즘 BLM로 인해 몇 백년 동안 쌓였던 흑인들의 울분이 터졌다. 심지어 흑인 단어도 고려하고 있는 분위기고. 한국수어로 흑인 수어가 '아프리카+사람'인데 아프리카 수어가 또 두 개로 나눠진다. 하나는 아프리카 지도 모양을 뜻하는 수어고 또 다른 하나는 코에 무언가가 달린 혹은 팔뚝을 뜯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수어다. 언어는 시대에 따라 계속 바뀌는 법이니 예전에는 그렇게 쓰여도 지금 이 시대에 안 맞다 싶으면 바뀌는 듯이 수어 또한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렇다고 옛 단어를 없애자는 건 아니고 흐름에 맞춘 단어로 사용하되, 옛 단어는 예전에 그렇게 쓰였다는 기록 정도로 남기자는 거다.
어느 날 독일에 살고 있는 한 한국농인이 누군가가 한국수어로 '흑인' 수어가 뭐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당황했다는 이야기를 페이스북에 한국수어영상을 올렸다. 그 동안 그렇게 사용했지만 지금은 그 단어가 흑인 당사자들에게 불편한 수어일 수도 있다면서 새 단어를 만드는 게 좋지 않을까 고민하는 내용이었다.
이 영상을 보고 난 후 남편과 이야기 나눴다. 남편은 흑인 당사자가 결정할 문제고, 흑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왈가부가할 문제는 아닌 거 같다고 했다.
그래서 영상을 올린 사람에게 동의를 구한 뒤, 내가 직접 세계 각국에 살고 있는 흑인들에게 한국수어로 뜻하는 '흑인' 단어가 불쾌한지 아닌지 그리고 새 단어를 만든다면 어떤 단어가 좋을지 물어보는 미국수어영상을 페이스북에 올렸다. 안타깝게도 큰 반응은 없었지만 따로 미국에 살고 있는 한 친구에게 한국수어로 뜻하는 '흑인' 수어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어봤다. 왜냐하면 그 친구는 한국어, 한국수어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좀 더 제 3자의 관점에서 바라볼 수 있지 않을까 싶었기에.
그 친구의 답변은 본인 및 가족들은 아프리카와 관련이 없고, 다들 미국에서 태어났고 아프리카 문화, 음식, 전통 등 하나도 모르고 소속된 곳도 없기 때문에 한국에서 누군가가 본인을 '아프리카+사람'이라고 했을 때 불편했다고 한다. 'Black person' 대신 'African-American' 이 단어로 쓰자는 이야기도 썩 와닿지 않는다고 했다. 본인 정체성에 대해 굳이 이야기하자면 '미국인 American'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또한 내가 한국 친구들에게 그 친구를 소개 시켜줄 때 '흑인+친구'가 아닌 '미국+친구'라고 소개했을 때 고맙게 생각했단다. 생각해보니 나는 그 친구를 '흑인'이 아닌 '미국인'으로 바라봤기 때문에 피부색으로 친구를 소개하는 걸 불편하다고 무의식으로 생각했던 거 같다.
남편은 그 친구 입장이 이해 된다고 했다. 남편은 한국에서 태어났지만 어릴 때 부모님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왔다. 이민 목적은 아니었지만 살다 보니 눌러앉게 되었고 지금은 부모님 및 남편 모두 미국인이다. 한국 국적을 포기한 지 꽤 되었고, 특히 남편은 그 동안 한인사회나 한국 친구들 등 접할 기회가 거의 없었다. 대학 진학 후 애국심이 강한 친구들도 몇 만났지만 어울리지 않았다고 한다. 부모님께서 한국 음식을 해줄 때는 그냥 먹었을 뿐 그 이상 이하는 아니었단다. 친구들도 거의 아시안이 아닌 다른 인종 친구들이 많았단다.
그래서 본인 정체성을 떠올리면 '미국인'이라고 한다. '한국계 미국인 Korean-American'이 아니라. 나 또한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부터 지금까지도 남편을 보면 한국인이나 한국계 미국인이란 생각이 안 든다.
평생 다른 환경에서 지낸 두 사람이 한 공간에 있으면 부딪히는 건 당연하지만 우린 문화 차이도 있어서 간혹 성격 차이가 아니라 문화 차이로 인해 부딪힐 때마다 늘 속으로 '아, 이 미국인...' 이 말을 되뇌인다. 한국 문화를 거의 모르기 때문에 가끔 한국문화는 이렇다 설명을 하는데 그 덕분에 부모님에게서 본 무언가가 한국문화에서 온 거라는 걸 나 덕분에 알게 된단다. 남편 말론 부모님께선 미국수어를 잘 모르시고 영어도 가끔 남편이 사용하는 영어랑 다르다 보니 시원하게 대화를 주고 받는 건 한계가 있어서 늘 지레 짐작만 해왔다고 한다.
결혼 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미국에 사는 한국계 미국인인 친구(이 친구는 한국어, 한국수어도 알고 스스로 애국심이 강하고 본인이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기 때문에 누가 봐도 한국계 미국인)에게서 연락이 왔을 때 이야기 나누다가 중간에 남편 인종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사실 남편 얼굴만 보면 한국인이라고 추측하기 어려운 이유가 평생 다양한 인종과 부대끼고 살아선지 전형적인 한국인 이미지나 교포 이미지가 별로 없다. 그 당시 남편하고 정체성에 대해 이야기 나누기 전이었는데, 아무 생각없이 남편은 미국인이지만 한국에서 태어난 사람이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친구는 망설임없이 '한국계 미국인이네'라고 했다. 그 때 알 수 없는 불편함으로 인해 '한국에서 태어난 건 맞지만 한국 정체성은 없는 사람이다'라고 했지만 '그런 사람을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부르는 거다'라는 이야기만 돌아와서 괜히 언쟁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대충 대화를 마무리 했었다. '흑인' 한국수어에 대한 고민을 남편과 나눌 때 이 이야기가 생각나서 남편에게 뒤늦게 이야기 하니까 남편은 그 친구가 섣불리 남의 정체성을 이래라저래라 한 건 그 친구가 신중하지 못 했던 거 같다고 했다. 자기와 만난 적도 없고 알지도 못하는데 외적인 부분만 보고 쟤는 이렇다 저렇다 하는 건 위험한 생각이라고 생각한단다. 나중에 나에게서 한국문화, 한국어, 한국수어 등 많은 걸 접하게 되어 본인도 한국인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한국 친구들도 생기고 무언가 소속감이 들게 된다면 그땐 '한국계 미국인'이라고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적어도 지금은 '미국인'이라고 생각한단다.
네이버 국어사전에서 정의한 정체성 의미만 봐도 이런 종류의 정체성은 타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본인에 의한 결정인 거 맞는 거 같다. 생각해보니 앞서 이야기한 미국 친구나 남편 모두 다 미국인이라고 생각했던 나는 두 사람에게서 딱히 다른 문화에 대한 애국심, 자부심 등 못 느껴서 그랬나 보다.